곤한 자들을 위한 쉼으로의 초청

곤한 자들을 위한 쉼으로의 초청

(마태복음 1124-30)

주일 설교 (전도 초청의 날, 2015 8 16)

들어가는 말

 

여러분, 생각지도 않은 귀한 자리에 초청을 받아 보셨나요? 고등학교 시절 친척의 도움으로 미국 이민 초청을 받은 친구를 바라보며 너무 부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Moore College 의 학장이셨고 Anglican 교회의 시드니 대주교를 지내신 Peter Jensen박사님의 초청이 기억에 남습니다. 24년전에 Moore College라는 신학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동양학생이 저 외에는 없었습니다. 영어도 제일 못하고 호주 문화도 전혀 적응을 못하고 있던 정말 처량하고 불쌍한 처지였습니다. 게다가 돈도 없었고 솔직히 지금이나 그때나 실력도 별로였습니다. 하루하루 학교에 가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힘들었던 시절입니다.

 

그렇게 고단하고 힘든 첫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학장님이시던 Peter Jensen교수님이 제게 다가오시더니 저와 저의 가족을 집으로 초청해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어지지 않았고 솔직히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호주 사람들의 문화도 잘 몰랐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약간 불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초청은 진심과 배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뭔가 그 분의 기대를 만족시켜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강렬하게 솟구쳤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 입장에서는 그분께 해 드릴 만한 것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식사를 하러 가면서 한국에서 가지고 온 88년 서울 올림픽 기념주화를 한 개 가져다가 선물로 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별것 아니겠지만 저로서는 한국을 떠나면서 조국을 생각하고 간직하려고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그분은 사양하셨지만 결국 받으시면서 굉장히 고마워하셨습니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지 그때 그 일을 기억하고 계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그 자리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Jenson 박사는 저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 경제와 학업의 부담에서 불안해 하고 두려운 시간들을 보내는 제 처지와 심정을 눈치 챈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바쁜 일정가운데에도 저를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 주면서 제게 쉼을 주고 격려를 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후로 학교생활이 정말 많이 편해졌습니다. 영어실력도 강의소화 능력도, 재정적 압박도 상황은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여유가 느껴지고 학교생활과 목회, 가정과 세상직업 모두를 그런대로 감당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학생들과 교계뿐 아니라 사회에서 존경하는 그 분이 저를 개인적으로 자세히 알고 계시고 나를 지지하고 후원하고 있다고 믿으니 무거운 짐이 덜어진 것 같았고 마음이 참 평안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이나 강의실, 식당 같은 곳에서 만나면 언제나 웃어주고 제 이름을 불러 주던 그분의 존재는 팍팍하고 분주한 삶 속에서 소중한 쉼을 주었고 새로운 힘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때때로 이런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영원하고 완전한 쉼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하고 진정한 쉼을 주고 누리게 하는 참된 쉼의 수여자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런 쉼을 위해 여러분을 초청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호소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누구나 쉼이 필요한 게 인생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게 바로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수고와 무거운 짐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평안한 것 같고 수고도 고민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까? 제가 믿기로는 그 분이 이 예수님의 이 초청에 응하여서 매일 매 순간 그 분 안에서 짐을 내려놓고 쉼을 누리기 때문으로 생각이 됩니다. 혹 믿지 않는 분들 가운데 그렇게 보이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그 분의 생활의 내면을 모르셔서 그렇게 보일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남몰래 흘린 눈물과 한숨을 다 모아본다면 얼마나 많을까요? 겉으로 웃는 얼굴로 살아가지만 그 속은 울고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해 보입니까? 다른 그 무엇이 그 사람의 고민거리로 고통을 주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평안해 보입니까? 내면은 갈등과 번민 속에 무거운 짐을 가슴에 안고 지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잘 생겨서 좋아만 할 것 같습니까? 통계에 보면 그런 사람이 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부자라서 걱정이 없는 것 같습니까? 우리는 삼성의 창업자인 이병철회장의 화제가 되고 있는 "잊혀진 질문"이란 책을 통해 그분의 삶의 내면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인생의 짐이나 수고가 있을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문제로 무거운 짐을 느끼다 해답을 얻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병철 삼성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 1987년에 서울 절두산성당의 박희봉 신부에게 여러 내용을 담은 질문서를 보냈습니다. 이 회장의 구술을 필경사가 받아 적은 질문은 모두 24개입니다. 신의 존재와 창조론부터 과학과 종교, 종말론까지 다양했습니다. 박 신부는 질문서를 가톨릭대 교수였던 86세나 된 정의채 신부님에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정신부와 만나기로 약속이 잡힌 상태에서 이 회장이 1988년 갑자기 별세했기 때문입니다. "잊혀진 질문"이란 책은 이에 대한 24년 만의 대답입니다. 정의채신부의 제자인 차동엽 신부가 해결사로 나서서 쓴 것이 바로 그 책입니다. 이병철회장의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할까?' 바로 인생이 지고 가는 수고와 무거운 짐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차신부가 어떻게 답을 했고 무엇이 정답인지 제 의견을 말씀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궁금해서 참고를 하시려면 차 신분의 책보다는 노명관장로의 <무지개:-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를 사 보시기를 권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핵심은 보통 사람이 바라볼 때 모든 것을 다 갖고 누린 것 같았던 이병철회장 같은 사람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였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삶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를 당신의 세계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죄로 인해 저주 아래 놓인 존재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당신에게 오는 자에게 참된 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누가 감히 이런 담대한 약속을 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이고 가장 위대한 초청인 것입니다.

 

초청의 두 가지 측면

 

그런데 이 초청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측면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신적 측면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즉 예수님의 초청에 응해서 그 분께 나아가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할 일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입니다. 즉 쉼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먼저 "내게로 오라"는 인간적인 측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초청에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초청자인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시작이 됩니다. 구원은 신조나 교리를 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있거나 봉사를 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을 하거나 종교적인 의식을 행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올 때 비로소 구원은 시작됩니다. 초청이라는 말은 자발적인 반응을 요구합니다. 의무적인 참석을 요구하는 강제동원과 다른 것입니다. 제가 Peter Jensen학장님의 초청을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그 분의 집에 가면 그분이 저를 위해 준비한 만찬과 쉼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교제와 대화 가운데 학교생활의 지혜와 힘을 얻고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출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청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인정하고 그분의 초청에 겸손과 감사로 응할 때 쉼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발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 구원은 내 것이 되고 쉼도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큰 격려를 받는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all"입니다. 정말 좋은 초청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큰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예를 들어서 몇 년 전에 "Sound of Music" 공연이 오페라 하우스에서 있다고 칩시다. 남녀노소 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Musical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초청하면서 많은 분들이 있는 가운데 정목사님만 빼고요. 그랬다고 칩시다.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삶이 팍팍하고 힘이 드는데 그런 좋은 초청에 나만 제외된다면 정말 살맛 안 나고 힘이 빠지지 않겠습니까? 혹시 인간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를 초청하십니다. 조건이나 자격이 명시되지 않은 초청입니다. 여러분과 저, 그 누구도 제외 되지 않고 다 초청되었습니다. 과거도 묻지 않습니다. 지위도 묻지 않습니다. 빈부도 남녀노소도 따지지 않습니다. 학력도 직업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 좋은 소식, Good News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초청에는 여러분과 저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공짜니까 시시하게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Sound of Music 공연"에 초청을 했다면 그 초청하신 분이 200불을 지불 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초청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라는 값비싼 대가를 하나님께서 친히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겸손한 마음으로 초청에 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해야 하는 측면입니다.

 

초청의 두 번째 측면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부분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예수님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쉼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고로부터의 쉼은 강조점이 노동이나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조점은 쉼의 필요입니다. 우리 모두는 진정한 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는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진 상태는 현재 진행형의 계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의 표현이 그런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계속되는 수고와 무거운 짐의 상태를 멈춰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완전한 쉼을 누리기 전까지는 이런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진 상태는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쉼의 의미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약속의 의미는 노동의 중단이나 생의 어려움의 면제가 아니라 이 수고와 짐 진 것을 계속해서 힘차게 감당하도록 가능하게 하는 계속적 의미의 쉼과 재충전을 말합니다.

 

그래서29절에서 "마음이 쉼을 얻는다."말씀의 의미는 새로워진 열정과 활력을 가지고 그 수고와 짐 진 자의 인생 한 중앙으로 다시 담대히 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 보면 "I will give you rest."가 아니라 "I will refresh you. 또는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게 창조원리에 맞는 것입니다. 창세기 3 17절을 보면 죄를 짓고 타락해서 에덴에서 쫓겨 난 인생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바로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것입니다.( 3:17) 평생입니다.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의 삶의 과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본질을 인정하며 예수님께로 나올 때 마다 그 수고를 감당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안식 보다 안식을 주는 분입니다. 안식보다 안식을 주시는 분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쉼보다 쉼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마음과 눈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때 계속되는 회복과 재충전의 은혜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물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쉼을 얻는 비결

 

그렇다면 참된 쉼을 받아 누리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막연하게 예수님께 나온다고만 말하면 너무 실재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29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가 배우라. 그리하면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 첫째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방법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라."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멍에를 벗어야 쉴 수 있는 게 상식인데 마음에 쉼을 얻기 위해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시지 않아요? 모순 아닙니까?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서는 "멍에"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잠시 살펴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멍에는 정복자를 섬기는 힘겹고 수치스러운 속박의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 보면 "선지자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브갓나셀의 멍에는 이와 같이 꺾어버리리라 하셨느니라."라고 기록합니다.( 28:10-11) 예수님은 또 다른 경우를 말씀하셨습니다.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 23:4) 여기서 멍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했던 율법입니다. 첫 번째 예레미야시대에 겪던 멍에는 죄로 인한 결과의 멍에였습니다. 두 번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지운 짐은 결코 인간으로서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행위의 멍에였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수고하며 지고 있는 무거운 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지고 있는 가장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결코 해결 할 수 없는 멍에가 바로 죄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죄가 필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고통스러운 결과 아닙니까? 관계의 파괴, 미움, 판단, 욕심, 정죄, 분리, 질병, 가난, 마지막에는 죽음, 이런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멍에는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누릅니다.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기의 공로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선을 행하고 종교적 의식을 행하며 절대자를 만족시키려 하다 보니 신앙생활이 힘든 것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저런 많은 삶의 멍에를 어깨에 메고 허덕이는 것 아닙니까?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서의 구원은 마일리지 시스템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로를 쌓고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이것이 벗어 날 수 없는 수고요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죄와 죄의 결과에 짓눌려 수고하고 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인간 실존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것을 아시고 해결해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고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수고의 멍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멍에를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입니다. 그 멍에는 사랑과 은혜의 멍에입니다. 예전에 어떤 유행가 제목이 <사랑의 멍에>라는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의 멍에는 행복인 것입니다. 민족시인 한용운의<복종>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사랑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영적으로 감전된 사람은 그 사랑의 멍에 때문에 죄의 멍에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정죄의식과 죄책감의 멍에가 벗겨지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허무한 몸짓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려던 어리석은 행위를 의존하던 멍에가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의 멍에가 대신 우리의 삶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종 가운데 자유를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에 중독되어 그 사랑에 복종하며 자유를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왜 중독에 빠지는지 아십니까? 술 중독, 놀음 중독, 마약 중독, 인신매매에 속는 여성들...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인생의 수고와 짐을 지고 애를 죽어라고 애를 써 보지 않았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삶은 수고의 멍에에서 자유 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문제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사랑이 결핍되어서 그런 겁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 욕망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가족의 사랑이든, 우정이든, 명예든....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항아리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이 사랑의 항아리를 채워 줄 것 같았는데 실제는 그것들이 삶을 더욱 짓누르는 더 큰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더 큰 수고가 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 속에 진정한 사랑이 임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임하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씨의 딸 이민아목사가 <땅 끝의 아이들>이라는 자전적 책에서 자기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얼마나 목말라했는지를 고백합니다. 기대했던 사랑에서 거부당했다고 느껴질 때 그녀가 걸었던 방황과 아픔의 세월들이 있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멍에를 메고 살았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의 삶을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개인적으로 진리자체이신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고 멍에가 벗겨지며 자유를 얻게 되는 놀라운 간증을 합니다. 그 뒤로 그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의 멍에를 메고 이 사랑의 멍에를 몰라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소위 땅 끝의 아이들을 찾아 기쁘게 헌신하다 지금은 하나님 품에서 참된 쉼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 멍에를 메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쉼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멍에를 벗는 다는 것은 죄의 멍에를 벗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져야 할 멍에를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 멍에를 벗어버리고 새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죄의 멍에를 벗고 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정죄의 멍에가 아니라 용서의 멍에입니다. 율법의 멍에를 벗고 은혜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미움의 멍에가 아니라 사랑의 멍에입니다. 우리는 한 어깨에 두 멍에를 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한 가지만 져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은혜의 멍에요, 저와 여러분을 자유 하게 하는 용서의 멍에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멍에가 아니라 영생에 대한 소망의 멍에입니다. 등산을 하면서 배낭을 어깨에 져보면 몸에 착 달라붙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똑같은 무게지만 어깨가 아프지 않고 가볍게 느껴집니다. 똑같은 무게의 짐을 지고 가지만 편안하고 쉽습니다. 좋은 멍에를 져서 그런 겁니다. 여러분, 이제 주님이 주시는 멍에로 바꿔 메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짐이 쉽고 가벼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서 주신 멍에를 메고 가는 삶의 여정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멍에를 내려놓고 배우는 게 아닙니다.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입니다. 다 배운 다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아닙니다. 멍에를 메고 가면서 배우는 겁니다. 인생은 그런 것입니다. 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로부터 무엇을 배우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인생을 사는 법을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겁니다. 주님께서 주신 멍에를 메고 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멍에를 맡기신 분이 어떻게 지고 가야 하는지도 가장 잘 아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멍에를 메고 가는 인생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화내지 마라. 기다려라. 용서해라. 사랑해라. 기뻐해라. 온유해라. 겸손해라. 순종해라. 기도해라, 찬양해라. 진리는 쉽습니다. 단순합니다. 값이 쌉니다. 가짜가 복잡합니다. 어렵고 비쌉니다. 사탄이 주는 것은 복잡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은 단순하고 쉽습니다. 돈을 주고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냥 단순하게 순종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육체적으로 어린 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령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들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것입니다. 교활하지 않고 순진한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때가 묻지 않은 영혼을 말합니다. 마치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고전 1:27-29)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전적 의존적인 아이처럼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를 믿고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모든 행동의 중심축이 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주님 말씀에 자기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고 주님에게 바르게 배운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때 그가 진 멍에는 가벼운 멍에인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사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배울 때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배우다 보면 그런 사람처럼 됩니다. 예수님께 배우다 보면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겸손하면 가벼워지고 교만하면 무거워지는 게 인생입니다. 소유하려면 공허해지지만 나누려면 충만해 집니다. 지배하려면 공격을 받지만 섬기려면 존경을 받습니다. 온유하면 평안이 오지만 성마르면 관계의 파괴가 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처럼 살면 참된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나가는 말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초청을 받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제 선택은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제가Peter Jensen학장님의 초청을 받고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처럼 무엇인가 불안하게 생각하시면서 주님의 초청에 선뜻 응답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을 이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면 저와는 비교도 안 되도록 엄청난 수지를 보게 된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멍에를 예수님께 맡기고 대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면 우리 마음이 쉼을 얻게 됩니다.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내 인생의 멍에를 메고 스스로 고달픈 길을 가느냐 아니면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내려놓지 못하는 세상의 멍에는 참으로 힘든 수고요 인생을 짓누르는 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예수님의 성품을 쫓는 안식의 길입니다. 참된 쉼을 누리고 싶으십니까? 바로 이 순간 주님의 초청에 아멘!”이라고 대답하십시오. 아멘!” 주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짐을 담당하시고 쉼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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