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임 가운데 누리는 기쁨

매임 가운데 누리는 기쁨(Joy in Chain)

(빌립보서 1:12-21)

201508 30

들어가는 말

 

여러 해 전에 한국 기독교계에 많은 성도들의 심금을 울렸던 한 자매의 이야기가 자전적 일기체의 형식으로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책의 주인공의 이름은 이지선이고 그 책의 이름은 <지선아, 사랑해>입니다. 이지선 자매는1978년생인데 이화여대 유아교육학과 4학년 때인 2000 7 30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한 음주 운전자가 낸 6중 추돌 사고의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4-5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중상환자로 의사들도 치료를 포기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7개월간의 입원과 11차례의 수술을 받으며 3년여에 걸친 끔찍스럽고 고통스러운 치료의 기간을 거친 후 미국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며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도와주는 치료사가 되어 전문가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 자매가 극심한 고통과 상처를 가지고 수술대에 오를 때 마다 꿈꾸어 왔던 한 가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짠’하고 주님께서 베풀어 주실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지선 자매는 책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여전히 ‘짠’하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하나님 성격 이상하시다고 생각하며, 만나면 꼭 따져 볼 거라고 울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정말 내게 기적은 없는가? 그 누구도 살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렇게 너무 잘 살고 있습니다. 기적처럼 눈을 지켜 주셨고, 캄캄한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제 얼굴에 피부를 덮어 주기도 했습니다. 의사들 조차도 이 깊은 상처 위에 피부가 나올 리가 없다며 소망 없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 위에 새살은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큰 기적은 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자신조차도 이런 제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평안함이 늘 있습니다. 소망 가운데, 감사하는 가운데 임했던 ‘평안’..... 몸의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것..... 전쟁터 속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거기서 오는 영혼의 평안함. 예전 얼굴을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여덟 개의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평안’때문이었습니다..... 정말 힘든 가운데도, 어제는 숟가락을 혼자 잡을 수 있어서, 오늘은 또 문고리를 잡고 열수 있어서 감사하며 기뻐 할 수 있는 마음..... 그래서 매일 매일이 너무 행복한 이 마음이 바로 제게 일어난 가장 큰 기적입니다. 제 힘으로나 제 의지로는 결코 일어 날 수 없는 일이기에.... 저는 감히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지선아 사랑해, pp. 254-258)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마음 한 구석에 ‘꼭 그런 것이 믿음의 바른 모습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때론 간절하게 사모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가장 곤고하고 힘든 순간, 정말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의 순간, 바로 그때 단 한번만이라도 정말 ‘짠’하고 ‘기적’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극적 기적을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잔뜩 기대를 품고 특별기도회에 참여해 보기도 합니다. 금식도 합니다. 일천 번제 헌금도 드립니다. 철야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질 것을 기대하며 주문을 외우듯 말씀을 반복해서 암송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없으십니까? 기적을 기대해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기대했던 기적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과연 우리가 경험하는 기적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바울 사도의 모습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이지선씨가 고백한 기적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서 진실한 감사가 나오는 것,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즐거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기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은 매임 가운데 누리는 바울 사도의 기쁨을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으로 저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빌립보서 1:1-11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멈출 수 없는 감사와 사랑의 고백이 기록됩니다. 오늘 본문은 환경을 초월해 누리는 기쁨의 비결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경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이나 상황, 또는 사건과 다양한 경우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을 경험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환경들은 시간을 따라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주, 그리고 혹은 매우 극단적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들은 많은 경우 매우 개인적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환경을 다른 사람과 같은 경우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환경을 진실로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평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세계는 불안과 두려움의 와중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만사가 잘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전망이 밝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고난과 암울한 터널 가운데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복해 보이지만 숨겨진 불행이 있고 건강해 보이지만 깊은 병 때문에 남모르게 신음할 수가 있습니다.

 

환경이 주는 영향력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 여러분들의 현재의 환경을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은 참으로 다양한 것들로 둘러 싸여 있지 않습니까? 가족, 직업, 교회, 친구, 물질, 건강, 학업, 관계.....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여러분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까?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들의 매일매일의 생활에 어떤 힘을 발휘합니까? 이 환경들이 우리들의 삶을 깊이 좌우합니다.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바울 사도도 결코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이 빌립보서를 쓸 때만 해도 그에게는 그만이 경험했던 남들은 이해 못할 고유한 환경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고한 죄명으로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것도 주의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간 것입니다. 바울은 아마 로마인들의 건물에 투옥되어있었거나( 23:35) 또는 가택에 연금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8:16) 바울은 지키는 군사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28:16) 로마의 감옥은 오늘날처럼  생긴 구치소라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재판이나 이미 판정된 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는 장소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호소를 하였으므로 그의 재판을 기다리면서 사슬에 매인 부자유의 몸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매임의 기간은 자그마치 2년이라는 긴 세월이었습니다.( 28:30)

 

로마관례에 의하면 이런 죄수들은 그들을 지키던 군인과 쇠사슬에 한 손씩 함께 묶여 있었습니다. 밤낮없이 사생활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지낸 것입니다. 화장실도 같이 가는 거예요. 자기가 가고 싶을 때는 그래도 괜찮은데 이거 간수가 가고 싶을 때는 또 같이 따라 가야 하는 거예요. 게다가 작은 것은 그래도 참을 만한 데 큰일을 볼 때는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냄새도 그렇고 처리하는 방법도 그렇고... 상상에 맡겨드립니다. 파수꾼들은 매 여섯 시간마다 교체가 되었지만 바울 사도는 언제나 사슬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자유의 몸으로도2년을 한 곳에서 지낸다는 것은 지루한 일입니다. 하물며 재판을 기다리며 미결수로 사슬에 매인 채 누군가와 항상 붙어서 그토록 오랜 기간을 지낸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전부 바울에게 친절했겠습니까? 목욕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끔찍한 환경 가운데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환경 가운데 처해 있다면 어떻게 지냈을 것 같습니까? 무엇을 가장 기대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 ‘짠’하는 한번쯤의 기적이 아니었을까요? 무죄가 확정되고 사슬이 풀어지고 석방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사도행전16장에서 바울이 경험했던 것처럼 감옥이 무너지고 로마 관리가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바울을 석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그런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이 빌립보서를 쓸 때도 여전히 감옥에 있었고 사슬에 매인 채였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기대하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환경

 

이런 환경 가운데 바울 사도의 태도 중 특별한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압도되거나 그 환경이 그를 지배하도록 놓아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처한 환경을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영적 목표를 이루는 기회로 선용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최고의 것들을 뽑아내는 거룩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불행한 환경 가운데 절망하고 원망하며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의 수렁 가운데 기쁨의 이유들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지선 자매가 고통과 절망가운데에도 타버린 몸이 갑자기 옛 모습으로 소생해서 기적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이 마음에 가득 차서 그것을 감히 ‘기적’이라고 부른다고 말한 것처럼 바울 사도도 그를 묶고 있는 쇠사슬이 풀려났기 때문에 기적이 아니라 절망의 감옥에서 기쁨의 이유들이 너무 많은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쓰인 편지라서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감옥에서 쓰여진 이 빌립보서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는 바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1장은 우리가 살펴 보는 대로 고난 가운데 기쁨을 말합니다.(Joy in Suffering) 2장은 섬김 가운데 기쁨을 말합니다.(Joy in Serving) 3장은 믿음 가운데 기쁨을 말합니다.(Joy in Believing) 4장은 나눔 가운데 기쁨을 말합니다.(Joy in Giving) 오늘 본문에서 기록되고 있는 주제도 감옥이라는 바울의 환경 가운데 흘러나오는 기쁨에 대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

 

먼저 바울 사도는 자기의 감옥 생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1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서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바울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의 재판이 승리로 끝이 났습니까? 모든 혐의가 벗겨졌습니까? 감옥 문이 열렸습니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사슬에 매인 몸이고 그의 환경은 한 가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변하지 않는 열악한 환경 가운데 오히려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선언합니다. 이게 바로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 같은 기쁨의 근거가 무엇이지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신세가 바뀌어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열악한 환경을 통해서도 복음이 증진되고 예수님이 증거 됨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저와 여러분 같았으면 어땠을까요? 정직하게 고백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일을 열심히 했는데도 돌아 온 것은 감옥 생활이라고 원망이나 불평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반대였습니다. 그 묶인 가운데에도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바울 사도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리한 환경을 긍정적으로 놀라운 일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1:12-13) 자기를 감시하는 시위대와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삶으로 증거한 것입니다. 사실 감옥은 사람을 낙담시키는 장소입니다. 의기가 충천하고 용기가 백배한 사람도 감옥 문이 육중하게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만 기가 꺾이게 됩니다. 그리고 웬만한 일들은 거의 다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불우한 자기의 환경을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로 적극적 활용을 합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처한 환경이 어떠하냐가 아니라 그 환경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기회로 삼습니다.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기회로 보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환경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며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죄를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그 감옥이라는 매임의 환경 가운데에서도 복음이 퍼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바울은 자기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내면세계와 삶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환경을 그가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 열악한 환경도 그에게 기쁨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감옥 밖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1:14) 사실 바울이 투옥되는 것을 바라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주춤거리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인 것을 은근히 숨기고 싶은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태도를 바라보며 그들은 오히려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감옥을 강단으로 사용하는 바울의 모습 속에서 그들은 담대함을 얻은 것입니다. 환경을 초월해서 사명에 초점을 맞추고 매일 매일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바울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나태함과 소극적 태도에 자극을 받고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묶였지만 복음은 묶이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은 가둘 수 있지만 성령의 역사는 가둘 수 없습니다. 복음은 감옥 안과 밖에서 동시에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연약을 통해서 조차 일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갇히고 육신은 연금되어도 복음은 결코 갇히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구원의 능력은 결박 당하지 않습니다.

 

두 진영의 전도단

 

본문을 보면 두 진영의 서로 다른 태도를 갖고 있는 사역 그룹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17절에 나타납니다. 한 그룹은 시기와 분쟁 가운데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의 그런 태도가 감옥에 있는 바울을 더 괴롭게 하기를 바라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건전하지 못한 경쟁심을 가지고 사역에 임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없어도 자신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바울을 능가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증명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또 다른 한 무리는 착한 뜻으로 바울 사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바울 사도의 권위도 인정하고 바울 사도의 사역도 인정하면서 동역자적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다른 태도를 가진 그룹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다른 동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은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기를 향한 개인적인 태도를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복음의 전파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이런 영적 승리에 바울의 기쁨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바울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복음을 전하기도 하지만 바울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실상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태도를 취한다는 것 옳고 바람직하지만 자기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에게서 한 수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영광이지 나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운 부흥과 성장이 중요하지 나하고 의견이 같으냐 아니냐가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나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도 살아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면(19-21)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이어지는 19절에서21절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중보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가 석방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석방되어도 감사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이 감옥에서 살아 나갈지 아니면 죽게 될지 예측할 수도 없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 바울 사도에게는 앞으로 세 가지 정도의 결과 중 하나가 주어질 것입니다. 첫째는 무죄가 선고되고 석방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유죄가 확정되고 처형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유죄가 확정되고 사형대신 유배를 당하거나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런 결과들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지 그 상황 모두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상황을 통해 어떻게 주님께서 영광을 거두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만 그가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전개되는 상황 가운데 혹 용기와 담대함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0-21) 살든 죽든 그리스도의 존귀를 위해 담대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죽고 사는 것이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삶의 원칙은 단순합니다. 그래서 강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 자체가 유익이 되는 삶,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된 삶입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된 삶, 초점이 분명하고 능력 있는 삶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이 바울의 자기 인식입니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를 빼고 나면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바울과 같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상황이나 환경을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과 환경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선택의 중심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전파됨에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삶을 결정하는 감옥이라는 환경도 그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극단의 환경 가운데에도 거룩한 역방향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어떤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늘 어떤 환경 가운데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누가 여러분들을 시기하고 분쟁을 걸어오면서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묶고 있는 현실의 사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가두고 있는 감옥은 무엇입니까? 시각을 새롭게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추면 영원히 그 사슬에서 못 풀려납니다. 스스로의 환경에 초점을 맞추면 불평과 불만 외에는 다른 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 개인의 안녕과 행복에만 초점을 맞추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무능력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과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 보십시오. 태도를 바꾸면 삶이 바뀝니다. 생각과 태도는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의 기적을 창조하기도 하고 절망의 수렁을 만들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환경이 바울보다 더 열악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무엇인가 바울보다 한 가지 이상은 더 나은 환경과 형편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보다 더 보람 있고 더 가치 있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또한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말하는 것이 결코 우리에게 쉽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행동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도의 차이입니다. 같은 환경인데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사느냐가 삶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가 삶의 초점이고 목표이고 기쁨의 근거입니다. 감옥에서도 예수님이 증거 되면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비방과 인신공격을 받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기뻐하는 것입니다. 추구하는 기쁨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환경에 임하는 태도도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삶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선포되는 것을 인해 감사하는 바울 사도의 모습을 보며 저 개인적으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안전하고 평안한 가운데에도 감사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바울은 가장 열악한 환경가운데에도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생명이 주님께 속한 것을 알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모든 상황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다시 여러분들의 상황으로 돌아가 여러분들이 처한 현재의 삶의 현실과 환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혹 좌절하고 계십니까? 혹 낙망하고 계십니까? 혹 비관하고 계십니까? 어려운 결정 앞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못하고 계십니까? 바울 사도에게 배웁시다. 초점을 여러분들 자신에게서 그리스도께로 옮기십시오. 여러분들의 눈길을 힘들고 불우한 환경에서 주님의 십자가로 옮기십시오. 환경과 처지를 바라보며 형성된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내적 태도를 바꾸십시오. 불안해하고 불평하는 태도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한 차원 높은 모습으로 승화시키십시오. 그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지선 자매는 타버린 육신의 아픔과 비극을 극복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내적 평안의 기적을 체험하는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불편하고 일그러진 몸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미래의 생사를 알길 없는 감옥에서도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 분이 전파되고 존귀하게 됨을 인하여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들과 제가 이분들보다 더 불우하지는 않습니다. 더 괴롭지도 않습니다. 더 아프지도 더 부자유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며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각의 차이입니다. 태도의 차이입니다. 초점의 차이입니다. 믿음의 차이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마음을 십자가의 예수님께 고정을 시키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적을 어떤 환경이나 형편 가운데에도 주님의 영광과 존귀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환경에서 평안과 기쁨의 기적을 찾지 마시고 주님의 목적에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내어 줄 때 예수님이 주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사모하십시오. 그 때 저와 여러분은 이지선 자매처럼, 또는 바울 사도처럼 모든 형편과 처지를 뛰어 넘어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멋진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매임 가운데 누리는 기쁨, 타버리고 부서진 육신 가운데 누리는 평안, 환경을 초월해 주님과 동행하는 기적의 삶입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이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기적을 체험하는 승리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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