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자가 됩시다.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

(요한복음 4:23-24)

들어가는 말

주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김집사님이 교회에 가기 위해 준비합니다. 속으로 은근히 생각합니다. ‘주일 날 교회 안 가고 신앙생활 할 수는 없나?’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작은아이가 칭얼댑니다. 아내는 보채는 아이를 달래느라고 분주합니다. ‘애가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 감긴가?’ ‘그래? 심한 것 같아?’ ‘아니 그냥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 ‘그냥 쉬어버릴까?’ 혼자 문득 생각합니다. 김집사님은 갑자기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 때 갑자기 목사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예배에 빠지면 목사님께도 괜히 미안 할 것 같습니다. 마음도 편안할 것 같지 않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교회에 안 가면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삭감하실 것 같은 불안한 마음도 생깁니다. ‘에라, 가서 대 예배만 드리고 오자.’

        

이렇게 저렇게 하다 교회에 도착해 보니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늦게 온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싫기도 해서 조용히 뒤쪽 빈자리를 찾아 앉습니다. 이제 막 대표 기도가 시작되려는 중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오늘 오후에 만나기로 한 약속이 갑자기 마음에 떠오릅니다. 골프 생각도 나고 낚시 생각도 납니다. 어제 마치지 못한 일도 생각납니다.

 

예배는 순서에 따라 지난주와 별로 다름없이 진행이 됩니다. 성가대의 찬양과 말씀 봉독이 있은 후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됩니다. 조금 기대를 가지고 들어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좋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아이 우는소리가 들립니다. ‘우리 갑돌이 아냐?’ 귀를 쫑긋해 보지만 다행이 갑돌이는 아닙니다. 그 때부터 설교에 집중이 안 됩니다. 주보를 보며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 지를 살펴봅니다.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갑자기 예배가 지루해 집니다. 김집사님은 다음 주 할 일을 머리속에 정리해 보기로 합니다. 그 때 목사님이 무엇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제 목사님을 안 쳐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흐름을 놓쳤습니다. 지루하지만 시간은 흘러 축도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예배가 끝난 것입니다. 그래도 와서 이렇게 보내는 게 마음이 평안하다고 생각하면서 점심을 먹기 위해 예배당을 빠져나갑니다. 제일 나중에 왔으니까 제일 먼저 나갑니다.

 

혹시 당신의 모습?!

 

혹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니십니까? ‘나도 그런데.’ 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제가 이 김집사님을 생각하며 한 가지 확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은 예배에 참석은 했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존귀하신 보좌 앞에 엎드려 찬양과 경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인도하심과 만져 주심을 경험하는 놀라움과 흥분과 외경심으로 넘치는 살아있는 감격의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영혼 속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슬픔과 불안이 변하여 행복과 평안으로 변화를 체험한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김집사님에게는 예배 시간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판에 박힌 듯 예배 속에 앉아 있었고 거의 모든 순서에 참여했지만 박제된 새처럼 그렇게 무감각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죽은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예배로 엎드릴 때 하나님은 무표정한 마네킹처럼 생명력 없고 무감각하게 침묵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은 살아 계시고 우리의 예배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받으십니다.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고 우리의 표정까지도 받으십니다. 우리의 예배 중에 임하셔서 찬양을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지십니다. 우리의 근심을 가져가시고 슬픔과 고통을 담당하십니다. 우리의 깨어진 삶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를 지적도 하시고 책망도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중에 언제고 함께 계십니다. 말씀의 불 수레를 타고 성령님은 교회가운데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감동으로 임하십니다.

 

아벨이 자기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습니다.(창 4:4) 예배를 받으신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상심과 슬픔에 잠겨 있던 아벨에게 소망의 불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타는 횃불처럼 나타나셔서 제물 사이로 지나셨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언약을 주셨습니다(창 15:17-18). 아브라함의 미래를 그분이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애굽 강가에서부터 그 큰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축복을 다시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예배 가운데 만납니다. 야곱이 외동딸 디나의 강간사건으로 깨어진 인생의 무거운 피로와 난파지경에 이른 가족을 이끌고 벧엘로 올라가 예배의 제단을 쌓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주십니다. 그리고 복을 주십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창 10-12) 예배 가운데 만나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광야 교회로 모여 예배드릴 때에 그 진중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 중에 나팔 소리와 함께 임하십니다.(출 19) 예배를 받으시는 겁니다. 예배 회복을 통해 축복이 회복되는 인생의 모습들을 성경은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배 중에 계십니다. 오늘 바로 이 순간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곳마다 하나님은 함께 계시고 그들의 예배와 찬송을 받으십니다. 

 

나의 고민, 예배

요즈음 저는 예배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눈과 귀만 즐겁게 하는 예배는 안 된다. 벗어나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맞추어진 사람 중심의 예배는 안 된다. 벗어나야 한다. 예배는 그 예배를 받으시는 그 분,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주인공 어린 양,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인위적이고 형식에 치우친 예배보다 성령님께 온전히 맡겨진 성령 의존적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은연중 만연되어 있는 예배 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영적 불감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아무런 영적 사건이 심령 속에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도 가슴아파하지 않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습관적인 예배의 태도와 자세를 벗어 던져야 합니다. 이게 선행되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어쩌면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아무나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주 만물 중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원숭이가 아무리 높은 지능을 소유했어도 창조주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분이 경배와 찬양의 대상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주의 형상과 모양을 공유한 인간만이 예배의 무릎을 꿇습니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기전의 자연인은 그 창조의 하나님과 실제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제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배의 진정한 축복을 경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 매우 친숙한 내용입니다.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서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축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이 그 축복을 주신 분의 의도대로 바르게 사용되지 못할 때에 그 축복은 타락의 도구가 될 위험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질이 그렇습니다. 그 물질이 없었다면 타락하지 않았을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체력과 외모가 타락의 길을 걷게 하기도 합니다. 권력과 좋은 지위가 남용되기도 합니다. 좋은 머리가 더 나쁜 짓을 하게 합니다. 주어진 축복이 잘못 사용되어 질 때 그 축복은 오히려 저주를 불러오고 심판을 자초하는 통로가 되고 맙니다.

 

아마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끄는 외모를 축복으로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을 다섯씩이나 바꾸며 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지금은 여섯 번째 바꾼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대개 신앙이 좋은 여자를 고른다고 말하거나 마음이 착하고 고운 여자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외모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많은 통계 자료가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는 여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여인은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처럼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분위기의 사회에서 남편을 여섯 번째까지 바꾼 여인의 삶을 상상해 보십시오. 요즈음도 이혼 한번하고 나면 인생이 거의 파산처럼 되어 그 충격과 여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현 주소입니다. 하물며 예수님 시대에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던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따지던 시대에 오죽 했겠습니까? 이 여인의 어려움은 이 여인이 남들이 다 물을 긷는 서늘한 아침이나 저녁 시간을 피해 아무도 없는 한 낮의 땡볕아래 우물가로 나왔던 그 모습 속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아무도 없는 시간을 맞추어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이 여인은 예기치 않은 한 사나이와 마주치게 됩니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게 그 사나이는 바로 우물곁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조용히 물을 길어 말없이 마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 사나이가 이 여인에게 말을 건 것입니다.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인이 이런 저런 말하지 않고 조용히 물이나 떠 주고 자기 동네로 돌아갔으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당시의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상종하지 않던 관습을 생각하며 묻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의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대화의 내용은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영적인 문제로 접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그 영적인 문제가 여인의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인 추잡한 사생활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예배의 출발점

여러분, 자기 인생의 모습이 예수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참된 예배자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자기가 예배의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실체가 숨김없이 드러나기 전까지 주님과 여인 사이의 대화는 사실상 공전됩니다. 주님은 영적 생수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여인은 세상 우물에서 퍼 올릴 수 있는 H2O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생하는 생수를 말씀하시는 데 여인은 “주여 이런 물을 네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물질적 물을 말합니다.(요 4:15) 서로 초점이 다른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그 여인의 심령과 삶의 깊은 곳을 수술하기 위해 “네 남편을 불러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H2O 물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수이신 예수님 자신이 필요한 것을 인식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신을 직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로 엎드리고 그 분의 손이 그 삶을 어루만지지 않으면 소망이 없음을 정직하게 시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 앞에 완전히 노출된다는 것은 진실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과 얘기가 통합니다. 예배가 진실해지고 간절해집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피상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가장 깊이 있는 영적 대화로 전진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나를 알아주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가운데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정서적 억압과 감정적 억눌림에서 자유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죄와 죄책감에서 해방의 탈출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더럽고 냄새나는 생활을 벗어 날 수 있다는 소망의 등불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살면서 경험했던 내면세계의 상처들이 치유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왜곡된 대인 관계가 교정되면서 정직하고 힘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 속마음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가운데 그렇게 발전하고 있음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받아 주지 못할 것 같았던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지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맑게 드러내지 않고는 주님을 깊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죄와 은폐가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화제를 예배라는 종교적인 문제로 돌렸지만 예수님은 그 순간을 아주 지혜롭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에배가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인 갈등과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닌 것처럼 태연히 살아가지만 이 문제는 언젠가 겉으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인생의 주인이 결코 자신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반듯이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을 만나는 순간 인간은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때 그는 무거운 인생의 짐을 그 주인에게 맡기고 안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달프고 수치스러운 인생을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참하고 추악한 자기의 삶을 구원해 줄 구원자에 대한 열망이 내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엉망이 되어버린 자기 삶을 그 깊은 웅덩이에서 건져줄 그 누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섬기며 인생을 맡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분 앞에 무릎 꿇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vv.20)

바른 예배관

그러나 여인은 지금 예배에 관심이 있고 영적인 갈망이 있지만 상당히 왜곡된 예배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배를 단순히 모이는 장소나 종교 의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조상들이 말하는 사마리아 땅에 있는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냐, 아니면 유대인들이 말하는 대로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가 옳으냐하고 묻습니다. 어느 전통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어디에서 모이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전통을 따르느냐가 마치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물론 장소가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좋으면 예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의 환경적 요소일 뿐이지 결코 핵심은 아닙니다. 좋은 예배 전통은 장소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장소나 예배의 전통에 묶일 필요 없이 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법이 무엇인가를 잘 배워야 합니다. 이런 예배를 일컬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합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가르치시는 예배학입니다. 어떤 예배의 형태도 주님의 이 예배학을 넘어 설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23-24절입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 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 4:23-24) 이런 의미에서 여인은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깊은 영적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형식과 의식 수준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영혼이 열리는 체험도 없었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감격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은 먼 곳에 계신 산신령 같은 분이고 자기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당연히 예배를 통한 치유도 고침도 삶의 회복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에 몸은 와 있어도 거짓 자아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종교적인 의무 수행식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외형적 예배는 있으나 영성은 없습니다. 찬양은 있으나 감동이 없습니다. 설교는 있으나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성도는 있으나 성도의 인격은 없습니다. 교회 건물은 있으나 진정한 교회는 없습니다. 성경 공부는 있으나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은사는 있으나 사랑은 없습니다. 모양은 있으나 내용은 없습니다. 우리 현대 교인들이 극복해야 하는 예배의 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주님의 말씀을 심령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영과 진리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심각한 예배의 위기 앞에서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닙니다. 뼈를 깎는 마음으로 자신을 회개하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향해 헌신해야 합니다. 예배에 임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먼저 누가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가 이런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것을 그 백성에게 고하실 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러자 이 예수님을 만난 여인의 인생이 변화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은 문제 인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 멋대로 살아가도 된다고 생각할 때는 예배가 안 됩니다. 나는 내 인생 나도 책임질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달할 때 그 때 드디어 그 사람은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시시각각 느끼는 그 절망의 인생을 체험할 때. 그 포기의 순간에. 그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을 만날 때 예배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렇게 겸손하게 출발하는 무릎 여행인 것입니다.

예배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영과 진리로 드려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보혈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로 서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은혜를 사모하게 하십니다. 우리 중 혹 이 보혈의 공로를 덧입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성령께서 그런 분의 심령을 주님의 보혈로 씻으시고 주님의 축복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들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보좌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구원의 감격과 더불어 참된 예배자의 반열에 서시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예배의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찬양과 예배에는 반듯이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21, 23절에 보면 아버지께 예배한다고 말합니다. 예배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예배에 임하는 자세를 결정합니다. 예배의 대상 발견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입니다. 예배 대상을 발견했다는 것은 인생의 주인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전능자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내 전 존재를 엎드려 맡길 수 있는 분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배의 자세가 바로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 시간이 설교를 듣는 시간으로 생각하거나 기도를 드리는 시간, 또는 찬양을 드리는 시간으로 부분적인 이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설교를 감상하는 듯한 자세로 듣는 것은 바른 예배를 방해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때 예배가 바르게 드려 질 수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마음속에 갖고 있을 때 누구 미워서 함께 예배 못 드리겠다는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지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어떤 것입니까? 본문 24절을 보면 명확해 집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영으로 드리는 예배란 형상이 없는 영적 예배를 말합니다. 이게 우상 숭배자들과 성도들의 차이입니다. 아무 것이라도 외형적인 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형상화하면 이미 그 예배는 신령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장식도 필요하고 외형적 치장도 때와 경우에 맞게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수정해야 합니다. 조용히 영혼의 눈을 열어 구원의 주님만을 묵상하는 예배, 우리의 온 마음으로 그분을 받아 드리고 내 마음의 한 중앙에 모시는 예배, 이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내 마음의 죄악이 벗겨지고 십자가의 주님과 내가 연결되는 성령의 감동이 온 영혼을 채우는 예배, 이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내 삶의 전 영역을 통치하시도록 나를 맡기는 시간 그게 바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시간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란 준비되어진 예배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영이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쫓기듯이, 또는 때우듯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런 태도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기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모든 예배 수종자들은 가능한 한 철저하게 준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기도로 준비합니다. 마음이 정결하도록 애를 쓰고 영혼이 손상가지 않도록 일주일 내내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예배자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은혜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분이 무슨 말을 하실 지를 기대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그 분 앞에 내 모습들을 점검하며 준비된 모습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조금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는 데도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에 김대중 대통령과 식사할 기회를 두 번 갖았었습니다. 물론 일대일은 아니었고 단체로 한 것입니다. 한 번은 그 분이 대통령 되시기 직전이었고, 또 한 번은 대통령이 된 후 한,호 정상 회담 차 시드니를 잠깐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 때를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 참석하시는 모든 분들이 참으로 정성을 다해 철저하게 그 만남을 준비했던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주최측도 그렇고 참석하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30분전에 나와서 자리에 앉아 대통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무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준비된 자세로 기다렸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표현은 안하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초청 된 사람들은 모두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그 자리에 초대된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신 우리 성 삼위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왕 중 왕이 아니십니까? 우리가 예배에 나온 다는 것은 전능왕의 초대를 받은 사건이 아닙니까? 선택된 백성을 위한 선택된 자리가 아닙니까? 준비 없이 나올 수 있습니까? 늦게 올 수 있습니까? 마음에 기대를 갖지 않고 그 자리에 나아가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영적 예배는 미리 준비되어질 때 가능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예배가 끝나는 순간 다음 예배를 위해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삶을 예배처럼, 다시 말하면 성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소한 토요일은 주일을 잘 보내도록 준비하며 생활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드리는 주일 예배가 달라질 것입니다. 늦지 않도록 시간을 잘 조절하십시오. 예물을 정성껏 미리 준비하십시오. 복장도 될 수 있는 대로 단정하고 깨끗하게 하십시오. 마음을 잘 준비하십시오. 예배로 향하는 영혼이 다치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십시오. 그 때 우리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른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가는 말

이제 우리는 감격 있는 예배를 위해 헌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안디옥 공동체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는 교회>공동체의 초석을 놓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주의 일을 행하는 교회> 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헌신할 때입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아브라함처럼, 야곱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내며 축복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예배에서 실패하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인생의 승부를 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14 Cormiston Ave, Concord NSW 2137 | Sydney | Australia TEL : 02 9743-1444
Copyright ⓒ 시드니안디옥장로교회 All rights reseved. Provided By 교회사랑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