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손이 함께 하는 사람 (For the Lord’s hand was with him.)
(누가 복음 1:57-66; Luke 1:57-66)
주일 설교 (12월 5일)
들어가는 말
세상에서 실행되는 모든 하나님의 일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경이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절대로 그럴듯하지 않은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100세나 되도록 자녀가 없었던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이나 살인을 해서 도망자 신분이 되었던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치기 소년에 불과했던 목동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리고성 함락에 지대한 공을 세운 기생 라합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난 몇 주간 묵상했던 말씀 속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산골 처녀 마리아와 늙어서 생리적으로 애기를
낳을 수 없었던 엘리사벳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에서 낮고 무명한 자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는 데 먼저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하신 사람들의 삶 속에 그 말씀을 이루고 성취하십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의 이유는 단순합니다. 말씀하신 분이 전능하신 주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결과
믿음과 순종이 결과를 가져오듯이 불신과 불순종도 결과가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열매는 달콤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불신과 불순종의 열매는 때때로 고통과 불편을 자초합니다. 본문의 제사장 스가랴의 경우가 그런 한 예를 보여 줍니다. 엘리사벳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잉테를
했고 이제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고 이루신 것입니다.
이 행복한 순간에 사가랴는 여전히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몸짓으로 소통해야 하는 불편을 경험합니다. 아들의 출생이라는 경사를 목격한 주변 사람 모두가 기뻐하며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하는데 정작 아버지인 사가랴는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불신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살펴 본대로 성전에서 분향하며 섬기던 사가랴에게 천사가 기도의
응답이 주어진 것을 알려 줍니다. “사가랴야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이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라” 누가 복음 1장 14절과 15절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들은 사가랴가 무어라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할렐루야!” 하면서 기뻐해야 하고 “아멘!” 해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반응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눅 1:18)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천사 가브리엘이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되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눅 1:19-20)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는데 믿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은 사가랴에게 불신의 결과가 주어집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벙어리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과 불편입니다. 믿었으면 겪지 않아도 되는 고난입니다. 지금 이 장면은 그토록 기도하며 고대했던 아들이 태어난 순간인데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스스로 초청한 불신의 열매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을 경험하게 할까요? 하나님께서 폭군이시라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믿음을 성장시키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불신의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달콤한 축복과 행복의 열매를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훈육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해 때때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 12:11) 연단과 훈육을 통해 믿음의 단 열매를 추수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10개월의 잉태 기간뿐 아니라 아들이 태어난 순간에도 기쁨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사가랴의 처량하고 불행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겨우 몸짓으로 소통해서 아기 이름을 무엇이라 지을지를 묻고 서판에 써서 자기 의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62절과 63절입니다.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했겠습니까? 불신의 열매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쓸데없는 불편을 경험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
들이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행복한 열매들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
이렇게 약속의 사내아이가 태어나자 모두가 기뻐하며 즐거움을 함께 나눕니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7-58절) 오늘 말씀의 첫번째 장면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지체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장면입니다. 말씀의 성취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축하하는 것입니다. 혼자 잘 믿고 혼자 믿음을 지켜 내려고 하면 신앙생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각자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태도는 중요하지만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 생활의 필수 요소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함께 하는 공동체의 축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 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전 4:9-10)
시편 기자는 또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에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 133:1-3)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예배하며 받아 누리는 축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여러분, 공동체의 일원으로 잘 지내고 계십니까? 신앙공동체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사랑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함께 경험하며 함께 누리는 행복 공동체입니다. 물론 신앙의 출발은 개인에게 행하시는 은혜의 경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과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사람들은 또 다른 믿음의 사람과 함께 모일 때 영적
시너지 효과가 나타납니다.
서로의 영성이 살아나고 활성화
됩니다. 공동체속에서 관계의 역동을 겪으면서 믿음은 성장하고 인격은
성숙해집니다.
이런 과정에서 슬픔과 즐거움을 함께 하게 됩니다. 실상 어려운 일과 슬픔은 참여해서 함께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기쁜 일에는 함께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성공이나 행복을 나의 성취와 행복처럼 축하하고
축복하지 못하는 시기심과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불행에는 동참하며 동정하기는 쉬워도 형제, 자매의 축복에는 마음의 문이 닫히는 게 사람의 좁은 심성입니다.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말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다른 사람의 즐거움과 기쁨에 같은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혼한지 정말 오래 되고 나이가 늙어서 자녀가
없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얻게 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출산 소식을 접하고 친척과 이웃이 모여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늙도록 자녀가 없어서 슬픔과 쓸쓸함 속에서 지내던 노부부에게 자녀가
주어진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공동체의 지체들의 슬픔과 즐거움에 진심으로
동참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때 믿음 공동체는 소망의 공동체로 변화되고 공동체를 통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전도와 회심의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오늘 말씀의 두번째 장면은 태어난 아기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러 온
장면입니다. 59절에서 64절입니다. 이 장면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기를 위해 행한 할례보다 아기의 이름을
짖는 과정입니다. 소위 작명입니다. 세상에 이름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 대상의 이름을 모를 뿐입니다. 모든 꽃은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나무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름은 그 존재의 특성을 반영합니다. 모든 이름에는 뜻이 있습니다. 옛 시대 여자분들의 이름 중에 막순이나 끝순이는 딸 좀 그만 낳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제 이름은 기옥입니다. “터 기”자에 “구슬 옥”자를 씁니다. 보배가 묻힌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좋은 뜻의 이름인데 어렸을 적에는 무척 싫어했습니다. 여자 이름이라고 친구들이 놀렸고 제 생각에도 여자 이름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너무 싫어하니까 하루는 어머님이 작명소에 가셔서
새로운 이름을 지어 오셨는데 그게 기호입니다. “터 기” 자에 “넓을 호” 자입니다. 정기호, 조금 남자 같습니다. 하지만 호적에는 바꾸지 않아서 그냥 기옥으로 굳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기옥이라는 이름이 싫은 게 아니라 오히려 좋습니다.
오늘 본문도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놓고 무엇으로 해야 할까 고민하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사내 아이에게 생후 팔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관례적으로 그 할례 받는 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모든 사람이 관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아
사가랴라고 부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엘리사벳이 강경하게 반대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요한”라는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 한 자가 없다 하고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그가 서판을 달라하여 그가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59-63절)
풍습과 관례를 따르지 않는 엘리사벳의 의견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사가랴의 의견을 묻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앞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불신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벙어리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손짓, 발짓과 같은 몸짓을
통해 아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으려 하는가를 묻습니다. 62절입니다. 그러자 그는 글을 쓰는 서판을 달라고 해서 아기의 이름을
씁니다. 놀랍게도 엘리사벳이 말한 요한입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이미 약속의 말씀이 주어질 때 하나님께서 이름까지 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복음 1장 13절입니다.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벙어리의 삶을 일년 살고 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숙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잉태와 출산을 경험하며 불신앙을 신앙으로 바꾼 것입니다. 전통을 따르는 삶에서 말씀을 따르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작명의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기를 키우겠다는 결단과 믿음이
담긴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사가랴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사모하게 만드십니다.
그뿐 아니라 이런 과정으로 통해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한치의 착오도 없이 은혜가운데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은 원래 히브리어로 “요하난”으로 “여호와가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즉 아기 세례 요한의 이름은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알리는 이름입니다.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의 은혜를 예고하는 이름입니다. 이후로 세례 요한은
이름에 합당한 나실인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메시아의 길을 평탄케 하고 준비하게 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이런 모든 과정 속에 드러나는 것은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만 약속을 주시는
분이신가요? 그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이신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동일하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를 초월해서 일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좋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행하실 기적을 경험하기를
소망하십시오. 기도가 이루어지는 꿈을 가지십시오.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다시 기적과 찬양으로
마지막 장면은 또 다시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64절에서 66절입니다. 요즈음식으로 말하면 치유의 기적입니다. 64절입니다. “이에 그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귀머거리이며 벙어리가 되었던 사가랴가 듣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한 그가 최초로 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사가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서판에 쓰는
순간 혀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의 순종을 드릴 때 기적이 체험되는 것입니다. 기적은 언제나 순종의 믿음을 타고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고 치유를 경험한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가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은 단지 아들을 얻게 되었고
벙어리신세가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요한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에 대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미 살펴 본대로 사가랴는 자기 아들 요한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할지 계시를 받았습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요 많은 사람이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 하리라” (눅 1:13-17) 스가랴는 아마 천사를 통해 주어진 이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벙어리가 되어 임신해서 점점 배가 불러오는 늙은 아내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선명하게 영혼에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요한이 태어나는 것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과 감사의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혀가 풀리자 마자 자연스럽게 찬송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삶 가운데 이런 감격의 순간이 주어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때 이런 모든 것을 지켜 보던 사람들은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삽시간에 이 소식이 인근과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집니다. 듣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놀랍니다. 그리고 아기 요한의 장래가 어찌 펼쳐질까 궁금해 합니다. 아이가 장차 어떤 인물이 되어 어떤 일을 감당하게 될까 기대를 갖게
된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대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고 있는 아이의 미래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 하실까 궁금해하는 영적 기대입니다. 요한은 잉태부터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아이입니다. 현재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어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주의 손이 항상 함께 하는 사람,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제 어두운 현실에 잠겨 있는 이스라엘에 소망의 빛이 밝아 올 것입니다. 불임의 가정에 요한이 잉태되어 태어난 것처럼 이스라엘에 처녀의 몸을
통해 메시아가 오시게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라는
폭군에 허덕이는 인류에게 여호와의 구원의 손길이 임할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능력이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하고 한 영혼 한 영혼의 죄를 사하실 하나님의
기적이 행해질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사역입니다. 사망의 그늘을 폐하시고 영생의 문을 여실 것입니다. 빈 무덤의 부활 사역입니다. 이 구세주의 임하심이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통해
시작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말씀을 우리 각자의 삶과 교회 공동체에 적용하며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순종을 하기로 결단하십시다.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스스로의 인생을 불필요한 고난과 고통에 던져
넣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주어지는 말씀에
조건없이 믿음으로 반응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합시다. 그때 기적과 축복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둘째, 주변과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공동체와
지체를 사랑하는 성숙한 삶을 살아갑시다. 공동체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기대하는 믿음을 갖고 삽시다. 셋째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은혜의 손길을 경험하면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그분은 영광과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감사와 찬양의 도구들로 삼아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