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가정을 세웁시다.
(시편 128:1-6)
2023년 5월7일(주일 예배 1,2부)
들어가는 말
연애가 깊어질수록 상대와 떨어져 있는 것이 속상하게 생각되는 시기가 옵니다. 다음 데이트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연애가 깊어지면 왜 늘 함께 있고 싶어할까요? 심리학적으로 친밀도가 증가하면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거리가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더욱 친해지면 거리가 아예 없게
됩니다. 즉 접촉상태가 됩니다. 신체적으로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는 등의 접촉상태가 됩니다. 심리적으로 개인적인 것도 숨김없이 털어놓거나 즐거움이나
괴로움도 함께 나누는 접촉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접촉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부모, 애인, 선배, 친구등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어릴 때 접촉의 대상은 부모입니다. 그리고 연애를 하게 되는 사춘기나 청년기에는 ‘이성’이나 ‘연인’이 됩니다. 물론
동성의 선배, 친구가 있지만 ‘연애’라는 상황하에서는
당연히 연애상대가 접촉의 대상이 됩니다. 에릭 반이라는 학자는 인간은 늘 접촉을 갈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접촉을 ‘스트로크,
stroke’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쓰다듬기, 또는 어루만지기’ 정도로 해석이 됩니다. 연애 이외의 상황에서도 접촉을 원하는 것이 보통인데 연애라는 마음이 부담스러운 상태에서는 접촉에 의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발전하면 함께 모여 ‘둥지’를 만들어가며 살아가고자 하는 ‘안전’이나 ‘안정’을 찾는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결혼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지내고 싶다.’ 또는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둥지 틀기’의 본능입니다. 이 본능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처방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 바로 결혼이고 가정입니다. 오늘도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꿈꾸시고
계획하신 아름다운 복들을 가정을 통해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혜의 시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28편으로 꽤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일반적으로 지혜의 시편이라고 합니다. 이 시에는 인생의 지혜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려서 건강하고 형통하며 자손이 번성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약속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시편을 자세히 묵상해보면
일반적인 인생의 지혜뿐 아니라 가정생활에 대한 지혜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가정의 구성원인
남자가 등장합니다. 1절과 4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표현합니다. 또 남자의 상대인 여자가 등장합니다. 3절에 나타나는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등장합니다. 3절에는 “식탁에
둘러 앉은 어린 감람나무 같은 자식들”입니다. 6절에는 “네 자식의 자식”으로 표현합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입니다. 모든 식구가 주님을 경외하며 화목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꿈 꾸는 바로 그런 가정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결혼과 가정 생활이 이렇게 장미꽃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가시가
없고 진딧물이 없는 장미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정생활도 다른 사회생활 못지않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는 가정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가족간의 갈등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쉽게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매끄럽지
못할 때도 있고, 자기가 낳고 기른 자녀인데도 어떻게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역기능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남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바로 내 이야기요, 바로 내 가정의 이야기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행복과 은혜의 둥지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불행과 고통의 현장이 될 때가 있습니다. 가족간의 관계가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 데 오히려 미움과 질시의 관계가 될 때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런 상황이나 현실은 그 누구도, 그 어떤 가정도 반드시 한번쯤은 경험하는 현실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느 관계도, 어느 공동체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결혼과 가정의 창시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관계를 맺어가고 가정을 일구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가정의 역기능적 요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오늘 주신 하나님의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가정과 삶에 적용함으로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세우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말씀대로 삽시다.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며 말씀대로 삽시다. 그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게 본문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게 말이 그렇지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 그게 참 중요합니다. 그래야 기쁜 마음으로 부담 갖지 않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즐겁게 순종하게 됩니다.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 육신의 부모님과 똑같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시켜놓고 하지 못하면 징계하려고 기다리시는 무리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다 할만 하니까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면 하는 과정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집니다. 그리고 하고 나면 결국 자신에게 큰 복이 됩니다. 그게 아버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런 행복한 공동체와 가정의 원리가 본문 말씀의 첫 절에 주어졌습니다. 바른 행동과 진정한 행복의 기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출발이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구체화되고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믿음의 사람이 드리는 겸손한 고백적인 행동입니다.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 사람은 이 고백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 살아가는 모습은 그렇습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태도요 생각이지만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타락한 이후의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지만 실상은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자유의지는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의지는 선을 택할 수도 있고 악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예의지는 선택의 힘이 상실된 상태의 의지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죄악들은 바로 최초의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자유의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노예의지의 지배를 받는 모습이라고 말하면 틀림없습니다.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노예의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도박을 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도박이 나쁜 것이고 결국은 자기 자신과 가정을 파멸로 이끌고 갈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도박을 안 하려고 합니다. 안 하고 싶습니다. 결심을 하고 다시는 도박장에 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습니다. 그런데 돈만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도박장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위로합니다. 이번엔 꼭 딸 거야! 그 동안 잃은 것만 만회하면 이제 손을 딱 끊어야지!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지만 그 의지의 결단이 지켜지지를 않습니다. 여전히 도박을 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주변사람을 어렵게 만듭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노예의지 때문입니다. 또 이런 예도 우리 주변에 흔합니다. 어떤 남편이 늘 아내에게 말을 함부로 하고 화를 잘 내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자녀들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두려움과 예측불허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아버지 자신도 그걸 어느 정도
압니다. 그래서 고치고 싶습니다. 버럭 화를 내고
나면 미안한 마음에 용서를 구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게 다시 술을 마시고 술의 힘을 빌려 아내에게 사과를 합니다. 자녀들에게는 선물을 사다 주면서 은근히 넘어가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 못
가는 겁니다. 일주일도 안 되어서 재발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 속에 있는 옛 자아가 노예의지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럴듯한 속임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나에게 자유의지,
Free Will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노예의지, Slavery Will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노예의지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죄를 벗어나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만드신 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선포합니다.말씀이신 예수 안에 자신을 위치시킬 때 말씀대로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인생의 등불로 삼는 것입니다.“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 105-106)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그 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생명의 하나님이시라면 그 분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의 말씀인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은 아주 단순하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 128:1)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생각의 기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행동의 지침이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복 있는 자가 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가정을 이루는
비결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합시다.
둘째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의 진리를 개인에게 적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래의 의미를 깨닫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 깨달음 후에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말합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목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압니다. 노동이라는 것은 물론 육체노동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적 노동, 정신적 노동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규정해 놓고 있는 복의 원리는
이마에 수고의 땀을 흘려 그 수고의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창 3:18) 그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그런 자가 복되고 형통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돕는 자를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한자에 ‘불한당, 不汗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에는 ‘떼를 지어 다니는 강도'를 의미합니다만,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불한당은 한자로 ‘아니 불不, 땀 한汗, 무리 당黨’로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란 뜻입니다. 말 그대로, 땀 흘리지 않고 거저 먹으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불한당입니다. 게으름뱅이도 그
중에 들어갈 수 있고, 강도도 물론 해당됩니다. 어떤
글을 보니 석유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지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복지정책에 돈을 펑펑 쓰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그냥 편하게 구걸해서 먹고 살려는 사람이 늘고 있답니다. 일종의 불한당입니다. 이런 식구가 많은 가정은 말씀대로 사는 가정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로 말라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가정은 모두가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가정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자녀들은 자녀들이 해야 할 공부와 맡겨진
일들을 잘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오늘도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 중 가장 큰 축복은 노동의 축복입니다. 휴식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이
없는 휴식은 휴식의 참된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수고하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나 말로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도 머리나 말로 사는 게 아닙니다. 손과 발로 섬기고 봉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는 복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2절의 말씀은 단순하게 노동의
대가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의 신령한 영적 성격을 포함합니다. 성실함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과 형통을 말합니다. 여러분, 1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듣는 대상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길을 걷는 자”라는 3인칭입니다. 하지만 2절은 ‘네가’라는 2인칭을 씁니다. 개인적인 적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적으로 이해를 했다
하더라도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되어 지지 않을 때는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형통하기를 원하십니까?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수고하는 실천의 삶을 살아라. 그때 복되고 형통하게 되리라.
이어서 말씀이 잘 적용되고 있는 그런 멋진 가정의 모습을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아내는 먼저 포도나무로 비유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감람나무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귀중한 과실수 두 개를 들어 여호와를 경외하고 말씀대로 사는 자의 가정의 복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악처가 철학자 남편을 만든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인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행패가 대단히 심해서
악처라고 세상에 이름이 높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심한 욕설을 한참
동안이나 퍼붓다가 물이 가득 찬 물통을 들고 들어와 "이 못난 영감아...물벼락이나 한번 맞아봐라.." 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다 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책에서 눈을 떼며 털털한 웃음으로 심술궂은 아내와 맞싸우지 않고
유머로써 웃어 넘겼다. 이때 제자들이 몰려와서 남자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설명해주었다고
합니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지.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훌륭한 철학자가 될 테니까” 좋은 아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좋은 아내가 되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Furiko (시계추)
‘Furiko(Pendulum·시계추)’라는 제목의 이 단편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코미디언 테켄(Tekken)이 만든 작품이 있습니다. 1038장의 플립 북(flip book, 한 권의 종이 묶음에 연속적인 그림을 그려 넣은 다음 연달아 책장을 넘기면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완성된 이 애니메이션은 지난 17일 동영상 전문 사이트 유 튜브에 오른 뒤 현재
수백만 이상의 클릭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댓 글 수만 수 천여 개입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미국, 스페인, 프랑스 등 세계 각국 네티즌들이 각자의 의견을 올리고 있습니다. 영화 제목은 ’Furiko
(시계추)’ 입니다.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이 만화 영상은 괘종시계의 추가 흔들리고 그 동그란 추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이야기가 조금씩 보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시계추는 멈추기도 하고,갑자기 빨리 또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해줍니다. 특히 대사 없이
배경음악과 영상만 있어 더욱 많은 상상과 공감을 일으킵니다. 스토리 자체는 언뜻 뻔한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의 시각에서 보면 ‘한 남자의 일생’이라 볼 수 있고, 반대로 ‘여자의 일생’으로 보일 수도 있는 묘한 영상입니다. 굳이 풀어내자면
한 남성이 길에서 불량배들에게 위협 당하는 여성을 위기에서 구해줍니다. 위험에서 벗어난 여성은 그
남성에게 곧 애정을 느끼지만, 남자가 여간 딱딱한 게 아닙니다. 순수해 보이는 여성이 조용히 그의 곁을 맴돌지만, 남성은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무뚝뚝해 보이는 남성은 어느덧 자신만을 바라보는 여성에게 마음을 열고, 곧 둘은 결혼해
집을 장만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살아갑니다. 하지만 남자는 어느새 사회에 찌들어 ‘나쁜 남편’이 돼 갑니다. 가정폭력을 휘두르기도
하고, 술과 여자에 빠져 가정에 소홀해집니다.
그러다 듣게 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아내가 병을 앓게 된 것입니다. 남편은
마지막 가는 아내의 곁을 지키기 위해 막노동까지 해가며 속죄하고 아내 곁을 끝까지 지킵니다. 그런데
이 내용도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분분합니다. 한 일본 네티즌은 “여성이 쓰러진 뒤(영상 중 1분35초 이후) 여성은 기억 상실증에 걸렸고, 남편은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종이컵 전화기’
등을 이용해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써보지만, 헛수고. 결혼식 때 못해준 면사포를 씌워주기 위해 각종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지만 결국 그도 못해주고 하는 걸 보면 결국 남자가 먼저 세상을
떠난 내용 같다고 말합니다.
시계추가 멈췄음에도 남자는 아내를 위해 최고의 한 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병든 아내가 시간이
갈수록 쇠약해지자 남편은 미어질 듯한 아픔에 시간을 멈추려고 시계추를 붙잡고 매달리는 것이 애처롭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남편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자, 그래요. 이제 같이 갑시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해석이야 어떻든, 많은 네티즌들은 “3분짜리가 이렇게 내 가슴을 울릴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야겠습니다” “인생은 어쩌면 한 순간…. 짧은 순간도 헛되게 보내면 안 되겠습니다” “영상을
보는 3분 내내 제 눈에선 눈물만 흘렀습니다.” “지금 아내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야겠어요.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나가는 말
여러분, 집은 누구나 세울 수 있는 반면에 가정은 누구나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집은 벽돌을
비롯해 갖가지 건축 재료를 모아 지은 것이지만 가정은 훈훈한 애정, 아름다운 소망, 가슴을 열고 살아가는 신뢰로 이루어집니다. 아주 좋은 집에 살면서도 가정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빈민가의 초라한 집에 살면서도 아름다운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훌륭하게 건축된 집은 정교하게 장식된 무덤에 지나지 않는 불행의 장소일 수도 있지만 밝고
따뜻한 가정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가정 속에 자기의 세상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녁 무렵이 되면 비로소 가정의 고마움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저녁이 되면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집은 가정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저녁이 되면 영원히 거할 집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영원히
사는 복된 천국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는 태양으로 타오르며 소망이 없이 현재를 불태우지만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비록 현실의 삶이 힘이 들더라도 어두움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삶을 사는 행복한 미래의 삶을 사는
여명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5절과 6절은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성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가정이 이제 시온으로 바뀝니다. 예루살렘으로 바뀝니다. 시온 산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모든 복과 은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에서 흘러 나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개인의 복, 가정의 복, 공동체의 복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예배로 모십니다. 기도로 모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 모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가정이 세워지고 그 복은 영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그리고 실천합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길을 걷는 성도가 되시므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가정을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