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인생에게 임하는 은혜와 평강

나그네 인생에게 임하는 은혜와 평강

(베드로 전서 1:1-2)

202045(주일 예배)

들어가는 말

          

베드로전서는 서기 62-64년경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베드로가 기록했습니다. 성도들의 삶 가운데 직면하고 있는 고난과 핍박, 박해를 이길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참으며 앞으로 다가 올 영원한 하늘나라와 그 영광을 바라보도록 권면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를 "격려의 서신" 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박해의 고통 중에 흩어져서 이방 땅에서 나그네가 된 성도들에게 산 소망을 갖도록 격려함으로 고난과 시험에 약해지지 아니하고 구원의 소망가운데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도록 돕는게 목적입니다. 잠시 살아가는 덧없는 현재라는 삶의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와 기업을 바라보도록 힘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전체에 걸쳐 강조되는 핵심 주제는 소망 입니다. 본 서신서는 이런 시련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 불신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을 증진 시키는 것이고, 부정적 사고를 몰아내는 방법이 긍정적 사고를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불행을 이기는 법은 행복의 영역을 확장키는 것입니다. 슬픔을 이기는 법도 기쁨의 요소들을 늘려 나가는 것이 듯이 성도들의 삶 가운데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이라는 것립니다.

 

한 어부의 이야기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갈릴리의 바닷가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난 사나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동리와 바다를 사랑했고 그 바닷가과 바다에서 삶을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물을 만들고 고기를 잡고 바다와 친구가 되어 살았습니다. 우직했던 그는 성격이 급했지만 충성스럽고 헌신적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그가 어느 날 구원의 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중요한 핵심멤버가 됩니다. 12 제자 중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대변인이나 대표 격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의 인생은 되돌릴 수 없는 은헤의 길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는 그 과정가운데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과 이사를 비롯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며 점점 더 예수님께 의탁되어진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많이 헌신했고 충성스러운 제자로서 앞장서서 예수님을 섬기고 따랐습니다. 그는 심지어"예수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는데 까지 함께 가기로 준비했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22:33)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말하는 데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22:34) 이에 베드로가 정색을 하면서 대답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26:35) 자기 확신과 자신감에 차서 호언장담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여러분 잘 아시지요? 그렇게 장담한 바로 그날 저녁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온 마음을 주님께 드렸던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 슬그머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보고 아랫사람들과 여종까지 보는데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모를 뿐 아니라 그분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한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닙니다. 두 번도 아닙니다. 하루 저녁에 세 번씩이나 부정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비겁하게 예수님께 등을 돌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경고를 주었는데 그 예수님 앞에서 무참하게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때 사건을 누가복음 2261절과 6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2:61-62) 더 이상 예전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닙니다.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그 용기있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 말도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벽에 기대어 통곡하는 연약한 실패자일 뿐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초라한 어부의 모습입니다. 그는 부끄러웠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상하고 깨어진 영혼이 몸부림칩니다. 용감하고 당당했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부끄러움의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모든 소망은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눈만 감으면 그날 밤 자신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동자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너마저 나를 버리다니!"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자기를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빛이 따라다니는 것만 같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던 장면을 생각만 하면 마치 자기의 심장에 못이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망치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이 더 초라하고 못나게 느껴집니다.

          

그러던 삼일 후 그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장사된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정말 기적이었고 자기 생애에 가장 획기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에도 예수님의 기적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도 경험하고 병자를 치유하시는 자리에도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귀신을 제압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마음속에는 여전히 벗어 버릴 수 없는 사슬이 그의 삶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반자가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과 실패자의 수치였습니다.


그런 좌절과 낙망과 수치의 나락에 헤매고 있는 베드로는 이제 자기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끝이 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기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아무런 소망의 씨앗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로 더 그런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이상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단히 결심을 합니다. 그래, 옛날로 돌아가자. 그리고 그저 평범한 어부로 살다가 일생을 마치자.” 그는 곡절과 사연이 많았던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옛 동료들과 함께 고향 디베랴 호숫가 마을로 낙향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고기를 잡으며 하루하루 지내게 됩니다.(21:1-3)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감히 찾아 나서고 다시 따르겠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기는 실패자요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처럼 밤이 되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어부들은 보통 밤에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습니다. 그 날도 베드로는 저녁을 먹은 후 그물을 챙겨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새벽녘까지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허탕을 친 것입니다. 허탈한 심정으로 배를 저어 해변으로 나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해변에 한 사나이가 서 있습니다. 그 사나이가 베드로와 어부들을 향해 말합니다. "친구들, 고기 좀 잡았소?" "No, mate! 허탕이요!" 그러자 그 사나이가 다시 말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시오. 그러면 잡을 것 같군!"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을 했는지 베드로와 동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고기가 많이 잡혀서 그물을 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때 함께 있던 요한이 눈치를 챕니다. 베드로에게 얼른 말합니다. "주님이시다! 예수님이셔!" 너무 놀란 베드로는 엉겁결에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듭니다. 다른 제자들이 배를 호숫가에 대자 그곳에는 모닥불이 지펴져 있고 숯불 위에는 생선과 떡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잡은 생선 좀 가져 오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리 와서 아침을 먹어라." 자기들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아는 제자들은 아침을 먹으면서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없이 먹기만 합니다. 어색한 분위기속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자 예수님이 특별히 시몬 베드로를 지적하시면서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몸 둘 바를 올라합니다. 하지만 속에 품고 있던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세 번을 묻고 세 번을 대답합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부탁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21:4-18) 그때 주님과 베드로 간의 사랑의 확인과 사랑의 고백이 주는 위대한 기적이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속사람과 직면하고 모든 것을 해결받습니다. 실패와 부끄러움에서 일어섭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다시는 예수님을 떠나지도 배반하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회복이 사명을 사랑하고 완수하는 동기가 됩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로마의 박해아래 죽음을 당할 때도 감히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바르게 매달려 죽을 수 없다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절대절망에서 절대소망을 경험한 것입니다.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면 절대절망인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절대소망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소망 없는 인간의 삶가운데 참된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죄인인 우리는 스스로 일어서지 못합니다. 오히려 숨게 되고 피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회피하게 하고 자꾸 자기를 비하시키고 자존감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과 계획은 그게 아닙니다. 찾아오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새로운 사명으로 헌신하게 하시고 미래를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십니다. 여러분들과 제 속에 소망을 품고 있는 것을 알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한 때 쓰러지고 실패했지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주시고 일으켜 주시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한때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당하는 어두움의 삶을 살았지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신 뒤로 새로운 소망가운데 재탄생을 한 것입니다.

 

늙은 어부의 편지

          

그 베드로가 예수님께 변함없는 헌신과 섬김을 드리다가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노인이 되었을 때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불이익을 당하고 고통과 박해속에 숨어살아야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젊은 날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의 모습 때문에 실패감과 낮아진 자존감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떠날 유혹에 사로잡혀 말 못하는 고민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늙은 어부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속에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 전서입니다. 소망의 편지입니다. 희망의 편지입니다.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무엇을 기대하며 어디에 소망의 뿌리를 내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의 주제를 한 단어로 말하라면 바로 “Hope, 소망입니다. 이제 앞으로 매 주일 마다 이 말씀을 강해하고 묵상하며 함께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 말씀을 함께 묵상해 가는 동안 여러분 모두에게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모든 부정적인 부분들이 긍정과 믿음으로 변화되고 기대와 소망으로 채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인생의 본질을 알고 삽시다.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나그네 인생, 그게 저와 여러분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입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만이 아닌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정체성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가끔씩이라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야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바로 알기 때문입니다. 바른 방향으로 바르게 전진하며 살고 있는 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암묵적을 기록되는 질문은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말하고 있지요? 우리 모두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Sojourners of Dispersion"이 말은 원래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용어였습니다. 요즈음은 Korean Diaspora와 같은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Palestine을 떠나 Palestine 밖의 다른 곳에 사는 유대인들만을 지칭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 가운데는 그들만이 선택된 백성이고 그 외에는 이방인라는 개념이 은연중 배어 있었습니다. 당시 극단적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시기 위해 이방인을 창조하셨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만큼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서 제외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는 우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베드로가 선택된 민족이었던 유대인들에게만 사용되던Diaspora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인류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 안에서 누리게 되는 특권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이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전혀 기대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영적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의 상속자요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임시 체류자입니다. 그게 성도의 가장 정확한 정체성입니다. 이곳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자요 임시 체류자처럼 살아야 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임시 체류자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에게는 바로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나라의 시민으로 잠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닌 것입니다. 이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으면 늘 흔들리고 자주 좌절합니다. 세상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잠시 머무는 여관에서 자기 집에서처럼 살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생과 세상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나라에 속한 영생의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느 영성가가 이세상은 다리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다리를 건너가지 그 위에 집을 짖지 않는다. The world is a bridge. The wise man will pass over it, but he will not build his house upon it.”이 세상은 종착역도 목적지도 아닙니다. 다리와 같은 과정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유형은 여차하면 떠나야 한다는 임시 거주자라는 것입니다. 이 나그네 의식이 분명할 때 우리는 세상에 매여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요즈음 같은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기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진짜 소망하는 성도로 살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선택하는 인생이냐 아니면 선택되는 인생이냐의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 중요한 단어는 택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인간이 하는 착각 중에 가장 큰 착각이 스스로 선택해서 존재하게 된 줄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인 하나님 외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우주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하물며 먼지 같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게 됐다고요? 성도가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내가 스스로 되는 것인가요? 절대로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원래 이 택한 자라라는 말도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76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선지자 이사야도 "나의 택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45:4) 하나님의 택하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방에 구원의 소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합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도록 내어주십니다. 그 예수의 피 흘리심을 통해 새 백성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믿는 자마다 참 이스라엘로 선택하셔서 새로운 구원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속했던 모든 특권의 수혜자가 바로 교회가 되게 하십니다. 그 교회가 바로 여러분들과 저입니다. 택할 때는 택함과 함께 준비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입양은 선택입니다. 그리고 입양 후 자녀의 모든 것은 선택하고 입양한 부모가 책임집니다. 우리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지 굴에서도 왕자는 왕자의 위엄과 행동과 언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거지는 왕궁에 데려다 놓아도 거지의 행실과 언어를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선택하신 거룩한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참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으로 갈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We, as Christians, are the Chosen People of God; we are exiles of eternity. Therein lie both our price less privilege and our inescapable responsibility.

          

인생, 마음대로 안 되지요! 마음대로 안 되는 인생, 언제 행복할까? 언제 진짜 행복할까? 선택될 때, 그것도 선택하는 존재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치 왕비로 간택되듯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왕을 위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선택받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는 것은 바로 선택받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불안한 오늘과 불확실한 미래때문에 걱정하시는 여러분, 주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선택하신 분께서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라도 저와 여러분들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세번째는 은혜와 평강을 위하여입니다.

          

그렇다면 왜 선택하셨을까? 나그네 인생에게 임하는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 십자가를 통해 성도에게 임하는 모든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평강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로 인해 주어지는 내적 행복의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샬롬의 축복입니다. 가장 복된 성도의 삶을 모습을 말합니다. 이 평강의 축복은 예수 십자가라는 다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죄로 인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던 그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도달하게 되었을 때 경험하는 죄 용서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안도와 평안의 상태를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것을 저와 여러분에게 확인시켜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소망이라는 단어에 포장해서 이 모든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 분위기와 힘을 주는 단어가 무엇일까요? 마음이 꺾일 때 여러분에게 힘을 주는 단어를 하나만 골라보라면 어떤 단어를 고르시겠습니까? 어떤 말을 들을 때 삶에 활력소가 되고 에너지가 솟습니까?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난관에 직면한 사람은 아마 누군가가 너는 틀림없이 할 수 있다.”고 격려하면 긍정의 힘을 얻을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질병으로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낫는다.”고 확신 있게 말해주면 치유의 희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사랑에 목이 마른 사람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내가 존경한다.”는 말 한마디에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출발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다다 약간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이렇게 긍정의 힘과 능력을 주는 언어들은 모두 희망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단어자체가 소망과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은혜와 평강 또는 소망이나 희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힘이 납니다. 평안해집니다. 용기가 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번 해볼만하다는 믿음의 확신이 생깁니다. 재도전과 재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Hope, 소망 또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정말 좋아합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에게 고백합시다. "당신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당신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사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궁극적 평안과 은혜는 사람이 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의 터널에 갇혔을 때, 소망은 그 터널 끝의 빛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과로하고 피곤에 지쳤을 때, 희망은 신선한 에너지를 줍니다. 낙망에 잠겨있을 때 우리의 영혼을 일으켜 세웁니다. 이제는 할 만큼 했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끝까지 지속할 수 있는 인내를 줍니다. 우리가 병들어 몸이 말을 안 듣고 내 의지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고통을 넘어 소망의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여전히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결정으로 아픔의 고배를 마실 때 희망은 우리에게 회복과 새 출발의 연료가 됩니다. 우리가 실직으로 인해 고민하고 적자를 면치 못하는 사업 때문에 고민에 빠질 때 희망은 여전히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이야기해줍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을 갖게 합니다. 버림받고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상하고 마음에 상처가 아플 때 소망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며 극심한 슬픔에 잠길 때 소망은 죽음 뒤에 있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게 합니다. 조금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말하자면 인생이 상처입고 꿈이 사라져 갈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소망보다 더 좋은 명약은 없다는 것입니다.(Put simply, when life hurts and dreams fade, nothing helps like hope.) 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나가는 말

          

인생,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내가 주인입니까?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냐 길을 잘 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인생의 참 주인되시는 예수님께 인생의 운전대를 맡기십시오. 선택받는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다만 흙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탄생도 죽음도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선택하시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것에 감사하십시오. 가장 좋은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인생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갖으십시오.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불편과 어려움은 잠시 나그네의 것입니다. 요즈음 경험하는 어려움과 불편도 곧 지나갑니다. 곧 안정이 오고 곧 평안이 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어려움과 잠시의 고난이 소망 일 수밖에 없는 것은 선택하신 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너무나 소망이고 축복인 것은 바로 자신의 독생자까지 내어 주시며 이루신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시기 때문입니다. 힘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에게 속한 모든 부요를 여러분에게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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