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과 믿음이
주는 기쁜 삶
(베드로 전서 1:3-7)
2023년 5월 21일(주일 예배)
들어가는 말
요즈음 깊이 생각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남은 인생에 대한 사색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각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 지더라고요. 특별히 이런 저런 신체적인 연약함과
어쩔 수 없는 여러 가지 한계를 경험하면서 남은 인생에 대해 예전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한
가지 작은 결론은 무엇을 이룰 것인가 보다 무엇을 향해 갈 것인가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잘하고 성취하는 것 보다 실수를 줄이는 인생의 후반의 삶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을 굳게 가다듬으면서 끝까지 삶의 주인공 노릇을 톡톡히 해 보겠다는 도전의지가 발동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혼돈된 이중성이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저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모습 중 하나가 아마 제가 요즈음 읽고 있는 책들의
선택에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요시노리의 <나이에 밀리지 않고 진짜
인생을 살고 싶다.> 유재근의 <인생 오십,
남달리 살피고 사랑하라.>,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예일 대 철학 교수인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법정 스님의 <오두막편지>
중국 작가 융광이 지은 <장자의 내려놓음>, 위지안의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이화여대
이근후 교수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박경숙의 <문제는 무기력이다.>, 공자의<논어>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노인학에
관한 책도 많이 관김을 갖게 됩니다. 이외에도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진지하고 치열한 담론을 담은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다시 확인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그들도 나와 똑같은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두 나름대로는 인생의 경륜과 깊고 해박한 지식을 통해 논리를 펴고 결론을 내리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들의 인생에 궁극적인 정답을 주지 못하는 단편적이거나 심지어는 어리석고 허무한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지혜를 제시하고 논리를 전개하기는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이 저나 여러분들처럼
보통 사람 또는 자연인으로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차원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어느 사람도 참된 소망을 제시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답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답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고도의 지적 언어로 표현되고 깊은
철학을 담은 것처럼 느끼게도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한계와 궁극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매번 경험하면서 실망보다는 큰 확신과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고의 방황을 끝내고 돌아갈 확실한 진리의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고향이 어디일까요?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답을 줍니다. 에둘러 애매모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시작이나 종말에 대해서도 정확합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정확합니다.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해서도 망설이지 않고 정확한 청사진을 펼쳐 보여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의 삶과 그 삶이 지향해야 하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인지를 알려 주고 그 인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 사도를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베드로 전서를 통해서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하는 인생의 정답이 있습니다,
특별히 성도가 믿음으로 인해 고난 당할 때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 지를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본 서신서는 당시 로마의 황제인 네로의 박해 아래에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성도의 삶은 현재에 초점을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인 것을 말합니다. 박해로
인해 힘들고 어렵지만 영생을 소망하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계속 추구할 것을 독려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도는 부활의 산 소망과 하늘의 유업을
위해 다시 태어난 존재입니다.
"아빠, 아빠는 절대 죽지 않아!" 서른 세 살의 아가씨의 외침입니다. 공군 중사인 전미화씨가 자기의 간을
간경변증으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이식해 준 후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외치는 비명처럼 안타까운 절규입니다. 14만 8천명이 응시한 편지 쓰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수기의 내용입니다. 전씨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65%의 간을 아버지에게 이식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전씨의 아버지는
면역 억제제의 부작용으로 다시 간, 대장, 폐에 암이 발병해서 투쟁 중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격려합니다. “아빠, 그래도 암 수술이 잘 끝났어요. 이제 남은 6개월간 항암치료만 잘 이겨내시며 되요.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의심도 하지 않아요.” 얼마나 안타까운 사연입니까? 여러분, 이런 안타까운 사연은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이때 참 소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정말 요즈음 찾아 보기 힘든 이런 효녀의
지극한 효성에 소망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현대 의학일까요?
미국의 과학자 중에 에디슨 이후의 최고의 발명가로 꼽히는 레이 커즈와일(Kurzweil) 라는 분이 있습니다.
스캐너, 광학 문자 인식기(OCR), 시각장애인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기계, 컴퓨터로 음악을 연주하는 신시사이저…. 이
모든 것이 이분에 의해 발명되었습니다. 돈도 엄청나게 벌었습니다.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구글에서 엔지니어링 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평생의 연구
과제인 사람 수준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구글에 입사할 때 커즈와일은 주장했습니다.
10년 안에 심장 질환과 암에 대한 연구가
거의 끝나고, 20년 안에 인류는 모든 질병을 극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지 않고 인간이 영원이 사는
불멸을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멸의 시대가 열리는 날까지 생존하기 위해 알약을 하루 150개 먹는다고 합니다. 2045년 정도이면 인간은 죽지 않고 살수 있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그가 암에 대한 연구가 10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벌써 11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그분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알약을 150개씩 챙겨 먹으면서 죽음이 정복되는 그 날 까지 생존해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그 분이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소망의 근거가 이런 것에 있지 않은 것에 감사합시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여러분들과 저의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3절에서 5절에 설명합니다. 먼저 3절을 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고"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구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생리적 출생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출생을 말합니다.
해마다 저희 교회에 아기들이 태어납니다. 이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이곳 호주에서는 남편이 아내가 출산하는 분만실에 들어가서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 돕고 직접
탯줄을 자르기도 하고 출산에 직접 참여를 합니다. 자기 자녀가 탄생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새 생명의 신비와
감격을 그대로 맛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받은 남편들을 만나서 처음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놀랍다는
것입니다. 감격스럽고 신비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만나본 분 중에는
무서웠다고 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말하는 것은 그 생명을 안아보는 순간 감격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안는 순간 울어버린 분들도 있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아빠 엄마는 바로 전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한 밤중이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부모님께
전화하고 가족들에게 알립니다. 친구들에게 알립니다. 여러분 이렇게 새
생명의 탄생은 좋은 소식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소식보다 감격스럽고 소망이 넘치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얻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두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축하해 줍니다.
그러나 아기는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탄생할 수 없습니다. 아빠 엄마가 있어야 하고 10개월이라는 긴 잉태의 기간이 있습니다. 엄마는 입덧을 하느라고 잘 먹지도 못합니다. 아파도 태아에게 해로울까 염려되어 약도 함부로
먹지 못합니다. 처녀 때 입던 멋지고 예쁜 옷을 입는 것도 다 포기하고 그야말로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어 지냅니다.
그리고 아기를 낳을 때의 고통은 여자가 경험하는 최고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 산모의
고통은 소망이 넘치는 아름다운 이유가 있는 고통입니다. 바로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고통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하나님의 가족으로의 탄생이 아버지 하나님이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당연히 받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있습니다.
우리는 불순종과 죄로 인해 하나님에 대해 죽어 있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죽어지면 비로서 그곳에 새싹이 나옵니다. 새 생명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0) 이 소망의 진리 위에 믿음의 집을 견고하게 지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소망은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업은 영원합니다. 안전합니다.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완벽하고 최고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4절에서 말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실수합니다. 내가 잘하면 될 거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썩어지고 없어질 세상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버리고 지구를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구원은 예수 안에 주어진 새 생명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나그네처럼 이 세상에 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환영 받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최고의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생과 하늘의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의 근거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 안에 두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9) 우리가 보고 경험하고 있는 현실 세계를
넘어서는 놀라운 축복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우리가 현재 바라보는 축복이 축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러워하고 갖기를 원하는 축복의 모습은 장차 갖게 될 것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현재의 삶도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 가난한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롬 8:32) 예수 안에서 현재와 미래를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소망의 근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안에 소망을 두시기를 축복합니다. 당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이 부활의 복음이 주는 산 소망이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계신 현재의 삶에 참된 능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격려와 기쁨을 주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 안에 보호 받습니다.
어느 글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
둘이 나눈 대화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중국도 못 믿고, 미국도 못 믿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만 우리 한반도를 책임진 지도자들이 그런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다는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여러분, 누가 누구를 믿습니까? 세상에 영원한 우방이
어디 있고 영원한 원수의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모두 자기의 이권을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까?
국가적 차원에서만 그렇습니까? 우리 개인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었던 사람 아닙니까? 보증 서 보셨지요? 내가 믿고 보증을 서 준 그 사람 믿을 만 하던가요? 사랑을 베풀면 그 사람이 그 사랑에 합당한 삶으로 보답하던가요? 누굴 믿고 사세요?
무엇을 믿으십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증거합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 1:5)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 저와 여러분이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를 안전의 성채에 거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복과 기업을 주시기에 조금도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주시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얼마 동안 그렇게 하실까요? 세상의 끝에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움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실 수 있지만 마음은 있어도 능력이 없어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민들이 자기 자녀보다 호주 정부가 효자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호주정부가 죽을 때까지 연금을 주고
주택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책임지지 못합니다.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고
나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실 만큼 모든 것을 다 마련해 주심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음 뒤의 세계까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에도 성도의 소망은 부활하신 능력의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호아래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성도는 시험과
근심 중에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겪는 어려움은 축복의 서곡입니다. 미래를 보세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8)
예수 십자가를 보세요. 부활이 보입니다. 하늘나라의
유업이 보입니다. 소망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만약 소망이 마음속에
기쁨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콧노래를 부릅니다. 그 소망이 즐거움과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진짜 소망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이겨냅니다.
그 소망이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고난 뒤의 행복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의 성취가 모든 고생과 슬픔을 보상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 6절에서 7절에서 이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이 가져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 함께 읽어 보도록 하십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말미암아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가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기업이 약속되어
있기에 그 소망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그는 성도들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로서 박해 받고 고난 속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믿음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따돌림 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믿음 때문에 이곳 저곳 피해 다녀야
하고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슬픔도 당하고 고난도 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가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시험과 근심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깐이요 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경험하고 슬픔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대하고 맞이하는 성도들의 태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주신 구원의 소망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이 세상의 시험과 근심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모래알을 품는 고통 속에 아름다운 진주는 만들어집니다. 레몬이 짓 이겨질 때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티 백이 뜨거운 물속에서 참고 견딜 때 은은한 차가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연단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근심이라는 불의 용광로를 통과함으로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것을 견디게 하는 힘은 무엇이야? 바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믿는 자들로 하여금 시험과 근심을 견디게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시험과 연단의 과정을 기쁨으로 인내하고 즐거움으로 통과하게 합니다. 진짜 소망하는 믿음의 사람은 시험을 경험하며 오히려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가 시험과 근심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당신의 손을
얹으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전체적 그림을 보고 인생의 경기를 담대히 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해 밝고 희망찬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고난 가운데 기뻐하며 견디고 전진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나가는 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마지막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녀나 부모와 같은 가족입니까? 진보된 의술이나 과학입니까? 성도가 새롭게 태어난 곳은 부활과 영생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잠시 어려우십니까?
복음 안에서 믿음과 소망의 시각을 가지고 기쁘게 정면 승부하십시오. 삶이 있는 동안
반드시 소망은 있습니다.(While there is life, there must be hope.)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한 소망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중에 소망보다 더 멋진 것은 없습니다.
인생의 역경과 시험이 몰려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있으면 모든 것은 변합니다. 소망만 있다면 반전과 역전의 드라마는 반드시 가능합니다.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이나 가지고
있는 게 다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결국에는 그 가장 좋은 곳을 향해 소망 중에 전진하고 진보해가는 게 성도의 삶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비교할 때 그곳은 기쁨과 놀라움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아픔도 눈물도
죽음도 없는 행복과 즐거움과 감사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련과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깊고 탄탄하게 하시도록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하나님을 소망하며
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어떠하든지 영원한 소망을 품고 믿음으로 전진하셔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