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믿음의 결국
(베드로전서 1:8-12)
2023년 5월
28일 (주일 낮 예배)
들어가는 말
여러분, 요즈음 모두 조금씩은 혼란스럽고 어려우시지요? 누구 한 사람 ‘나는 안 그래!’ 라고 말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경제적인 것이나,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과거보다 더
민감하게 현실의 영향을 받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기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일까를
잘 생각하는 게 매우 필요합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채 결정이나 행동의 우선권을 잘못 정하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급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그 급하다고 생각한 것을 먼저 하거나
집중하다가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는 낭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현재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점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지금 이런 시기에 예배를 드리는 게 급한가요?’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또는 ‘이런 때 기도회를 하고 성경공부하는 게 중요한가요?’하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대답을 기대하시든지 저는 분명히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녜,
이런 시기일수록 영적 자기 점검과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는게 가장 급하고 가장 중요합니다.” 동의하실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이런 시기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른 행동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 사람의 생각
모든 사람들이 잘 아는 유명한 출애굽 사건만 해도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중요한 목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하나님의 의도가 또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 목적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애굽의 모든 신들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니라”출애굽기 12장 12절입니다.
재앙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역사적 손길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거짓 신과 우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애굽 사람들이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출애굽기 14장 4절입니다. 당시 애굽이 경험했던 모든 재앙은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거짓 신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거짓
신들과 우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 여호와 하나님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뿐아니라 그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을 재앙으로부터 특별히 보호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특별한 구원과 보호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선지자들의 외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앙과 역병으로 고난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 돌아서는 게 가장
중요하고 급하다고 선포했습니다. 인간적으로나 현실 상황적으로보면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상황에 대처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농사도 더 열심히 지었고 양식도 많이 저장하고 성채도 더 튼튼하고 높게 쌓았습니다. 그때나 오늘날이나 똑같습니다. 현실의 문제들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이 온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는 백신이나 치료제가 속히 개발되어 Corona Virus가 빨리 사라지고 정상의 삶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그래야 경제가 살고
사람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경제가 이전 같지 않으니까 경제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들합니다.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사람들의 초점이나 생각에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런 모든 인간적인 노력과 최선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급한 것은 전염병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빨리 해방되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요 경배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역병이나 가뭄에 대처하는 세상적 비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과의 관계를 먼저
점검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회복이 역병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원리는 오늘날도 여전히 조금도 변함없습니다. 동일합니다. 이런때 세상이 신뢰하는 과학과 의학은 “어떻게 하면 역병에서 벗어날까?”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먼저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과 역병이
생길 때는 첫째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을 때입니다. 민수기 25장 8절과 9절을 보면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여인들과 음행을 하다가 2만 4천명이 역병으로
죽습니다. 두번째는 국가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떠나 교만과 오만에 빠졌을 때입니다. 사무엘 하 24장 15절을 보면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인구조사를 통해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고자하는 오만에 빠질 때 죄없는 백성들이 온역과 염병으로 7만명이
희생당합니다. 이때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겸손히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탐심과 물질주의라는 우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경배와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가장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라는 것입니다.
경제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문이 닫히고 비가 오지 않아 경제가 피폐해지면 영적으로
점검하는 게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죄를 회개하고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회개하고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역병을 거두시고 상처입은 삶에 새살을 돋아나게 하십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다시 축복의 단비를 주십니다. 성도들이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은 하나님은 조금도 실수없이 선택하신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 (대하 7:13-14)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런 역병이 창궐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처방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드린대로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그분을 섬기다가 나이가 들어 깊은 깨달음속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기록한 목적은 성도들의 삶가운데 직면하고 있는 고난과 핍박, 박해와 불이익을 이길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에게 믿음의 인내로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하늘 나라와 그 영광을 기대하고 바라보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본 베드로전서는 “불 시험”을 (4:12) 비롯해서 고난에 대한
언급이 열다섯 번 이상 나옵니다. 당시 로마의 국가 지상주의와 로마인들의 사치와 향락과 비교되는 기독교인들의
절제된 삶의 모습은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황제 숭배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거부는 국가에 대한 불충성분자들로
낙인이 찍히게 되고 기독교인들의 집회에 박해를 가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베드로는 해결책으로 세상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타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포기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거나 잠시 중단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가 제시하는 비법은 세 가지입니다. 이 세가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 우리의 현재의 삶에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들입니다. 말씀을 들으며
소망 가운데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사랑하라.
첫째는 예수를 더 사랑하라입니다. 보지 못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농도를 높이라고 말합니다.
보지 못하고도 사랑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면서 사랑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 말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했던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눈으로 다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을 마라보며 너무 대견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배반했던 자신을 생각할 때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들이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도 박해로 인해 고난을 당하면서 삶의 터전도 버리고 부귀와 영화도
뒤로한 채 그분을 따르고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 귀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오늘날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에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랑에는 헌신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손해도 보아야 하고 감정에너지와 시간을 바쳐야 할 때가 허다합니다. 사랑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자기를
사랑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사랑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가장 극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박해가 두렵고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이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 내느니라” (요일 4:18)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심지어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 8:6)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줍니다. 이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초대 교회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의 삶을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감전된 사람은 보지
못한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이 박해와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 사랑은 그들을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어려운 이 시기에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심으로 이 고난과 곤고의 시기를 통과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더욱 믿어라.
둘째는 보지 못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1-2, 6) His presence in our life is real, even if unseen. 예수님의 임재는 보이지 않아도 우리 삶에 항상 실재합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 (요
20:29) 불안과 공포는 환경보다는 불신에서 옵니다. 믿으면 소망이
생기고 기대가 생깁니다. 불안과 공포가 사라집니다. 믿음은 지상의 축복을
초월합니다. 믿음에서 오는 소망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세상은
‘살아있는 한 소망은 있다.’ 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실은 사람은 소망이 있을 때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포기하고 죽습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주는 소망이 아니라면 그 소망은 금방
소멸됩니다. 아무런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막연히 소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갖게 되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이 주는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확신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소망은
바로 오늘 본문 9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입니다.
구원 즉 영생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시신을 화장하거나 땅에 뭍는 장례예배를 드리면서도 믿음으로 소망의 찬양을 부르며 천국환송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는 소망이 죽음 너머 부활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소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낙관주의는 그저 막연한 소망 사항에 불과하지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이 주는 소망은
확실한 보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이고 믿음이 주는 소망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이제도 …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8-9)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온 사회와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속에 잡혀 있을 때에
믿는 사람은 보지 못한 예수님께 믿음의 초점을 맞추고 소망중에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 어두울 때에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에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91:3, 6)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강화하심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기쁨의 영역을 확장하라.
세째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의 영역을 확장하십시오. 사랑과 믿음의 소망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밖의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으니까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기쁨을 누리려고 하다가 그 기쁨의 대상이 사라지거나 사라질 것 같으니까
불안한 것입니다. 즐겁지도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오면
금방 근심에 쌓이고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의 근거를 잘못 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풀과 같고 꽃과 같은 것에만 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잠시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다양한 종류의 시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련을 경험하면서 잠시
근심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시련을 참고 견뎌내는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며”그 고난가운데 믿음의 보석을 만들어 냅니다. 끌어 안고 직면하며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 시련이 우리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완성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난 자체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면 금방 소망이 생기고 즐거움과 기쁨이 회복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고난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시고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이란 큰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고난가운데 사랑과 믿음을 잃지 않고 기쁨으로
그 고난을 끌어안고 소망중에 전진하는데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더 닮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련이 주는 상처를 통해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의 향기를 진실하게 드러낼 수 있고
더 깊은 내면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기쁨의 결국
그렇다면 이런 세 가지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9)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입니다. 첫째는 죄에서 구원이요 둘째는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의 구원입니다.
이땅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공주의
새 한마리까지 돌보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보이는 모든 종류의 생물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까지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제하시고 주장하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하나님의 주권아래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함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 그러므로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3:14-18)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십자가에서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죽기를 무서워하는 우리에게 영생의 은혜르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믿음의 결국을
아는 사람은 고난이 와도 당연히 기쁨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구원일까?
이
구원에 대해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조금 더 살펴 보겠습니다. 어떤 구원일까요? 첫째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육신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번에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경험하면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덤프트럭으로 쓰레기 더미처럼 한 웅덩이에 몰아넣는 모습을 보며 다시 육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시신 가운데에는 부자도 있을 것이고 가난한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조금 덜 배운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낮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외모가 멋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의 기준에서 못생긴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젊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의 모습은
조금도 차별이 없었고 똑같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는 (전 9:2,3)
말씀이 제 폐부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저 모습이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란 말인가?”
저런 순간을 위해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며 살았단 말인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보라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다 변화되리니 …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맒이라” (고전 15:51-58)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모습은 영생에 들어가는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결국은 구원, 곧 영혼의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오늘 말씀 9절입니다. 천국이요 천국의 기업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믿으심으로 이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구약에 예언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갑자기 튀어나온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 예언되었고 예정되었던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본문
10절과 11절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7)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와 빈무덤의 사역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영생이 확정된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2-23) 이 영생이 여러분 것임을 확증하며 사망의 두려움을 넘어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구원입니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 3:16) 본문 13절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구원”입니다. 이 말씀은 이 구원, 즉 영생이 얼마나 소중한
최고의 축복인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천사도 부러워하는 구원입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영생입니다.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말대로 “무엇이 중헌디?” 하고 질문할 때입니다. 설의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정 말고 뭣이 중헌디?” “우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진짜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여전히 세상 논리와 풍조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중요하다니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급한 일이라고
하니까 급하다고 생각해서 쫓기고 군중속에서 함께 헛발질을 합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뭣이 중헌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기쁨과 확신속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 사랑과 믿음과 기쁨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림자처럼 다가오던 죽음을 동반한 박해와 고난을 뚫고 승리하게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 그 결국이 주는 구원의 감격과 확신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해 삶이 정상을 벗어나고 불안과 두려움을 몰고 와도 오히려 기쁨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성령님의 메시지입니다. 이 성령의 감동을 가지고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