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베드로 전서 1:13-16)
들어가는 말
여러분, “거룩”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세요?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의 길에 들어서면서 정말 듣기 거북스럽고 심지어 싫었던 단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거룩”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저는 거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용어 중 가장 부담스러운 단어를 꼽으라면 저는 오랫동안 “거룩”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거룩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뿐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족쇄와 같은 부당하고 지나친 요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사람에게 거룩이라는 단어는 정말 안맞는 옷같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정말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듣는 사람도 그렇고 전하는사람도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5-16) 본문 15절 16절입니다.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저는 차라리 “넌 죄인이야!”라고 말씀하시면 마음이 훨씬 더 편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본문을 설교하기 위해 제목을 “거룩은 성도의 특권입니다.”라고 정했습니다.
정말 특권일까?
제 감정과는 매우 다른 의미가 담긴 것같은 모순된 제목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거룩이 성도의 특권이라고 정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거룩에 대한 제 이해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거룩”이라는 단어가 성도의 특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도의 자유요 행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저처럼 잘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거룩”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셨던 분들을 위한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듣는 가운데 거룩이 성도의 특권이요 심지어는 행복이요 자유인 것을 깨닫고 거룩을 누리시는 단계까지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단순한 질문이지만 “거룩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거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글 국어에서 사용하는 사전적 의미는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의 개념은 “갈라놓다,
구분하다, 구별하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타나내는 단어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기본적인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선지자는 초자연적 존재인 천사 스랍의 말을 통해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표현합니다.
(사 6:3) 히브리어에서 세번 반복한다는 것은 최상급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언어의 강조기법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즉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야훼 하나님만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뒷바침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만 거룩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장이나 19장 20장에서 나타나는 불,
지진, 천둥과 번개,
큰 나팔소리,
연기 또는 구름 등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경험되는 현상들입니다.
때로는 자연을 파괴하시고 창조적 주권을 나타나심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성이 해쳐질 때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심판과 함께 경험됩니다.
사무엘 하 6장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웃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고정시키기 위해 손을 뻗어 붙잡았다가 죽고 맙니다.
(삼하 6:6-8) 조심성없이 전류를 만지면 감전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함에 조심성없이 접근했다가 위험을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신다고 생각했던 성전의 지성소도 역시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가야 하는 조심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거룩성을 해치는 행동을 하면 죽습니다.
안식일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거룩한 날입니다.
(출 20:8-11) 그래서 네번째 계명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반드시 이런 두려움과 심판으로 나타는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함은 두려움이요 공포 그 자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의 소망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대를 넘어 하나님의 거룩이 요구하는 공의의 심판이 자비와 용서로 바뀌어서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호세아서 11장 9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시며 힘들어 하시다가 공의의 심판보다는 오히려 자비를 행하시기로 하심으로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냅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심판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상황에서도 거꾸로 자비를 베푸시는 주권적 행위속에 나타납니다.
사랑의 추적을 통해 창녀 고멜을 되사오고 변함없이 사랑하며 결혼을 유지합니다.
이런 호세아의 모습을 통해 우상숭배에 빠져 이방신과 음행을 하고 불신앙으로 일관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증명하십니다.
택하신 백성을 향한 거룩한 사랑을 증명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은 공의이면서도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주어진 본문 베드로 전서에서 말씀하시는 거룩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적 차원에서의 거룩함에 대해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인간적 차원에서 거룩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한 인간들의 반응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사람의 반응은 거룩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응은 구약에서는 대략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제례 의식적으로 거룩해야 했습니다.
두번째는 사회 공의를 실천하는 면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했습니다.
셋째는 개인적 도덕성에 있어서 정결함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모셔진 공동체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측면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관계 때문에 세상과 구별된 백성이었기에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는 교인들을 거룩한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성품이 하나님을 반영해야 하고 삶의 내용이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도덕적인 행위를 절제하고 성령의 은사들을 잘 활용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영적 교훈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장차 주어질 은혜를 사모하라.
첫째는 미래에 얻고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의 내용이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아 새 생명을 얻은 성도들은 소망의 초점이 달라야 합니다.
믿음의 결국 즉 영혼의 구원을 얻은 성도의 삶은 미래의 소망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를 사는 방법과 내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소망이 달라지는 사건은 내면이 변화되어 새롭게 될 때 가능합니다.
그 사람의 속 사람이 진정한 그 사람입니다.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절) “마음의 허리를 동인다”는 말은 온전한 마음으로 정신차리고 생각과 마음을 고정시킨다는 말입니다.
“근신하여”라는 말은 자신을 잘 통제하고 절제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선택하고 구원하신 분에게 영혼의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 구원자는 바로 다시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사모하고 소망하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삶입니다.
그때 세상에 매이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우리는 모두 나그네입니다.
이곳에서의 삶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 나그네 삶을 가장 잘 사는 방법은 현재에 매이지 않고 도달해야 할 목적지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의 목적지는 본향인 천국입니다.
그 천국에 입성하는 순간은 바로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재림과 함께 완성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심과 함께 임할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삶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변화된 삶의 내용
두번 째는 변화된 삶으로 거룩을 실천해야 합니다. 본문은 구원받기 이전의 삶과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 분명한 구분을 가르쳐 줍니다.
14과 15절을 봅시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는 먼저 성도들에게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유대 문화에서 부모에 대한 순종이 몸에 배어 있는 자녀의 복된 모습을 비유로 삼는 것입니다.
변화된 내면과 그에서 비롯된 변화된 행동으로 실천되는 하나님에 대한 몸에 배인 순종을 말합니다.
이 순종은 조건적이거나 선택적인 아닌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났다”(삼상 15:22)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거룩은 순종으로 나타나지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나 숫양의 기름같은 마음이 담기지 않은 예물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거룩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삶의 변화입니다.
“전에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이방인의 삶의 내용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 마음과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현재의 자리나 현재의 소유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구원을 경험한 성도와 세상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요구에 모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모든 영역이 영적 전투의 현장입니다.
작은 것에도 타협하기 쉽고 적당히 하기 쉽습니다.
작은 이권이나 이익에도 세상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도 성도의 거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삶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
구별된 거룩한 삶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거룩한 삶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저는 예전에 거룩하면 은둔 수도사를 생각했습니다.
후드가 달린 수도복에 탁발을 한 깡마르고 날카로운 중세 수도사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의 생각이 바뀐 것은 진정한 거룩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입니다.
그후 거룩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한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거룩하셨던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가 아니셨습니다.
율법적 형식주의에 매여 있는 바리새인의 모습도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그 뜻에 자신을 기쁨으로순종하셨습니다.
억지로 거룩을 보이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그냥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정직하게 사셨습니다.
병자들에게는 치유자가 되셨고 죄인들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과부를 돌보시고 고아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고 사랑하는 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진정한 슬픔과 애정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먹고 마시며 모든 것을 보여주시고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가르치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초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게 그분의 거룩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거룩하신 삶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연스럽게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면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닮으라.
마지막 세번 째는 우리의 거룩의 본보기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5절과 16절입니다.
믿는 자의 성품이 구원 이전과 구원 후가 급진적으로 달라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영적 삶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존재가 거룩을 옷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는 거듭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듭남을 허락하신 분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그저 이것은 해도 되고 저것은 해서는 안되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목록을 실천하는 것 이상의 변화를 말합니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추한 거지가 존귀한 왕자가 된 것을 말합니다.
종노릇하던 시녀가 왕비가 된 것을 말합니다.
누더기가 벗겨지고 새옷을 입은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게 거룩의 성품입니다.
이런 삶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선택하신 분의 명예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왕자에게 선택되었으면 공주처럼 살아야 합니다.
소유주가 누구냐에 따라 값이 달라집니다.
예전에 시동도 걸리지 않는 낡은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의 전 소유주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100만불도 넘는 가격에 팔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그보다 더 가치있고 존귀한 존재로 만드신 이유가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죄인 되었던 우리를 조건없이 사랑하신 하나님처럼 우리도 누군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없는 사람을 용서하면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거룩입니다.
어떻게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세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장차 주어질 은혜를 소망하라고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시켜 주실 영원한 구원입니다.
영생이요 천국입니다.
두번째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면서 변화된 삶의 내용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일치를 이루고 세상이 소망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인 것을 결코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세번째로 그런 거룩한 삶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나를 내어 주고 희생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연약한 자들의 편에 서주는 것입니다.
삶의 초점이 내게서 이웃에게 옮겨진 것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의 초점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의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고 선포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수많은 기적과 이사가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시요 왕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이웃들에게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영원에 소망을 두는 것을 잊지 않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이런 삶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요구하지 않는 삶입니다.
요구할 수도 없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 누구도 살기가 쉽지 않은 삶입니다.
그래서 이런 삶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삶입니다.
특권이요 행복입니다.
구속같지만 참 자유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이런 거룩의 길에 들어서 특권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행복의 길에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우리의 삶의 본보기입니다.
온전한 순종의 본보기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8-9) 예수님을 닮은 거룩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거룩의 특권과 행복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와 주셔서 말씀대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한 주간의 삶이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은혜의 여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