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은 바로 여기에
(베드로전서 1:17-25)
들어가는
말
삶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우리를 절망시킵니다. 갑자기 변화된 형편이나 환경이 절망을
주기도 합니다. 하고자 하는 일이 꼬이고 인간관계가 깨어져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인생의 반전을 경험하며 낙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
온 발병소식이 그런 절망가운데 하나입니다. 졸지에 경험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감당하기 힘든 절망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쌓아온 사업체가 무너지고 평생을 다닌 직장에서 퇴직권고를 받을 때의 절망감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바르게 잘 자라리라고 믿었던 자녀가 탈선하는 모습을 경험하며 실망과 절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을 경험하며 절망합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의 원인도 다양하고 낙망의 늪지대도 많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의 어두운 순간에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슨 비결이 없을까요?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고 마땅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절망 중 많은 경우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런 절망을
피하거나 넘어서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합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움이 되는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절망에서 건져줄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변에 그런 능력있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 절망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능력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망에 빠진 우리 인생을 위한 처방은 없는 것일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비법이나 비책이 있으신지요? 여러분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어디에서
힘을 얻으십니까? 무엇을 붙잡고 그 낙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시나요? 저는 오늘 저희에게 주어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절망을 넘어 소망으로 일어서는 영적인 비책을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동안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심령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지고 영혼이 소생하는 능력체험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여러분들에게 꼭 확인시켜 드리고 싶은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다같이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반드시 소망은 있다!” “언제나 반드시 소망은
있다!” 기억하십시오. 소망하지 않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소망대신 절망을 붙잡기 때문에 낙망하는 것입니다. 소망의 근원을 잘못 찿기 때문에
소망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언제나 반드시 소망은 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이 순간 어떤 어려움이나 절망가운데 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절망 대신
소망을 선택하고 붙잡는 것입니다. 바른 소망을 선택하고 바른 소망을 붙잡으십시오. 옆에 계신 분에게 말씀하십시오. “바른 소망을 선택하고 바른 소망을 붙잡으십시오.”감사합니다. 소망은 언제나 있고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소망을 볼 줄 아는 영적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긍정과 믿음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소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직 소망만이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이시간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이런 소망을 볼 줄 아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눈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린
양같은 예수가 소망이다.
첫째는 “소망은 예수님께 있다.” 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소망은 예수님께 있다.” 믿는 자들의 소망의 근거는 자기 자신의 외적 모습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공로나 행위도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 예수가 소망의
근거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 바로 앞까지 믿음의 결국 즉 영혼의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인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거룩한 자로
살아야 한다고 격려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먼저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본문에서는 우리의 본질을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정곡을 찌르는 지적입니다.
첫째는 앞에서 이미 지적한대로 인생은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여행객이 가장 어리석을
때는 본인인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임시 체류자가 가장 현명할 때는 자기가 마지막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그곳은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하는 존재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이 말은 여러분과 제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심판을 면하거나 피해 갈수 없는 죄인의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11-12, 23) 우리 중에 누가 나는 죄가 없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죄인인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포합니다. (롬 6:23) 이렇게 죽음을 피할 길 없는 존재가 죽음
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본문 17절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 14:12)
이런 우리에게 과연 미래의 소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함께 18절과 19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18-19)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심판없이 아버지의 집으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니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는 해방시켰음이라” (롬 8:1-2)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노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이 말씀들속에 여러분과 저의 참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행실이 못된 죄인이지만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혈이 그 못된 행실을 감싸 안으셨기 때문입니다. 외모나 겉모습이 그럴듯
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그런 나를 당신의 피값으로 사셔서 자기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금과 은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값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실질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소망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1-21, 35, 39)
여러분 우리는 절망할 수 있습니다. 죄책감이 마음을 무겁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낙망의 늪에 허우적 거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모든 날들을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살아서도
소망이요 죽어서도 소망입니다. 현재도 소망이요 미래에도 소망입니다. 실패가운데에도 소망이요 질병가운데에도 소망입니다. 가난가운데에도 소망이요 어둠가운데에서도 소망입니다.
예수가 없는 자에게는 어둠이 절망이지만 예수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어둠속에서도 빛이요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어두움을 비치는 소망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두울수록
별들은 더 빛이 나듯 믿는 사람은 절망이 깊을수록 더 큰 소망의 빛을 봅니다. 바로 예수안에 소망의 근거를
두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과 절망가운데 계십니까? 예수님을 붙잡고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을 가지고 다시 도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앞을 향해 한 걸음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두 번째 소망의 근거는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 1:21) 믿음과 소망이 누구에게 있다구요?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여기에서 말하는
“그”는 누구지요? 예, 19절에 말한 “흠 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말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소망의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실 계획을 성부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 말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화육하신 그리스도,
나처럼 흙으로 돌아갈 몸을 입고 나를 향해 다가오신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육신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초림 사건은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증명합니다. “창세 전부터”라는 말은 영원한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변치 않은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더 놀라운 역사적 증거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셨다.” 고 말합니다. (벧전 1:21)
먼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소망의 근거입니다. 그 십자가 사랑의 사건으로 죄에서 용서받았습니다. 두번 째는 그 죽으신 예수를 무덤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바로 사망을 이기는 소망의 근거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였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0-21) 죽음의 절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오히려 소망속에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게 하는 것은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믿음과
소망에서 비롯됩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 1:21)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죽음조차 깨치시고 부활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잡고 소망 중에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하늘을 향해 쳐드시고
다리를 곧게 하고 앞을 향해 걸어가십시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고난의 길의 걷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라” (출 23:21)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소망의 근거를 세상에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도 두지 마십시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십시오.
그분만 보고 앞을 향해 절망의 광야를 당당하게 걸어가십시오. 그분이 앞서 가시며
보호하시고 안내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을 향해 예비하신 약속과 축복의 땅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광야같은 인생길에 소망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세 번째 절망 중에 소망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소망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감사합니다.
23절에서 25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23-25)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우리를 절망 중에 소망을 품게 합니다. 낙망한 영혼에 활력을 줍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경련을 일으키고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게 합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절망가운데 예수님께 말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것만은
절대로 고칠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말씀입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소망의 근거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떨어지자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그때 예수님은 그 아이를 고쳐 주십니다. (눅 9:23-24)
시편 107편 19절에 보면 병이 깊이 들어 사망의 문에 이르러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죽기 직전의
사람이 기도합니다. 그때 치료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고통 때문에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어떻게 고치셨다고요?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망중에 붙잡게 되는 소망의 근거는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증거합니다. (히 4:12)
이사야 선지자도 증거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사 55:11)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소망의 근거입니다. 절망중에 계십니까?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고난의 광야를 지나고 계십니까?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그 고난을 돌파하십니다. 삶이 혼돈스럽고 불안합니까?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과 소망 중에 굳게 서십시오. 우리의 소망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위에 있음을 기억하시고 말씀위에 축복의 집을 지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마지막으로 절망을 넘어 소망중에 살아가는 비결은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믿습니다. 믿으면 사랑합니다.
사랑하면 소망하고 기대합니다. 소망하면 사랑합니다. 사랑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사랑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사랑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3:13,2)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대속함을 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삶은 믿음과 소망의 삶이어야
할 뿐 아니라 사랑의 삶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과 소망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믿음과 소망을 완성시키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품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사랑할 것을 권고합니다.
바로 본문의 베드로의 권고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4:7-1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벧전 1:22) 아가서 8장 6절에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독생자를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발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사랑속에 나타났습니다. 성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반복해서 절망하고 불순종하는 나를 사랑으로 감동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이끄시는 사랑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랑으로 소중하게 감싸고
있는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고난과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 전체를
휩쓴 삼년간의 코비드가 수그러들자 전쟁과 자연재해가 인류를 혼돈과 불안속으로 빠뜨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불안해 하고 관계적으로 날카롭습니다. 모든 게 불확실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자기 인생 하나 챙기기에도 쉽지 않습니다. 그럴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기주의에 함몰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만 살아보겠다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절망과 고난에 봉착했다고 주변에 불평을 하거나 책임전가를 하는 싸움꾼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소망은 누구의 잘못인가를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미래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화목과 행복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 교회를 소망의 공동체로 만들어
봅시다. 사랑함으로 가정을 행복의 동산으로 만들어 봅시다. 사랑함으로
여러분들이 속해 있는 일터와 배움터를 축복의 터전으로 만들어 보십시다.
나가는 말
간단히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런 불안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망의 근거를
바른 곳에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영적 기준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첫째 모든 소망의 근거는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사신 예수 안에 있습니다. 둘째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무덤에서 부활시키신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셋째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안에 있습니다. 넷째 소망은 서로 사랑하는 우리들의 삶에 있습니다.
소망의 뿌리를 이 귀한 진리속에 깊이 내리시고 역경과 절망을 넘어 승리하고 복받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