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기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기

(베드로 전서 2:4-12)

 

들어가는 말


많은 사람들이 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두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요 부자였던 니고데모의 말처럼 어머니의 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 두 번째의 새 인생을 사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두가 압니다. 니고데모도 그것을 알았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삶을 원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삶은 어머니의 배에서 다시 태어는 육신의 삶이 아닙니다. 삶에 진정한 의미를 주고 뿌듯한 만족을 줄 수 있는 이생에서의 새로운 삶을 원한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가 채워줄 수 없는 영원과 연결된 그 무엇, α 포함된 새 삶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존재하는 목적이 분명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명확한 의미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때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시도합니다. 사는 장소를 바꾸어 보기도 하고 새로운 공부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직장을 옮겨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기도 합니다. 생각을 위해 여행을 떠나 보기도 하고 멋진 계획을 세워보기도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그냥 소망만 한다고 주어지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나 온 과거에 대한 뉘우침과 후회가 선행될 때 새 삶의 출발점이 시작됩니다. 자기의 기존의 삶에 대한 거룩한 불만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시작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책임감있게 그 기회를 활용하는 결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때 새 삶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지만 베드로 전서는 현재 고난을 당하거나 앞으로 고난을 당할지도 모르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베드로 전서가 쓰여질 당시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와 핍박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고난스러운 현실을 경험하면서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기에 그런 와중에도 믿음을 잃지 말고 오히려 세상에 소망의 빛을 전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아마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 중에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절망하고 계신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암흑처럼 앞이 안 보이는 터널에 갇힌 것 같은 삶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꼭 기억하십시오. 그 순간이 바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하나님의 때입니다.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소망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나라는 존재를 넘어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멋진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멋진 존재가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감동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삶은 새로운 정체성에서 출발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를 향해 기쁘게 헌신하고 감사가운데 기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주어진 이 새로운 정체성의 고귀한 가치를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새로운 신분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의 새로운 신분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주는 새로운 삶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더 멋지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        


오늘 말씀은 먼저 산 돌이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본문 4절에서 8절입니다. 4절과 5을 보면 사람에게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4-5) 예수님께서 산 돌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일종의 은유법 (metaphor) 입니다. 믿는 자들과 예수님이 얼마나 안전하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느지를 나타내는 암시적인 수사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표현하고 우리 믿는 사람들도 산 돌 같은 존재입니다. 3절의 산 돌은 영어로는 대문자로 시작되는 ”the Living Stone, 산 돌입니다. 그러나 5절의 산 돌같이의 산 돌은 “like living stones”은 소문자로 시작되고 복수형인 산 돌들처럼입니다. 예수님이 산 돌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토대라는 (The foundation of God building) 말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 올때마다 그분위에 그들의 삶의 집을 짖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보배인 것입니다. 새로운 내 삶이 지어지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보배이신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기의 방법으로 집을 짖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부류의 건축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6:46-49)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보배로운 산 돌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자기들의 인생의 집을 안전하고 튼튼하게 지을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만이 신령한 교회를 짖는 유일한 터전과 토대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만이 산 돌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라고 증거합니다. 6절입니다.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벧전 2:6)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란 믿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인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였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0-22)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은 동시에 구원을 주시는 능력의 이름이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보배로운 산 돌입니다. 인생의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앞에서 담대하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1-12)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보배로운 산 돌이요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성전의 부분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를 하나님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교회의 유일한 초석과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믿는 사람에게는 자기 인생의 보배로운 모통잇돌이 되지만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7절과 8절입니다. 믿고 순종할 때 믿는 자는 그 산 돌의 일부가 되어 인생의 집을 든든하게 지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이어지는 견고한 터를 닦게 됩니다. 그때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의미있고 충만한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여호와의 긍휼하심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 되지 아니함이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3:22-23) 매일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43:18-21) 이전 것을 기억하며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에 발목잡힌 어리석은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면 그분이 변화된 새 삶의 주인공이 되게 하십니다. 새로운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새 사람이 됩니다.


새로운 존재로서의 성도


베드로는 이어서 새로운 존재로서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 말합니다. 9절입니다. 모두 다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새로운 신분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근거입니다.


5절에서 산 돌들로 (living stones) 표현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네 가지의 다른 명칭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묘사합니다. 택하신 족속, a chosen people”, “왕같은 제사장들, a royal priesthood”, “거룩한 나라, a holy nation”, “그의 소유된 백성, God’s special possession” 바로 산돌이신 예수로 인해 성도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존재의 정체성이요 살아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먼저 신령한 집에 비유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거룩한 성전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에 비유합니다. 성전과 제사장은 모두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처럼, 그리고 제사장처럼 거룩한 존재들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룩한 나라라는 말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그뿐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들을 세상에 전할 축복의 유통자들임을 말합니다. 세상을 축복하고 유익하게 할 사명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홍보 대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말은 댓가를 지불하고 특별히 산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피값이 바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가치입니다. 독생자의 피값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소중한 신분입니다. 그런 놀라운 신분을 소요한 여러분과 저에게는 특권과 더불어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묵상할 마지막 주제입니다.


새로운 업무 설명서 (New Job description)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새로운 업무 설명서입니다 (new job description). 조금 더 고상하게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부르신 소명에 대한 사명 설명서입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9, 11-12) 이게 바로 산 돌같은 성도들의 업무 설명서입니다. 첫째 업무의 현장은 바로 세상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당시로 말하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는 어려운 환경입니다. 베드로 당시의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와 고난속에 믿음을 지키며 성도로 살았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던 당시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악행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핵심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는 바른 삶을 산 것이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어둠은 빛에 의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죄를 짓는 어둠의 사람들은 빛으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이 싫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순교까지 당하면서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당연시하던 황제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두번 째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으로 행해지는 몇 가지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믿는 사람끼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데 부부가 같이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것을 근친상간이라고 오해 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몰아붙히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을 인육을 먹는 악한 풍습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오늘 저희가 읽은 사명의 내용들이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분의 새로운 존재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어둠에서 용서와 영생의 빛 가운데 들어오게 된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 아니라 진노의 대상이더니 긍휼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이방인들에게 삶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아는 지식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저도 칭찬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행동에 의해 규정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고상한 사고나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인격과 믿음 규정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가 자기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껍질입니다. 행동하는 당신만 진정한 당신입니다. 세상은 당신이 얼마나 고상하고 우아한 생각을 가졌는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그럴듯한 말을 하는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의 행위로만 당신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세상이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기독교 교리가 아무리 출중해도 교회와 성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지고 교회를 규정하고 성도들을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마무리 그럴듯한 신분이 주어지고 새로운 정체성이 주어져도 그 신분과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오히려 거짓과 위선만 드러낼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만 가릴 뿐입니다. 본문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그것을 강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성도들아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행실을 선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진리와 사랑과 빛의 선포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이 지어가시는 거룩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1-33) 어떤 분들은 어려운 환경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한 가지 직시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환경이나 형편은 그 사람에게 핑계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음으로 그 환경과 형편을 뜛고 나가는 바른 신앙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여 줍니다. 그 사람이 그 환경과 형편을 걸림돌로 핑계대고 넘어지는 사람인지 아니면 계단으로 삼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류민이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갑니다. 때로는 불편할 수 있고 힘들 수 있습니다. 고생스러울수 있고 주변이 몰라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덕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방법 중 하나가 본문이 말하는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정욕이란 영어로 “sinful desires”입니다. 죄된 욕망 입니다. 이 죄된 욕망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물질 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품적인 것일 수도 있고 관계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예전에 추구하던 삶의 양식인 죄악된 욕망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옛 삶의 모습이 있듯이 새로운 미래의 삶도 있습니다. 과거의 삶이 부정정인 것일 수도 있고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과거는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주어진 것을 입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과거의 어리석음과 허망한 것을 버리고 의미있고 바른 것을 취해서 미래적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가야할 길입니다. 옛것을 벗고 버리기 전에는 새 것을 시작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새로운 출발입니다. 인생 전체를 통해 예수님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신분을 새롭게 하신 것에 대한 정체성이 분명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목적을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아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문제는 새로운 출발을 원하지만 새로운 출발이 주어져도 변하지 않는 게 문제일때가 많습니다. 내게 주신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에게는 새로운 신분은 주어졌습니다, 죄된 세상의 욕망과 정욕을 따르던 삶을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놀라운 보혈의 공로로 새로운 신분과 지위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저희를 도우사 그 변화된 존재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변화된 삶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성령의 감동을 따라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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