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시는 생명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시는 생명>
(사무엘상 26:13-25)

우리는 누군가에게 용서를 베풀거나 선을 행하면 언제까지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변하지 않는 것 같고 나는 은근히 이용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문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범죄를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에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할지니라" (마 18:21-22) 그리고는 일 만 달란트를 빛져서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종을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다." 라는 것입니다. (마 8:33) 원리는 맞지만 결코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사실 용서하지 않는 태도속에는 심판자의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내가 판결해서 어떻게 징벌할지도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세상 법정이 그와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그런 삶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도 상대방처럼 죄를 짓고 나도 그들처럼 누군가의 용서와 긍휼에 의지해 살아 가는 존재라는 겸손한 인정입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은 누군가를 향해 정죄의 자리에 서기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그 심판의 권세를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보호와 안전은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고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잠 20:22) 그러므로 악을 징벌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면 됩니다. 하너님은 악은 그 악이 악인을 해치고 선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누리고 차지하도록 하십니다. (시 37: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삶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순종이 참된 믿음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 오늘 내가 왕의 생명을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란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19, 24)

다윗은 위기 가운데 원수를 죽일 수 있었던 기회까지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사울이 변할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이 친히 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도 사울이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울 믿었습니다. 이런 분명한 믿음과 영적 기준이 있을 때 이런 결단과 행동이 가능합니다. 혹시 주변 사람들때문에 마음이 상하시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들때문에 불평과 불만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그분의 역사하심을 기대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정돈하시고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복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행복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정기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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