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My
words will come true at their appointed time.)
(누가복음
1:18-25, Luke 1:18-25)
2021년 11월 14일 (주일
설교)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은
다른 공관 복음서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소외 당한 사람들에게
두드러진 관심을 갖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들, 병자, 어린이들, 여자들,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사회,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또는 민족적으로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두번째 특징은 성령님에 대해서 언급이 자주 나타납니다. 지난 주에
묵상한 세례 요한의 잉태에 대한 기사를 보아도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라고 기록합니다. (1:15) 그리고 세 번째 중요한 특징은
구원사에 대한 관심입니다. 특별히 그 구원사를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 20절의
“때가 되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 구원사역의 주체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가복음은 구원의 시행자로서
오신 예수님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구원의 활동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출발부터 구원의 모든 과정에 성령님께서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주제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디옥 공동체 전체가 힘을 써야 하는 주제입니다. 기도에
대한 강조입니다. 누가복음은 기도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복음서
모두 기도에 대해 언급하지만 누가복음이 가장 조직적이고 상세하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기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임을 알면서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심지어는 기도가 부족해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뛰어나고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해 온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던
습관은 깊은 기도였습니다. 그만큼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기도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막상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도
사가랴의 기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해의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와 그의 부인
엘리사벳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결혼한지 오래 되었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나이가 점점 들어 이제는 생리적인 방법으로는 아기를 잉태할 수 없는 매우 늙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쉬지 않고 꾸준하게 기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낙망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분위기를 보면 기도는
했지만 응답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오랫 동안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는데다 자신들의
신체 나이를 고려할 때 아기를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기도를
경건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규칙적으로 꾸준하게 실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믿는 사람이면
당연히 기도하는 것이 의무이다라고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기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절대로 잘못된 태도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저 기도가 요식적 종교 행위의
한 가지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기도자체로만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인간의 소망과
간구가 담겨져 올려질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때 기도는 응답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으로 채워지는 실제적인
믿음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감하는 영적 소통의 장이 될 뿐아니라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응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 삶에 실재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생동감있는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하지만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면 많은 경우
응답에 대한 기대가 식어집니다. 그런 경우 의식적으로 기도하기는 하지만 큰 기대를 하는 것보다는 그저
자기 속마음을 털어 놓는 정도에 그칠 때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영적으로
보이고 모범적인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그런 경우는 있습니다. 아마 본문의 주인공 사가랴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앞의 장면을 보면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며 사역을 담당하고 있던 사가랴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기도를 듣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 제목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3) 그들이 가장 소망했던 기도 제목이 바로 자녀를 얻는 것이었던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고 드디어 자녀를
주시기로 한 것입니다. 게다가 태어날 아기의 이름도 지어주고 장래 무슨 일을 감당하게 될 지에 대해서도
예언해 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가랴가 의아해 합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는
반응입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내가 이것을 어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오늘 말씀 18절입니다. 사가랴의 이런 태도는 정말 예외입니다. 사가랴는 말씀으로 잘 교육받은
경건한 유대인입니다. 당연히 구약의 내용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노년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어졌던 이삭의 탄생에 대해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엘가나와 한나에게 주어졌던
사무엘의 탄생 이야기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제사장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자의 예언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도 잘 알고 성경의 기적들도 알고 있는데 자기 자신의 삶에 실제 적용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말씀과 현실의 격차가 너무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자기 자신과 아내의 처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현실을 고려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고 생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에게 즉시 믿는 게 오히려 너무 순진한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의 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 중에는 질문이 많으면 믿음이 없는 줄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질문도 질문 나름이고 그 질문을 왜 하는지 의도가 중요합니다. 질문하는 신앙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믿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질문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의심나면 묻고 모르면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주어졌지만 자신들의 신체적 상황을 생각해보니 확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응답이 주어졌는데도 응답자체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늙고 내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제 생각에는 불가능한 것을
말하시는 데 확신이 안섭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
주의 사자는 한 마디로 사가랴는 믿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하지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불신입니다. 신앙생활도
합니다. 종교 활동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주어지면 믿지 않습니다. 응답이 주어지면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그 응답을 차버립니다. 자기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져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고 자기 논리가 우선입니다. 기도는 늘 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났고 타성에 젖어 기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습관적으로 불신의 말이 툭 튀어 나옵니다.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하니
이런 불신의 태도는 우리에게 치루지 않아도 되는 믿음의
댓가를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불편한 과정을 통과하도록 합니다. 이런
불편한 과정은 신앙의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본문의 사가랴의 경우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이런 모습이 사가랴에게만
적용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 중 그 누구도
예외없이 경험하는 것은 의심의 문제입니다. 주어지는 말씀을 곧이 곧대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과 의심은 무신론자나 불신자만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잘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본문의 사가랴와 같은 경우를 경험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때때로 보이는 세계만 실재이고 전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믿음이 성장하고 영적인 안목이 깊어지면 보이는 물질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보이지 않는 세계가 내게 깊이
다가오면 보이는 세계와 다시 비교를 하면서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게 인간의 본질입니다. 내 삶에 영적
사건이 실재가 되어 내 삶을 지배하려고 하면 갑자기 믿음의 문을 닫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성과 이해의
한계를 벗어난 영적 사건이 일어나면 신기해서 놀라기는 하는 데 믿지는 못합니다. 믿으면 그동안 견지해
온 지성이 무너지고 비합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고 행동하는 무지한
사람처럼 보이는 게 싫게 느껴집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진리로 붙잡고 있는 말씀조차도 믿지 못하고 자기
논리에 어긋나면 의심합니다. 본문의 사가랴의 모습입니다.
우리 중
많은 경우 이에 해당합니다. 열심히 영적추구를 하다가도 막상 말씀이 현실 사건이 되어 그 사람의 삶에
침투하면 믿지를 못합니다. 불신의 함정에 빠집니다.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이 불신의 함정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와 핑계를 수없이 나열하지만
실제 문제의 핵심은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확하게 근거도 없는 얄팍한 지성적 회의주의적
태도가 그 중 하나입니다. 껍질뿐인 종교 생활을 신앙이라고 위로하고 살아가는 잘못된 태도때문입니다. 또는 신실한 신앙의 사람인데도 막상 영적인 세계가 자기의 현실이 되면 갑자기 믿음으로 접수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현실과 인간의 한계로 하나님의 세계를 재단하고 가둡니다. 본문의
사가랴의 모습입니다.
사가랴가
저와 여러분보다 믿음이 작아서 그랬을까요? 하나님 앞에 열심이 부족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말씀의 평가를 보십시오. 지난 주에 묵상한 누가 복음 1장 6절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레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더라”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인정입니까? 그런 사가랴가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았다”라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는 벙어리로 지내게 될 것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9개월을 벙어리로 불편한 삶을 살게 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기적이 주는 기쁨을 누리게 하지만 불신은 우리에게 불편을 줍니다. 때로는 고통을 줍니다. 안 거쳐도 되는 특수 신앙 훈련기간을 줍니다. 사가랴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못하는 벙어리로 살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립니다. 성전 사역을 마치고 나올 때가 되었는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혹시 죽은 것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여전히 방울소리는 들리고 매어 논 줄은 움직입니다. 얼마 후 사가랴가 성전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멀쩡하던 사가랴가 갑자기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금방 알아차립니다. “백성들이 그가 성전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22절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못하고 몸짓으로 의사표시를 합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성전에서 분향하고 제사를 드리던 백성들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벙어리가 된 사가랴는
직무의 날이 마쳐지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말을 못하는 벙어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가랴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율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해서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의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현실이 되어 다가올 때 우리는 이게 실재인가 하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멘! 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심합니다.
때가 되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을 이루심으로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제사장 사가랴는 지금 이 순간 망각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성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생명을 창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잊은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는 것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19절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사가랴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개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다가오셔서 말을 걸어 오시는 하나님,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저는 이 하나님으로
인해 큰 위로를 받습니다. 힘을 얻고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 앞에 살아 갈 때 누리는 축복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가 자기들이 믿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고행을 하며 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수도종교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허무한 인간의 몸짓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먼저 다가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말을 걸어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약속을 해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의 모습을 보시거나 행위때문에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누가 믿어 주니까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언약과 성취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사가랴의 의심과 불신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변개시키지 않습니다. 너처럼 확신 없는 사람에게 내가 무엇때문에 약속을 지키겠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 지리라” 20절입니다. 스가랴의 믿음의 실패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사가랴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가 믿어 주어서 하나님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누가 안 믿어 준다고 하나님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고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인간의 불신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지 못합니다. 확신하지 못하는
사가랴의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불신을 넘어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취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불신하는 사람은 고난의 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성취를 경험하게 됩니다. 곧바로 갈길을 돌아서
우회하며 고생과 불편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혹시 여러분 가운데 사가랴 같은 분 안 계십니까? 열심히 믿기는 믿는데 막상 하나님이 삶에 개입하시면 믿어지지 않아서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우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사역하시는 방법을 인간적인 지성이나 이성의 틀속에 가두고 제한하려하는 불신을 범하지 않으십니까? 자신의 모습이나 인간적인 기준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므로 복을 지연시키고 고난을 자초하지는 않으십니까?
주께서 돌아보시는 날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마지막 두 절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기록합니다. 사가랴가 지사장의 직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이가 많안 잉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엘리사벳이 잉태한 것입니다.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24-25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엘리사벳이 아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누가 믿어 준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안 믿는다고 안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잉태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9눅 1:17)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구속사의 서곡입니다. 동시에 오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성취의 전주곡입니다. 인간적으로 소망이 없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약속의 성취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듯이 영적 흑암에 잠겨있던 이스라엘이
구원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지식으로만
알고 종교적 의식으로 행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말씀이 구체적으로 내 삶가운데 구현되고 실현되는 현장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현장입니다. 아기를 잉태하고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간증하고 찬송하는
엘리사벳처럼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고 잊어버리고 기대하지 않는 반쪽짜리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체험할때 역동성이 살아나고 찬양과 고백이 진정으로 올려집니다. 여러분 어떻게 믿으십니까?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면 개인의 삶 가운데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나가는 말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믿음을 더 이상 이성의 영역에 가두지 마십시오, 내 인간적 한계로 제한 하지 마십시오. 의심하고 불신하므로 축복의
지름길을 불편하게 걸어가지 마십시오. 치루지 않아도 되는 고난과 연단의 과정을 믿음으로 건너 뛰시기를
바랍니다. 하니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틀림없이 들으시고 그분의 때에 맞추어 반드시 응답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응답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믿음의 열정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믿고 “아멘!” 함으로 불가능을 넘어 응답의 기적과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위대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시는 한 주를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