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감사의 믿음

구원에 이르는 감사의 믿음

(누가복음 17:11-19)

2015 12 27(주일 설교)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 있었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하시는 데 그 길을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접경지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경계선을 타고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본문과 같은 동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때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을 선발대로 보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곳은 시온이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성산인 그리심산을 향해 올라가셨으면 환영을 받을 텐데 사마리아 사람들과 신앙적 경쟁관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게 못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접을 안 했습니다. 누가 복음 10 53절에 기록입니다. 그러자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9:54)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입니다.

 

이게 사마리아와 그곳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 마음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수가성의 우물가에서는 수치스러운 과거로 매우 절망적이고 복잡한 삶을 살아가던 사마리아여인을 전도하시고 영혼을 치유하셔서 사회로 온전하게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본 마음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은 사랑과 긍휼입니다. 죄인을 향한 용서요, 불행한 자를 향한 행복의 회복입니다. 가난한 자를 향한 부요요, 병든 자들을 향한 치유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향한 위로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두 다 천하보다 귀중한 영혼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우습게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오히려 사랑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누가 복음 10 25절에서 3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과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인지를 멋진 드라마처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정통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잘난 척하고 영적 교만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은근히 꾸짖으시며 큰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좋으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첫째, 외쳐 부르짖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첫 번째 교훈은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외쳐 부르짖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족입니다. 그래서 순수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개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역사에 대해 자존심이 강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전 세계 사마리아인의 총 인구가 1,000명도 안됩니다. 하지만 이들의Pride는 대단합니다. 저도 만나보았습니다. 이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Nabulus Holon이라는 곳에 살면서 자기들만의 고유한 형태로 신앙을 사수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의 모세오경이 있고 십계명도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자기들을 스스로 히브리어로 "Benei Yisrael, Children of Israel"이라고 부릅니다. 또는 히브리어로 "Shamerim," "Observant Ones, 율법을 준수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영적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것이지요. 이들의 종족에 대해서는 현재에도 논쟁 중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랍족속의 일부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의 일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접경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십자가를 향해 전진을 멈추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예언하신 것처럼 변함 없이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을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상상도 못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완수를 위해 꾸준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를 가시다가 예수님 일행이 한 마을을 만나 그리로 들어서려고 할 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을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서서 예수님 일행을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열 명이나 되는 나병환자들이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당시 나병환자들은 마을에 살수가 없었습니다. 격리되어 혼자 살거나 환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살았습니다. 아마 이들도 그렇게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병에서 고침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자유롭게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마 이들에게도 예수님의 소식은 들렸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지금의 여정이 예수님의 마지막 길이라면 지난 3년간 팔레스타인 지역을 뒤흔들던 예수님의 기적과 이사의 소식을 당연히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나병환자들은 갈릴리에도 사마리아에서도 속하지 못하고 두 곳에서 다 배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접경지대에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들이지요.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이 이방인을 지적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마 이 열 명의 나병환자 무리 중에는 유대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지식인이나 무학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나 어른을 구별해서 대하지 않습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불행은 언제고 예고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나면서부터 나병병자였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영업을 하는 사업가도 있었을 것입니다. 농부도 있고 일당을 벌어 하루하루 먹고 사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자 무식쟁이도 있었을 것이고 많이 배운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그들은 나병환자들입니다. 모두 평등합니다. 인간은 궁극의 문제들 앞에서는 언제나 이렇게 평등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모두가 평등합니다. 발가벗고 손에 아무것도 가기지 않고 학위도, 권세도, 재물도 가지지 않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약간의 불평등을 경험합니다. 얼마간일 뿐입니다. 그러나40세가 되면 문화가 평등해진다고 합니다. 다 흘러간 옛 노래가 좋아지고 고린내가 나는 토종음식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50세가 되면 얼굴이 평등해집니다. 그 나이가 되면 미인이고 추녀고 다 그게 그겁니다. 60세가 되면 성이 평등해집니다. 남자가 여자 같고 여자가 남자 비슷하게 됩니다. 70세가 되면 건강이 평등해 집니다. 누구나 한 두 가지 병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80세가 되면 죽음 앞에 모두 평등해 지기 시작합니다. 이들 나병 환자 열 명이 과거가 어떠했든지 관계없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 앞에 평등 해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 앞에 겸손해 질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를 수 있습니다. 이때 소리치며 간구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현실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몸은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어도 소망은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게 바로 기도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어떤 문제가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에서 행복을 빼앗아갔습니까?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삶의 절망 가운데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외치십시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을 향해 외치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본문의 나병 환자들은 율법의 규정 때문에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인생입니다. 가진 것도 없어서 드릴 것도 하나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만남은 중요합니다. 가장 큰 복 중 하나입니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로 특별한 만남을 이들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삶의 접경지대에서 고난과 절망의 나날을 보낼 때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그들의 삶에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기도를 통해 인생이 통째로 바뀝니다. 여러분, 기도 제목들이 있으시지요? 그 문제를 예수님께 부르짖으며 올려드리십시오. 문제를 경험하는 그때가 바로 예수님을 깊이 경험적으로 만날 때입니다. 설사 멀리서라도 그 분께 외치십시오. 예수님의 긍휼을 사모하십시오. 그 분의 응답을 기대하십시오. 주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주목했는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주목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이제 그들이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를 주님의 관심사로 바꾸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던 문제를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의 처방이 내려졌습니다. 누가 복음5장에 나타나는 것처럼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5:5:13)하시고 만져 주시거나 안수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시며 말씀만 하신 것입니다. 고침을 받으라고 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를 갖고 계신 분인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신 것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합니다. 고침을 받았으니 점검을 받고 사회로 복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낳은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당연히 고침 받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논리와 과학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정황과 사회질서도 그대로 인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율법의 요구를 온전하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율법이 요구하는 과정을 통과하게 함으로 그들을 삶의 현장으로 복귀시키시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이 나병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레위기 13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서 점검을 받으려면 병이 나았다는 외적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상처에서 고름이 말랐다거나 하얗던 피부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 왔어야 합니다. 문드러진 코가 다시 재생되거나 빠진 눈썹이 다시 났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그 순간 그들은 여전히 나병환자였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고쳐져야 일어나지요? 그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일어나니까 고쳐진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어서 갖다 주는 게 아닙니다. 물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갖다 주는 겁니다. 그러면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지라."그들은 낳아서 간 것이 아니라 믿고 가다가 낳음을 입은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다 보니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비밀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적을 보여라 그러면 믿겠다. 그럽니다. 하지만 믿음의 법칙은 그게 아닙니다. 순종하다 보니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나타나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으로 기적을 체험하시는 기적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순종하되 철저히 순종하십시오.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되 즉시 순종하십시오. 조건을 달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순종의 과정가운데 기적이 나타납니다.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감사는 믿음의 꽃입니다.

여러분, 이 열 명의 나병환자가 제사장에게 가고 있는 데 몇 얼마를 가다 보니 몸이 이상합니다. 말을 안 듣던 손가락이 움직여지는 겁니다. 몸에는 고름이 나고 가렵고 아팠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정상이 된 것입니다. 상대를 바라보니 하얗던 피부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점차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그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그들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감격도 그런 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나 눈물겹도록 기뻤을까요? 충격과 함께 믿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서로 만져보고 꼬집어보고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자기 옷을 들어 속살을 살펴보고 상처부위를 점검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급해졌겠지요. 빨리 제사장에게 가서 낳은 몸을 보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병만 낳으면 꼭 해야지 하던 것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제사장에게 검진을 받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유독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15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낳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오직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단 한 사람입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최고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최고봉은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마음과 영혼이 건강합니다. 믿음이 건강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사라진 사람은 영혼이 건강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병든 것입니다. 행복을 상실한 모습입니다. 고립된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린 고침 받은 나병환자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발걸음을 돌려 예수님께 돌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감사를 드립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이 당연한 것을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의 불치병을 간단하게 고쳐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 무엇으로 감사할까를 생각하며 평생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반감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에게 상처입고 마음 문이 닫히게 되는 것 아닙니까? 도와줘 봤자 다 쓸데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처럼 감사하는 사람이 적은 것이 세상입니다. 얼마 전에 은퇴하신 홍정길목사님이 목사 안수 받을 때 장로님이신 자기 아버지께서 당부하셨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간단했습니다. "목사는 어디 가나 작거나 크거나 대접을 받을 위치에 있게 된다. 작은 것에도 감사를 잊지 말아라. 그리고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을 하거라." 무슨 대단한 훈시가 아니었습니다. 목회 성공비결이 아니었습니다. 감사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감사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고침 받은 나병환자들,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 그가 돌아왔습니다. 감사하기 위하여 돌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주목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이 사마리아인 이었습니다. 16절을 보면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세상적인 시각에서는 사람취급 못 받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사람 노릇 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야고보 사도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네 믿음을 보이리라."(2:18)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론이 설득력이 없습니다. 논리가 다 말 장난이 됩니다.

 

나머지 아홉 명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18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면 아마 그 중에 상당 수가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러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지적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대인이면 뭐합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고 선민이면 무엇 합니까? 성도이면 뭐합니까? 마땅히 행해야 할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는 이방인만도 못한 것 아닙니까?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혼혈족인 사마리아 사람이고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똑같습니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모두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똑같이 귀한 긍휼과 은혜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 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 반응이 그들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인격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야 합니다. 적용을 해야 합니다. 나는 진실로 은혜를 아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 성령님의 은혜, 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까?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인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한이 없는 은혜를 아십니까? 무가치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 주시면서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희생의 은혜를 아십니까? 지치고 쓰러져서 소망이 없는 인생길에서 매 순간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아십니까? 상처를 치유하시고 상한 마음을 회복시키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입으로 기도제목을 말하기도 전에 내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이 은혜를 깊이 인식할 때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그때 자기 욕심을 따라 달려가던 발걸음이 멈추어집니다. 스스로 자격이 있어서 그런 삶을 살고 그런 특권을 받아 누린다고 생각하던 교만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영혼의 깊은 곳에서 감사의 샘물이 터집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이런 감사의 순간부터 인생에 환희가 시작됩니다. 삶이 즐거워지고 주변이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겸손하지만 당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진정한 찬양이 나오고 진정한 경배가 시작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고침을 받은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에게 감사하기 위해 돌아 온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감사가 느껴진 것입니다. 그때 지체하지 않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 동안 그토록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하던 가족에게 속히 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현장을 향해 발걸음을 돌립니다.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가 진실했던지 몸을 던지듯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감격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기대하지 않은 대상에게서 기대하지 않은 놀라운 행동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대한 사람에게는 기대한 행동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개 같은 이방인이 무슨 은혜를 알고 무슨 감사를 알까? 그 훌륭한 유대인이 어찌 은혜와 감사를 모르리요? 이런 생각은 인간적인 판단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인간관계가운데에도 이런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이 순간 가장 감격하고 기뻐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과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묻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절입니다. 사라진 아홉 명의 고침 받은 사람들, 여러분,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이 지금 그들의 행방을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있는 곳을 모르셔서 묻는 것일까요? 감사를 모르는 그들을 섭섭하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은혜를 아는 아름다운 삶이 없는 그들의 불행한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 혹시 여러분도 주님이 그렇게 안타깝게 찾는 분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의 누군가가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지? 하고 묻는 대상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유대인처럼 오래 믿은 분들 조심하십시오. 자칫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은혜를 모르고 감사를 모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래된 관계에 더 조심하십시오. 친하다 보니까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은혜도 감사도 잊은 채 상대를 섭섭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 아홉 명중에 숨어서 사라진 나의 모습을 찾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존재일수 있음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감사를 잃지 마십시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자칫 다음에 받을 더 큰 은혜를 놓치는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9절을 보십시오.

 

넷째,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읍시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는 예수님의 축복이 선포됩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게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법칙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은혜를 아는 자에게 더 큰 은혜가 임합니다. 문둥병에서의 치유를 넘어 영적 구원이 선포됩니다. 전인적 치유와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고 조금 늦게 가족에게 가는 것인데 세상말로 대박이 터진 것입니다. 감사는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 뿐 아니라 아름답게 만듭니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가 바로 그 사람의 교양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저는 본문을 보면서 감히 선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에게 감사를 한다는 것은 그 분이 모든 좋은 것의 공급자요 수여자가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모든 것의 지탱자가 되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피조물이고 그 분은 창조주이신 것을 고백하는 구체적 행위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게 하는 예배행위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감사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 영혼을 다시 더 큰 복으로 채우시고 더 큰 은혜로 부으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감사하는 사람들은 늘 더 좋은 것을 받아 누립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아름답고 오래 지속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단 한 가지 유일한 선물입니다. 감사가 형통의 통로요 감사가 하나님과 나를 묶는 아름다운 황금의 허리띠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감사를 통해 자라가고 감사를 통해 완성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의 감사를 받으시고 그것을 더 큰 축복을 내리시는 그릇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가는 말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문제를 기도로 주님께 말씀하십시오. 예수님의 긍휼을 사모하십시오. 그분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외쳐서 부르짖으며 호소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단순하게 순종하십시오. 즉시 순종하십시오. 내 생각이나 논리를 내려놓고 조건을 달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셋째 은혜를 체험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만사를 제쳐놓고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 뒤로 미루지 말고 즉시 감사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감사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십니다. 더 큰 축복을 주시는 행복한 핑계로 삼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매일 매일 감사가 넘쳐서 더 큰 복을 받아 누리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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