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시민으로 삽시다.

신실한 시민으로 삽시다.

(베드로전서 2:11-17)

들어가는 말


나는 좋은 시민인가? 여러분, 이런 질문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좋은 시민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 무두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의 시민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시민권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입니다. 여러분들과 저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시민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은 현재적으로 소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그곳에 도달하지 않은 채 이 세상이라는 사회에서 지상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천국의 시민권이 궁극의 시민권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베드로가 반복해서 지적하듯이 나그네요 거류민입니다. 임시 체류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쓰여진 시기는 당시 사람들이 시민에 대한 개념이 비교적 잘 정립된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원래 시민권이라는 개념은 도시국가였던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의 교육은 좋은 시민을 길러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 전서가 쓰일 때에는 종과 상전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노예와 자유민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시민권은 자유민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예나 자유민 모두 시민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민권자들은 특권의 소유자들이었고 종들에게는 시미권을 갖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당시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자유민들에게는 교육철학 자체가 시민으로서의 가치관, 지적 기반 구조 (intellectual frameworks), 마음의 습관등을 형성시켜 주도록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신실한 시민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가 분명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배경에서 이해를 하고 적용을 하면 도움이 됩니다. 본문을 더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세 주제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제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라.


          첫번째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사회에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과 믿는 자들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산 돌이며 동시에 모퉁잇돌과 머릿돌이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신령한 하나님의 집을 구성하는 산 돌 같은 존재입니다. 택하신 족속입니다. 왕같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거룩한 나라요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었습니다. 그렇게 새 신분에 대해 말한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놀라운 새 신분을 주신 이유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어두운 그늘에서 건져 내어 기이한 구원의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구원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구원 이후의 삶도 매우 중요한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고 영광 돌리는 구원 받는 성도의 실제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합니다. 그 삶의 실천장이 어디인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살아가는 현실가운데 실제적인 행동양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불신자들 사회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에 대해 교훈합니다.


          베드로는 먼저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하는 이라는 단어는 신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αγαπη에서 파생됐습니다. 단순한 자연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안에서 공통으로 겪은 신적 사랑으로 인해 관계가 묶인 상호간의 깊은 이타적인 사랑을 포함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호칭을 사용함으로 이미 성도들속에 역사하고 있는 타인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애정과 깊은 격려가 담긴 베드로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그후 베드로는 그 성도들의 현재적 삶의 현주소와 본질을 깨우쳐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도들은 거류민과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살아가는 거류민과 나그네의 삶은 도덕적 의무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위치를 말합니다. 임시 거주자처럼 살아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의무가 요구됩니다. 지켜야 하는 법이 있고 순종해야 하는 권위가 있습니다. 호주에서 살아가는 모든 임시 체류자들과 같습니다. 호주의 국법을 지켜야 하고 사회의 규범을 준수해야 합니다. 세금도 내야 하고 교통법규도 지켜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빛으로 들어온 자들로서의 자기가 속한 사회에 살아가면서 드러내야 하는 도덕적 구별을 의미합니다. 예전에 자연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행위와는 다른 삶의 양태를 말합니다. 바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과는 대조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제적 영적 전투의 현장은 로마사회라는 외적인 현실보다는 자신들속에 깊이 역사하고 있는 죄성에서 비롯되는 잘못된 욕망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영적 전투가 없는 성도의 삶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합니다. (벧전 2:11)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기 전에 추구하던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등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옛 삶의 모습은 반복적이며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계속적 경계가 필요하고 계속적 투쟁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로마 제국에 살아가던 임시 거주자들이 로마가 요구하던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에 거류민이요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의 구별된 삶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모습은 단지 자신들에게 영적 유익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악행을 한다고 비방하던 자들에게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매일 매일의 삶의 행위가 예수믿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평판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믿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날마다 자신을 경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젊은이가 무디 목사님을 찾아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세상을 포기해야 됩니까?” 이에 무디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젊은이가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 자네가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네를 포기할 걸세육체의 정욕을 철저하게 다스리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디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말썽 꾸러기는 바로 무디라는 사람입니다.” 바로 자신이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최고의 방해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외부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는 내부와의 싸움입니다. 성도에게는 사회 자체가 주는 구조적 어려움이나 상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에서 잠재해 있는 상처나 좋지 못한 삶의 인상으로 인해 이웃 사람들이 실족하지나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는지 두려움을 가지고 행동을 주의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저의 삶의 행위를 보고 우리 주변 사람들이 놀라기를 바랍니다. 부정적인 놀람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악행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예수 믿고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런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고 싶다고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위의 권위와 제도에 순복하라.


          두번째는 주제는 위에 있는 권위와 제도에 순복하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 중에 보여야 하는 선행 중에 하나로 위에 있는 권위와 제도에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 먼저 시민 정부의 권세에 순복하라고 말합니다. 국가와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말입니다. 사회와 그 사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벧전 2:13-14) 베드로가 이 말씀을 기록할 때의 상황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상황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단지 이방인들이 지도층에 자리잡고 권세를 부리며 다스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이방 종교가 당연히 포함된 영적 갈등과 전투가 포함된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충성의 대상이 국가나 국가권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오해를 살 소지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미 존재하는 국가권력이나 기존 사회체계와 균형을 이루고 사는 게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매우 힘들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가 지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이 말씀을 기록할 때는 가장 악명높은 네로 황제 치하였습니다. 그런 박해와 위협속에 믿음의 길을 걷는 성도들에게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상황속에서 아무것이나 순종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는 시민으로서 국가권력이나 제도에 순종하지 않은 예가 많이 기록됩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 1장을 보면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라가 애굽왕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고 히브리 아기들을 살립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애굽 왕이)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1:16-17) 가장 높은 상위 법인 하나님의 법을 두려워 하여 국가법인 왕의 명령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을 보면 느부갓나셀 왕이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악기소리에 맞추어 절하게 합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풀무불 가운데 던져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털끝 하나 상하지 않게 보호하시고 마침내 그들을 더욱 높은 지위에 앉히십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를 허락하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순교를 각오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사자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시고 더욱 높여 주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행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6:10) 오늘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로 행동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서서 심문을 받습니다. 그때 예수 복음을 증거하자 그들을 (베드로와 요한)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협박합니다. (4:18)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히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4:19-20) 이렇게 믿음의 본질을 흔들때는 세속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믿음의 본질을 따르는 게 맞습니다.


          한국 초대 교회때 위대한 믿음의 순교자 중 한 분이신 이기선 목사님의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북한 의주의 북하동 교회에서 시무하셨습니다.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교회를 사임하십니다. 그리고 신사참배 불참운동의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활동을 합니다. 결국에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됩니다. 일본 형사가 말합니다. “불교나 유교나 국가를 사랑하는 의미에서 각자의 의식대로 신사참배를 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반대하느냐?”며 회유를 했습니다. 이에 목사님이 대답하십니다. “기독교 의식대로 한다면 나도 하겠소.” 일본 형사의 안내를 받아 신사 앞에 선 이기선 목사님이 찬송을 하고 일본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후 다 마쳤으니 갑시다.” 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형사가 말합니다. “절을 해야지요.” “기독교 식으로 하라더니 절을 해요? 절은 기독교 의식이 아니니 나는 못합니다.” 이에 형사가 쏘아 보며 말합니다. “천황이 예수를 믿지 말라 믿으면 죽이겠다 면 어쩌겠소.” 이목사님이 말합니다. “할 수 있나요. 천국법도 지키고 국법도 지켜야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으니 예수님을 믿고, 천황이 죽으라 했으니 죽으면 되지요.”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모든 권위에 순복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오늘 본문도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왕을 존대하라.”17절입니다.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으나 균형있게 양립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앙을 핑계삼아 국방의 의무를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더 국법에 충실하게 지키며 자기에게 맡겨진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벧전 2:15)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이라는 것은 성도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영적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비난이나 비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기선목사님처럼 지혜를 사용하므로 선을 통해 그들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애굽 왕 앞에 선 산파들 부아나 십브라, 바벨론의 왕 앞에선 다니엘이나 세 친구들, 공회 앞에 선 베드로처럼 선을 행함으로 그들의 무지를 다루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제가 이렇게 균형잡히고 확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세번째는 형제를 사랑하라입니다. 베드로 당시에는 말씀 드린 대로 상전도 있었지만 노예도 있었습니다. 노예들의 열망은 자유입니다. 이에 비유를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사망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제 새로운 삶의 형태가 요구됩니다.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6-17) 그리스도인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를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악을 행하면서 핑계로 삼을 수 있는 방종의 도구가 아닙니다. 세도를 부리고 자기 유익만 주장하고 옹호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벌적으로 섬기는 봉사의 자유입니다. 죄악의 쾌락을 누리는 것을 자유로 잘못 알고 엉뚱하게 사용하면 그것은 스스로를 다시 죄와 사망의 노예로 만드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에서 의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권위에 순복하고 선행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선을 행할 때 오히려 자유를 누리는 게 자유의 참 실상입니다. 미워하면 증오의 오랏줄에 묶인 부자유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지만 용서하고 사랑하면 마음과 영혼에 거리낌이 없는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나누고 섬기면 영혼이 자유하고 행복탱크가 충전되지만 축적하고 치부하면 그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성도는 자유인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할 뿐 아니라 세상적 삶의 방식에서도 자유한 존재입니다. 주변 모든 사람을 존중히 여기고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자유를 구가합니다.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 영혼은 자유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허락하신 권세와 왕들을 마땅히 존대할 때 신실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모두가 좋아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시민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벗어나 살아가는 별종들이 아닙니다. 이방인이나 불신자들과 동일하게 같은 시간과 같은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세상의 시민이요 백성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늘에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일종의 이중 국적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이중적 신분의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현실의 삶 가운데 신실한 시민으로 실제적인 삶을 살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세상에서도 좋은 시민의 특성들이 있습니다. 그 사회와 국가가 요구하는 좋은 시민의 자격들이 있습니다. 국민이나 시민에게는 권리가 주어지지만 책임과 의무가 주어집니다. 이런 의무와 책임을 잘 배우고 익히고 실천한 사람이 그 사회에 공헌을 하게 되고 더 바람직하고 진보된 사회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는 좋은 국민이나 시민은 애국적입니다. 자기 나라와 사회에 헌신합니다. 예를 들면 세금을 잘 내고 법질서를 잘 지킵니다. 자기가 속한 사회를 사랑하고 그 사회를 위해 헌신합니다. 둘째는 그 사회에 긍정적인 열매를 생산해 줍니다. 자기의 기술과 재능, 능력과 사랑을 바칩니다. 그 사회에 공헌하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소비자로서만이 아니라 기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동적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 활동자로 참여합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을 닮은 산 돌 같은 제자들은 삶이 세상에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세상은 그들을 통해 소망을 발견합니다. 교회를 비난하고 기독교 진리를 멸시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시각에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선행으로 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입니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까? 내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기여하고 공헌하는 삶입니까?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존경과 사랑이 자연스럽게 표현됩니까? 세상을 살아갈 때 나 중심으로 나 편한 대로만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무슨 등불이 되며 무슨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쉬운 길 저항없는 길만 간다면 무슨 긍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겠습니까? 축복 받고 자기 욕심 채우는 게 믿음의 결국이라면 우상숭배하는 것이나 서낭당에서 복비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지금 살아가는 사회속에서 신실한 시민으로 살아가지 않겠느냐? 그때 복음의 참된 가치는 드러나고 세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을 그런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성령께서 도우셔서 말씀대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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