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안에서 과거를 청산하라

하나님 안에서 과거를 청산하자.

(Making Peace with Your Past in God.)

(빌립보서 3:13-15; 이사야서 43:18-19)

 

들어가는 말

 

우리는 누구나 지우고 싶은 인생의 어떤 부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잊혀진 이야기가 되어 기억의 골방에 잠자고 있지만 어느 순간 다시 먼지를 내며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라는 괴물이 현재의 나를 괴롭히고 밝은 미래로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릴 때의 상처일수도 있고 사춘기 때 경험한 열등감의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받은 학대일 수도 있고 동료들로부터 받았던 따돌림의 경험일수도 있습니다. 실연의 아픔일 수도 있고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대학 진학에서의 좌절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경험한 실수의 추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우리 중 누구도 이러한 과거의 상처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쓴 <당신을 알고부터 그렇게 행복할 수 없어요.>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극한 고통과 슬픔을 직접 체험한 작가가 인간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성숙한 마음이 잘 배어있는 책입니다. 전도용으로 아주 좋은 책입니다. 미우라 아야꼬의 친구의 아들이 어느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부모들은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화려한 의상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밤, 이 아들이 애인과 드라이브를 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차 속에서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거리의 전등 빛도 멀리 보이는 언덕이었습니다. 갑자기 두 사람이 탄 자동차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삼인조 강도들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 남자 청년은 어디를 어떻게 달려 도망쳤는지 모를 정도로 애인을 버리고 언덕 아래로 정신 없이 도망쳤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노이로제에 시달렸습니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생명조차도 아깝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 큰 기쁨과 삶의 보람도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강도들을 만나 그들의 무기를 눈으로 보는 순간 그 청년은 그녀를 버리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비겁하고 불성실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혐오에 빠졌습니다. 물론 그의 사랑도 물거품이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는 시시 때때로 되살아나는 비겁하고 용렬한 자기의 모습 때문에 괴로워하는 청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자들 앞에 설 때 마다 그 때 일이 생각이 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가 그의 영혼을 묶고 현재의 행복을 파괴하고 미래로의 비상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 청년을 비겁하다고 비웃고 불성실하다고 꾸짖을 수 있을까요?

 

각자 다른 모습의 경험들일 수 있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은밀한 과거의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잔해들이 여러분들의 앞길을 방해하고 전진을 가로막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이런 과거와 화해하고 치유를 경험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칫 이 과거를 마치 현재의 문제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사탄의 계략에 속으며 우울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뿌리를 과거에서 찾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인으로서 현재 경험하는 문제의 뿌리는 실상 과거의 열매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이라는 현재 속에 살아 있다. The past is not the past: it lives on in memory.” 현재의 여러분들의 모습, 여러분들의 행동 양식, 언어 표현,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한 반응과 감정적 느낌, 이런 것들은 여러분들의 과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해로운 경험들은 여러분들에게 부정적인 언어와 행동의 습관을 만들어 냅니다. 그 습관들은 여러분들의 삶 전체와 인간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과거의 성취와 성공도 현재의 성장과 미래를 향한 비상에 장애가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 측면이 많지만 자칫 과거의 성공과 성취는 미래로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아도취와 교만이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과거의 성취나 성공보다는 실패와 상실, 상처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고 영혼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는 과거의 상처들과 아픔들을 뒤돌아보며 영적 성장의 계기를 삼고, 하나님의 자유 하게 하시는 은혜와 권세를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깊이 용서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하고 인간관계가 새로워지는 신선한 성숙의 문에 들어서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숙; 평생탐구의 여정

 

먼저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의 영적 성장이나 성숙은 어떤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이나 성숙은 평생의 탐구의 여정입니다. 성숙이라는 것은 목표나 목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여행과 같은 것이고 과정인 것입니다. 변화의 한 과정 한 과정에서 거두게 되는 것이 성숙입니다. 그래서 영적 성숙에는 끝이 없고 졸업이 없습니다. 세월이 간다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매 순간 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에 그 때 그 때 단순하게 자신을 맡길 때 나타나는 작은 성장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한번 듣고 변화가 되거나 금식 며칠 하고 기도 한번 세게 한다고 해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성숙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나이가 먹음에 따라 성숙보다는 오히려 고집과 아집에 묶여 성장이 멈추거나 퇴보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나이는 많아 늙어 질 수 있지만 성숙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적인 성숙의 기준에 우리 자신을 맞출 때 아무도 그 기준에 도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데 까지 이르는 성숙”을 말하기 때문입니다.(4:1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도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그 분처럼 되라고 격려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4:15) 작은 예수가 되라는 것입니다. 요술 방망이로 변화되듯 그런 변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인격의 변화를 일으키는 성장과 성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성장과 성숙에 장애 요소가 있는 데 그 중에 한 가지가 과거라는 덫입니다. 과거가 마치 현재의 장애물처럼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다 끝이 난 일인데 그 사건과 그 상처가 우리에게 신선한 새 출발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전체의 생은 우리가 경험한 과거의 지배를 받고 영향을 받습니다. 마치 나뭇가지가 그 뿌리를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숙을 향하여 전진하기 위하여 우리를 잡고 있는 그 과거의 뿌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뿌리를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과거의 사건들을 되새기면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좋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35) 주님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현재의 우리의 삶의 치유와 회복까지 포함하는 전인적이며 실제적인 것입니다. 결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완전한 회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여 고침 받은 것을 증명 받고 그가 가정과 사회에 복귀하도록 명하십니다.( 8:1-4) 과거에 얻은 병을 고치시고 현재의 삶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43:18-19) 우리 주님은 이 과거로부터 우리를 자유 하게 하셔서 우리의 현재의 삶에 치유와 회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도록 축복하시는 겁니다.

 

이런 우리의 축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성장과 성숙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숙과 성장에 장애가 되는 잡초가 있고 뿌리가 있는 데 바로 그게 과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과거 중에는 채워지지 않았던 욕구들이 있을 수가 있고 감정적 상처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모습을 알고 계시고 또한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심령에서 울려 나는 호소와 안타까운 흐느낌을 아십니다. 상처의 고통과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분은 우리를 치료하시기를 원하고 잃어버린 자는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과거의 상처가 무엇이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쓴 뿌리가 무엇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분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쓴 뿌리를 치료하십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시편 107:20의 선언입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아멘!” 으로 받는 순간 여러분에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6:6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과거를 씻어내고( 15:13) 정화시킵니다( 4:12). 사탄은 과거라는 뿌리를 가지고 주의 백성들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심은 것 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5:13) 주님은 사탄이 사용하는 과거라는 쓴 뿌리를 뽑으시고 우리의 영혼의 밭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께서 심어 주시는 알곡들이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의 과거 가운데 있는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하시고 새로운 축복이 자라는 밭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 우리 인생의 사막에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타조도 나를 존경 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43:18-21)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되어 그 부끄럽고 추악한 과거가 치유되고 회복될 것을 말합니다. 그 치유된 심령 가운데 임할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치유된 심령에서 터져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말합니다.

 

과거의 치유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렇다면 과거의 치유는 어떻게 일어날까요? 과정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과정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게 중요합니다. , 과거와의 우리의 싸움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영적 싸움이라는 영적 각성입니다. 싸움에 임할 때는 그 싸움과 전쟁의 본질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 싸움을 육으로 싸우면 그 자체가 이미 패배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과거청산의 문제는 영적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나니 생각입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는 칼로 베인 상처가 아닙니다. 총상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상처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진정한 상처는 상처 입은 마음과 영혼인 것입니다. 감정의 상처요, 인격의 상처요, 정서의 불안이요 자존심의 손상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이라는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마음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행을 가도 그 마음과 영혼은 함께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도 마음이라는 전쟁터에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귀찮게 생각하면 숨어버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골방에 숨어 홀로 지내고 있어도 그 숨어 있는 골방에는 마음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라는 전쟁터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수술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영혼을 치유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속에 있는 상처들을 은폐하려 하고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가장하려는 강한 자기 보호 본능적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약해 보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강해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 8:32,36) 진리 앞에 자신의 과거를 드러낼 때 마음을 좀먹고 있는 병균들은 죽습니다. 마치 햇볕에 쪼인 균들이 몸부림치며 죽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앞에 내적 상처가 있는 것을 솔직하고 진실 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건들이 나를 괴롭히고 마음에 깊은 갈등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되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외적 쇠사슬이 풀려서가 아니라 영혼을 얽매고 있는 과거의 사슬이 예수의 이름으로 풀려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과거와의 전쟁은 마음과 영혼의 싸움인 영적 싸움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떠나면 집니다. 예배의 자리를 떠나면 집니다. 말씀을 떠나면 이미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찬송을 멈추면 안됩니다. 영적 삶을 게을리 하면 지게 됩니다. 과거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과거를 치유하는 첫 번째 비결은 과거와의 싸움이 영적 싸움이라는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고통이라는 과거의 진실에 담대하게 직면하십시오. 그 과거의 고통 속에 다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그 진실을 다시 조명해 보고 진짜 정체를 밝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고통스러운 과거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 직면의 과정 가운데 우리는 힘을 얻게 되고 그 과거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회피하거나 떠나서는 해결책이 서지 않습니다. 상처를 주었던 것이 사람이면 그 사람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직면하지 않고 혼자 상상하고 생각 속에 사탄의 속삭임을 허락할 때 진실은 왜곡되고 상대는 주지도 않은 상처를 스스로 받게 되고 마음은 더욱 견고하게 빗장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 가운데 그런 것을 깊이 체험하고 마음과 영혼이 깊은 치유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제 경우는 아버지에 관한 고통스러운 과거의 상처였습니다. 두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제 동생은 유복자입니다. 집안에 남자 어른은 단 한 명도 없는 환경 가운데 자랐습니다. 그런 환경이다 보니 제게는 남자 어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마음속에는 은근히 그런 두려움의 대상인 남자 어른이 내 보호자가 되어 나의 방패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러움과 동경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제게 상처가 된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제가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그 아이가 클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상처는 해결되지 않은 채였습니다. 사실 제 기대는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기에 그냥 묻어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무슨 어려운 일만 닥치면 이럴 때 아버지께서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을 하며 지냈습니다. 제게는 깊은 상처였고 언제나 기회만 되면 마음을 어지럽히는 하나의 강력한 대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어떤 세미나에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것을 제안 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막연했습니다. 한번도 아버지를 불러 본적이 없고 더구나 없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본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열심히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저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품고 있던 마음의 생각들을 진솔하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보고 싶고 그립다고. 아버지라고 한번이라도 꼭 불러 보고 싶었다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정말 보고 싶었다고. 왜 내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먼저 돌아가셨느냐고.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한 가지 한 가지 써 내려가면서 제 과거와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 참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아버지가 먼저 가신 육신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한 가지 한 가지 대답을 해 주시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두 살짜리 아들과 다섯 살짜리 딸을 남겨 두고, 이제 셋째 아이 출산을 한달 앞둔 아내를 두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아픔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저를 사랑하며 숨을 거두시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시고 치유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섭섭함으로 상해 있던 감정이 모두 그 분의 사랑으로 새롭게 채워지는 따스함을 경험했습니다.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고 마음 깊이 사랑하면서 제 마음속에서 용서가 일어났습니다. 마음에 새로운 생명의 싹이 돋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아버지가 없었던 열등감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원망도 상처도 다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얼굴도 모르고 한번도 불러 보지 못한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직면 할 때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건이 있습니까? 사람이 있습니까? 회피하지 마십시오. 직면하십시오. 그 때 그곳에 길이 보입니다. 물론 직면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과거의 상처에 익숙해져서 그냥 하루하루를 그 짐을 당연 한 듯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과거를 떨쳐 버리거나 직면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관계를 파괴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그러한 직면의 행위가 고통을 주기 때문에 회피하려고 합니다. 사실 마음의 짐을 떨쳐 버리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에 용기 있게 직면하면 그 고통의 눈물은 곧 기쁨의 눈물로 변하게 됩니다. 과거가 주는 상처와 짐을 계속 가지고 사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 과거의 상처 때문에 현재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낙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참 맛과 미래의 행복은 경험 할 수 없게 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43:18)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과거와 직면하십시오.

 

셋째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세월이 지나고 나면 과거는 언제나 경험 할 그 당시보다 더 멋지고 좋았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과거라는 강을 건너와서 뒤돌아보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거가 좋았거나 나빴거나 슬프고 힘이 들었거나 상관없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보다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라는 짐을 잔뜩 짊어지고는 미래를 향해 가볍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라는 짐을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예수님의 사랑의 초청입니다. 첫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초청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가지고 계신 미래의 계획에 집중하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29:11)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외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타조도 나를 존경 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43:18-21) 불가능을 행하시는 하나님. 사막 같은 내 마음을 강처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 이 미래의 소망에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이 일을 행하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아는 사도 바울이 외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3:12-14)

 

나가는 말

 

여러분, 주안에서 과거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알았으면 다시 과거의 운동장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오직 현재라는 주어진 기회와 현실에 충실하면서 미래라는 새로운 무대를 향해 전진하십시오. 과거가 더 이상 현재와 미래를 두드리며 내게 고통을 주는 망치와 모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관계의 파괴의 경험이 주는 고통입니다.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새롭게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학대 받은 아픔 때문에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손상된 자존감이 회복되지 않은 것입니다. 최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실수에 생각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완벽주의자가 되어 자신은 언제나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경험에 묶인 사람입니다. 감정이 지치고 인생이 실패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의 경험들이 해결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미래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그 영혼을 채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 또한 아느니라.(요일5:14-15)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도움을 담대히 요구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개인정보취급방침] 14 Cormiston Ave, Concord NSW 2137 | Sydney | Australia TEL : 02 9743-1444
Copyright ⓒ 시드니안디옥장로교회 All rights reseved. Provided By 교회사랑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