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마태복음 6:5-8)

2016 124(주일 낮 예배)

들어가는 말

여러분, 혹시 호주에만 있는 특이한 동물들 중에 혹시 알고 계신 것 있습니까? , 그렇지요. 캥거루, 코알라,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호주에는 호주에만 살고 있는 고유의 동물들이 더러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캥거루와 코알라가 있습니다. 캥거루는 Papua New Genea에도 있습니다. Wallaby도 있지요. Wallaby는 캥거루처럼 생겼는데 약간 적습니다. 그리고 Platypus도 있습니다. 네 발 달린 짐승인데 입이 꼭 오리처럼 생겼지요. 오리 너구리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발도 물갈퀴처럼 생겨서 수중 생활에 용이합니다. 그리고 Tasmania에 가면 Tasmanian Devil이라는 동물도 있습니다. 유대 동물, 즉 자루가 달린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육식동물입니다. 그리고 본토에는 없고(동물원에는 있음) 세계에서 유일하게 Tasmania에만 서식합니다.

 

그런 희귀한 동물 중 또 하나는 Emu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타조(Ostrich)로 혼동하기 쉬운 동물이지요. Emu는 타조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조류이면서도 날지 못합니다. 그러나 날지 못하는 대신 하나님은 긴 다리와 세 개의 발가락으로 된 튼튼한 발을 사용해 시속 50km까지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보통 1.5에서 2m의 키에45Kg까지 나가는 Emu는 암컷과 수컷이 거의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이동하며 사는 데 어떤 것은 수백 Km를 자기의 삶의 반경으로 삼기도 한답니다. Emu는 호주의 열대림지역을 제해 놓은 거의 전역에 고루 퍼져서 서식합니다.

 

몇 년 전에 south AustraliaAdelaide Museum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침 누군가가 기증한 그림들을 특별 전시하는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개인 소장품치고는 참으로 방대하고 귀중한 그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눈길을 끄는 여러 가지 작품 중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Emu 알로 만들어진 섬세한 공예품이었습니다. Emu Egg Craft가 놀라웠던 것은 그 세련됨과 섬세함에 있었습니다. 금과 청동, 그리고 진주로 장식된 이 작품은 들여다볼수록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Emu 알이 썩지 않고 100년도 넘게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썩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날이 갈수록 사용된 다양한 재료들이 하나로 일체를 이루는 듯한 은은한 색채와 원숙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안내인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작품을 만든 주인공은1880-1900사이에 살았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일본인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보니 알지 못하는 일본 장인의 손길과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은 감상에 젖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신비한 바람이 동양의 한 사나이를 이 먼 호주까지 오게 해서 이런 일에 골몰하게 했을까?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궁금했던 보존의 문제를 묻자 안내인은 매우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Emu 알 밑면에는 보이지 않은 구멍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멍을 통해 숨을 쉬는 것입니다. 신선한 공기가 끊임없이 안으로 들어가서 알이 썩지 않도록 보존하고 더 은은하게 작품성을 돋우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00년도 더 지났는데도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으로 그 자태를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호흡은 중요한 것입니다.

 

호흡은 가장 기본적인 생명운동입니다. 생명체의 존재는 처음과 끝이 호흡에 달려 있습니다. 신체의 건강을 위해 사람은 호흡을 합니다. 여러분 혹시 건강한 사람이 하루에 호흡을 몇 번이나 하는 지 아십니까? 24시간 동안 28,8000회 정도 호흡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호흡이 약해지면 생명현상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게 되는 거지요.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성도, 건강한 성도는 호흡이 규칙적이고 왕성합니다. Emu Egg Craft에 숨구멍이 있듯이 성숙하고 아름다운 성도라는 작품 속에는 기도라는 숨구멍이 있게 마련입니다. 세월이 가도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기도의 숨구멍 때문입니다. 기도의 숨구멍, 그게 성도를 생명력 있게 보존합니다. 성도의 영적 자태를 신비하고 아름답게 유지시킵니다. 기도는 성도의 영적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접촉하며 생명을 이어갑니다. 모든 영적 기능을 활력 있게 하도록 끊임없이 인생의 불순물을 내보내고 신선한 영적 공기를 호흡합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이 하는 영적 호흡인 기도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제가 말씀 드린 Emu작품처럼 숨은 호흡의 구멍이 있으십니까? 혹시 이 기도라는 영적 통로가 막혀서 신앙생활에 호흡 곤란을 겪고 계신 분 없으십니까?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으신 분 안 계십니까?

 

기도를 전시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은 “사람 앞에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6:1)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행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의 두 번째 교훈입니다. 주제는 기도를 전시함으로 사람 앞에 의를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은밀한 구제에 관한 것이었고 본문은 은밀한 기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즉 기도를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전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기도한답시고 영적 과시자가 될 위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겁니다. 영적 전시자 또는 과시자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을 인식하기보다는 사람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성 생활의 위험성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적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상급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6:1) 영적 과시자의 궁극적 의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상급이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전혀 점수를 주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기도 문화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데는 당시의 종교 문화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마 가장 좋은 실례는 누가 복음18 9절에서 12절에 나타나는 바리새인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기도하는 자들에게 바른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단다. 한 사람은 자기가 옳은 사람인 것을 뽐내는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는 세관원이었다. 바리새인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단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 18:10-12)

 

예수님은 이런 기도자의 모습을 오늘 본문 5절에서 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십시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당시 바리새인들과 형식적 경건주의자들은 아마 회당과 큰 거리에서 기도를 떠벌리듯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성전에 가는 도중에 길모퉁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서서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열심 아닙니까? 사실 이런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을 점검해 보십시오. 이들의 열심만큼 기도하십니까? 사실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칭찬 받을 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우리의 평가와는 너무 다릅니다.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외식이 무엇이냐 하면 위선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기도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다른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저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전시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경건과 헌신을 과시하기를 즐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인정받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은 이미 그 영적 과시에 대한 자기들의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야! 그 사람 기도 많이 하는 구만! 그 집사님 정말 기도 유창하게 하더라고! 새벽 기도 절 때 안 빠져! 한번 했다 하면 두 시간이야! 그 사람 기도원 가서 기도한대!” 여러분, 사람들의 칭찬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오는 찬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게 영적 함정이다. 그런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는 것은 하늘의 상급을 땅의 허무한 것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행동이다라는 겁니다. 마치 에서가 죽 한 사발에 장자권을 바꾸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 없는 자의 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사모하는 신령한 은혜가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늘보다는 지상에 매인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약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기도하며 그 분의 응답을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큰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이 그립습니다. 그들의 보아주는 눈초리가 내 기도의 줄을 겨우 지탱해 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찬사가 사라지면 갑자기 영성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더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초라한 모습이긴 하지만 그게 우리들의 기도의 현주소일 때가 있습니다. 저도 성도들이 정목사님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야 소리를 들으면 기도를 더하고 싶어집니다. 낙담하거나 침체했다가도 다시 기도하겠다는 결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기도 생활을 내어놓으면 죄송한 마음이 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저와 여러분들을 책망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못난 것들하고 나무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바른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기도의 사람들이 되도록 격려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상급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골방에서 하는 기도

오늘 본문6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정말 흥분했습니다. 이 말씀을 곱씹으면서 알게 된 영적 사실이 저를 그렇게 기쁘게 했습니다. 왜냐 구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은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 할 때 그 가운데 은밀한 중에 계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your Father who is in secret" 두 번째는 그 분이 내 기도하는 모습을 은밀한 중에 보고 계시다는 사실이 저를 흥분하게 합니다.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기도하는 나를 주목하여 지켜 보시는 하나님! 여러분, 흥분되지 않으세요? 여러분들이 골방에서 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계시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대상 없이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대화라는 겁니다.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기도의 처소에 임재해 계시고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게 기도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괜히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서 듣고 계시고 보고 계시니까요?

 

저는 여기에서 묵상하다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를 보고 계신지 안 계신지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영적 질문 안 생기세요? 답이 무엇이지요? , 믿음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8:20) 기도하는 곳에 하나님은 언제나 임재하십니다. 함께 계십니다. 그 분의 이름이 “임마누엘, 즉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28:20)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겁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21:22) 믿음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은밀한 중에 기도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보지 않아도 골방에서 기도하게 합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목사가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함께 계신 하나님, 나를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은밀한 곳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밀한 주에 갚으시는 기도의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저를 흥분시키는 것은 6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your Father will reward you.” 함께 하시며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문제 해결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하는 힘 빠지는 신세 한탄이 아닙니다. 우상에게 하는 공허한 주문이나 종교행위가 아닙니다. 분명한 응답이 있는 영적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경험하는 능력체험의 통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바로 이런 축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골방에서 하는 은밀한 기도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골방에서 하는 은밀한 기도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말 밀폐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는 그런 문자적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첫째는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입니다. 그 분이 바로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 되심에 대한 인정입니다. 나를 맡기고 그 분의 통치를 허락하는 위임과정이 기도입니다. 그 분의 뜻과 의지 속으로 굴복해 들어가는 순종의 과정입니다.

 

둘째로 골방에서 하는 은밀한 기도란 친밀한 관계의 형성을 말합니다. 기도는 교제의 방식입니다. 가장 친밀한 관계의 형성이요, 그 관계의 표현행위입니다. 마치 연애하는 두 연인의 대화와 같은 것입니다. 또는 결혼 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두 사람만의 자연스럽고 비밀스러운 교제처럼 기도는 하나님과 두 사람만의 만남과 대화인 것입니다. 연애하는 두 사람이 자기들의 대화가 노출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 사람만이 통하는 친밀한 언어가 있고 속삭임이 있고 그 가운데 피어나는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골방 기도는 바로 그런 기도를 말합니다.

 

셋째로 은밀히 기도하라는 말은 기도의 피상성을 극복하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정직성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은밀한 기도란 한 인간의 심령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찬양과 경배, 호소와 신음을 말합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의 외침을 말합니다. 솔직함과 투명성은 하나님 앞에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 투명성과 정직의 담대함이 언제 나타납니까? 은밀할 때 나타납니다. 사람이 보지 않는 하나님만 보시는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은밀한 기도 가운데에서 영적 편안함을 가지고 자기 죄에 대해 투명성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솔직함 속에는 회개를 포함합니다. 성도가 회개의 문제를 남의 일처럼 무감각하게 생각할 때 그 신앙은 결코 진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개할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라는 겁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을 지도자에게, 아무개에게 떠넘기고 자기는 의로움의 울타리 안에 모시는 게 문제입니다. 기도할 때는 회개해야 할 당사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철저한 정직성이 필요합니다. 이런 피상의 껍질이 벗겨진 투명하고 정직한 기도는 하나님과 일대일의 은밀한 가운데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골방에서 드리는 은밀한 기도란 정직한 기도를 말합니다.

 

넷째로 은밀히 드리는 기도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간절하게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고 매우 중요합니다. 공중 기도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할 때는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우리 시대를 향해, 그리고 나를 향해 발하시는 영적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본받지 말아야 하는 기도의 모범

그런데 이렇게 은밀한 중에 골방에서 기도 할 때도 위험성은 있습니다. 주님은 본문 7절에서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지요? 영어로 말하면 meaningless repetition"입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기도의 형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나무 호랑 개교에서 말하는 “나무묘 호랑 개교, 나무묘 호랑 개교”하고 의미 없이 반복 암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불교에서처럼 의미 없이 공염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카톨릭에서 반복해서 기도문을 외우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중언 부언, 즉 의미 없이 반복하는 경계해야 할 잘못된 기도의 형태입니다.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한다고 다 옳은 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이런 기도자의 심리 속에는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로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다 보면 그런 생각 안 드십니까? 한 가지 제목 가지고 기도하다 보면 조금 구체적으로 기도해도 5분이면 끝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는 다음 기도 제목으로 옮겨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간단하게 핵심만 이야기하고 간결하게 기도하면 무엇인가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드린 것 같은 착각이 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응답을 받아내기에는 노력과 정성이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복하기도 하고 장황하게 말을 나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실 것 같은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이해 부족입니다. 게다가 신앙의 열등의식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시다는 믿음가운데 피상성을 극복한 솔직하고 투명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간절함과 내면이 드려지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양보다는 질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시간만 오래 때우는 기도도 아니고 말장난만 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속마음과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르신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를 제해 놓고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모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맡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하나님 의존적 존재라는 영적 자각에 이르는 것을 원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깊은 교제와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과 기도자 사이에 생기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참된 기도는 행동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참된 기도는 그렇게 골방에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끝이 나는 것이냐?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저는 그렇게 기도하면 다 된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참으로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기도를 드림으로 나를 회복시켜주시고 새롭게 하셨다는 신앙적 성취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 자기만족입니다.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가 기도 한 내용을 성취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을 주님에게 묻고 내가 할 몫을 최선을 다해 행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에 억류되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만이라는 자의 모함으로 그곳에 살던 모든 유다인이 전멸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유다인으로 페르시아의 황제 아하수에로의 왕후가 되었던 에스더라는 여인은 이 소식에 접하고 밤낮 3일간을 금식합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도움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생명을 담보로 철저하게 매달린 것입니다. 그 후에 에스더가 어떻게 한지 아십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4:5)는 각오를 가지고 금지된 어전 뜰로 나아가 아하수에로 왕 앞에 섭니다. 허락 없이 왕에게 나가면 죽임 당하는 게 당시 엄정한 궁중 법도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한 그녀가 목숨을 걸고 행동으로 자기가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에스더를 어여삐 보게 하시고 그를 사용하셔서 원수 하만을 목매달게 하시고 유다 민족 전체를 구합니다. 사건의 역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기도도 목숨 걸고 해야 하지만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였으면 내가 할 일도 최선을 다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디옥이 사랑이 많은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셨다면 바로 기도한 그 사람이 사랑이 많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 베풀기를 기다리지 않고, 또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 주시길 기다리지 않고 본인이 사랑의 사람이 되어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겁니다. 안디옥의 재정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이 헌신하는가 눈치 보지 말고 자기가 할 최선의 분량을 헌신하는 행동을 실천하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그게 기도의 완성에 이르는 길입니다.

 

삶으로의 실천이 없는 자기만족적 기도의 영성은 건강한 영성이 아닙니다. 기도는 거룩한 성도의 실천적 삶을 위한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 뿌리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꽃과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기도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것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절대로 추상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다 떠 넘겨 버리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을 회피하기 위한 무책임한 도피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 지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분별하고 듣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놓고 예수님께서 해 주시거나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 주기를 기도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면 기도 제목을 좋은 학교에 합격하는 것으로 정하는 것은 좋지만 공부를 안하고 기도만해도 합격한다는 것은 거짓 신앙입니다. 좋은 체력을 주고 시험 볼 기회를 제공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그 기도하는 사람의 몫인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얻어진 영성을 유지하고 은혜를 배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은혜와 영성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만 속삭이는 일방적인 대화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진정한 교제도 대화도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기도 가운데 그분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고 그 분이 원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나를 향한 영적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분의 요구하시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걸 행하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여기까지 가야 기도가 완성되는 겁니다. 불쌍한 이웃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구제하고 베푸십시오. 행동이 뒤따르지 않고 예수님보고 다 하시라고 하면 안 됩니다. 가증한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를 위해 기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분께서 하실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선교 헌금을 하십시오. 선교사에게 메일 보내고 전화하시고 격려하십시오. 단기 선교를 준비하시고 그곳을 향해 떠나십시오. 그 때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위대한 선교의 역사는 실현됩니다.

 

나가는 말

이 시대는 기도의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기도하는 목사를 필요로 합니다. 기도하는 장로님들, 기도하는 권사님들, 기도하는 집사님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그 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기도할 기도의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고통 하는 이 세상을 끌어안고 중보할 기도의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살아갑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잠수를 해서 살아가듯 그렇게 어렵게 살아갑니다. 잠수부에게 산소 공급 줄이 끊겼다면 그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죽음입니다. 기도가 끊겼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아마 현재 영적 질식 상태에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라는 산소통의 밸브를 여십시오. 그리고 깊이 하나님의 생명을 숨쉬십시오. 그 때 우리 영혼은 소생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 줄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구하는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공기가 그러하듯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능력은 기도의 파이프를 타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능력과 권세는 바로 기도의 실행과 함께 시작됩니다. 이런 말을 읽었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Much prayer, much power. Little prayer, little power. No prayer, no power

 

저는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주님이 요구하시는 바른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은밀히 하나님의 임재앞에 정직하고 투명한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으면 행동으로 여러분들의 몫을 감당하시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 넘치도록 갚아 주시고 축복하시는 은혜의 종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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