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언어의 축복을 사용하자.

하나님이 주신 언어의 축복을 사용하자.

(Make a Good Use of Blessings of the Tongue.)

(야고보서 3:1-12)

20016 1 17(주일 예배)

들어가는

 

                혀는 뼈가 없지만 뼈를 부서뜨릴 있다.(J Wycliffe)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혀의 엄청난 영향력과 파괴력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마디에 사람의 인생이 세워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말은 창조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발하시자 우주 만물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입술의 고백과 구원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 10:9-10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9-10) 입으로 시인하는 말로 고백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10:32-33)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우리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말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고 구원의 영적 권세가 있습니다.

 

                말은 실제로 뼈를 부러뜨리지는 않지만 때때로 영혼을 파괴하고 마음에 지울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반대로 말은 깨어진 관계와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고 쓰러진 심령을 소생시키기도 합니다. 언어는 없는 비수가 되기도 하고 형상 없는 신비의 명약이 되기도 합니다. 언어는 행복의 전령사이기도 하지만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말에 대한 온전함은 사람 자체의 온전함입니다. 언어가 아름다운 사람은 삶이 아름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추하고 독이 있는 사람은 자체가 추하고 독기가 서려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사야는 가장 먼저 자신의 입술의 부정함을 올렸고( 6:5)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는 다윗도 자신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처럼 혀를 다스리는 능력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행위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입술의 열매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도 있고 못난 인격의 악취를 풍길 수도 있습니다. 혀를 다스리는 지혜는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하는 가장 요긴한 지혜일 아니라 혀를 통해 사용하는 언어란 누려야 은총이며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을 전하는 아름다운 언어습관을 가질 있을까? 하나님이 주신 언어를 사용해서 축복과 은혜를 유통하는 삶을 살아갈 있을까요?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경적 원리들을 배워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언어가 갖는 특성을 살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언어라는 권세를 축복의 도구로 사용할 있는지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행함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말에 실수가 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제를 입술의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혀의 행위인 말에 대해 훈계하면서 서두가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것입니다. 그럴까요? 당시 유대 문화를 조금만 이해하면 쉽게 이유를 있습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가르치는 일은 매우 가치 있고 존경받는 직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유대인들도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문화적 분위기 가운데 가르치는 것을 열망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르치는 사람이 인식해야 하는 가르치는 자로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책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언어를 통해 가르친 대로 모범이 되는 영적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모순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행위를 통해 가르쳐진 좋은 이론이 가르친 사람의 삶의 행위로 나타나지 않을 얼마나 실수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배우는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가르치는 사람, 선생이 되려는 사람들의 심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은밀한 내면적 정체까지도 파악하도록 요구합니다. 가르치고자 하는 자의 언어 가운데에는 상대에 대한 우월감이 있을 있습니다. 자기를 나타내는 과시 욕구의 표현일 수가 있습니다. 가르치고자 하는 의욕이 앞서서 강요하거나 집착적으로 변화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을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경향이 있을 있습니다. 은밀한 중에 작동하는 이런 내적 교만의 모습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 우리가 심판을 받을 알라.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권면하는 것입니다.( 3:1) 우리가 말할 말이 갖는 책임을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혹시라도 우리 내면에 은근히 작동하고 있는 선생이 되고자하는 욕구가 상대를 향한 우월주의나 자기 과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십시다.

 

혀의 부정적 영향력과 위험성을 알라.

 

                번째는 혀의 부정적 영향력과 위험성을 알라고 말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미 앞서서 이런 부정적인 언어의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19) 말하는 것도 중요하고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말하는 대화보다 듣는 대화에 익숙 하라는 것입니다. 말하는 대화는 자기가 중심이고 듣는 대화는 상대를 존중해주는 가장 고차원의 대화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6)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영성은 거짓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언어와 영성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에서도 이야기 합니다. 말을 재갈 먹여 통제하듯이 혀를 그렇게 통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의 방향은 입에 먹여진 재갈을 고삐로 통제하며 결정합니다. 말이 도착하는 곳은 입에 먹여진 재갈을 통제하며 나아간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배도 그렇습니다. 배는 키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방향과 목적지가 결정됩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혀를 잘못 사용할 어떤 일이나 심지어는 삶의 방향까지도 그릇될 수도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언어의 부정적인 측면을 5절과 6절에서는 작은 불로 비교합니다. 작은 불이 불로 퍼져 가는 무서운 모습을 통해 혀의 파괴적 위험성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작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3:5-6) 통제되지 않고 마구 말하는 혀의 심각한 해악을 표현합니다. 이런 사악하고 파괴적인 불의 근원은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에게 악용될 있는 요소가 많다는 것입니다. 혀가 잘못 사용될 사람들 사이가 갈라집니다. 언어가 사탄의 도구가 고결한 인격을 더럽히고 서로를 비난하게 만듭니다. 근거도 없는 소문이 날개를 퍼져 나가고 소문에 휩싸인 사람의 인생은 타버린 삼림처럼 피폐하게 됩니다. 부주의한 마디가 영혼을 검은 숯처럼 낙담 가운데 앉아 흐느끼게 합니다. 한번 내어 뱉은 말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서 돌이킬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번 입은 화상의 상처가 영원히 남듯이 혀로 인해 입은 상처 또한 영원히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말을 하기 전에 혀는 불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혀의 길들이기 힘든 본질을 알라.

 

                번째는 혀의 길들이기 힘든 본질을 알라고 말합니다. 7-8절입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길들이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7-8) 인간은 자기들이 필요한 모든 동물들은 거의 길을 들여서 자기들의 목적을 따라 사용합니다. 그래서 동물을 이용해 농사도 짓고 마차도 끌게 합니다. 집도 지키게 하고 싸움도 시킵니다. 동물을 길들이다 보니 애완동물도 생겨났습니다. 동물을 이용한 서커스도 생기고 물개 쇼와 돌고래 쇼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혀를 길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미물들 길들이는 것보다도 훨씬 어렵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능히 길들일 자가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길들이기를 포기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스스로를 의지하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혀의 완벽한 통제는 성령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어지는 인생은 혀도 성령님에 의해 통제됩니다. 성령님에 의해 변화된 인격은 변화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경험해 보지 않으십니까? 정말 그렇게 말하려는 아니었는데 그만 그렇게 말하고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마음속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말이 나간 겁니다. 정말 화를 내려고 아닌데 성격이 급해서 말을 거칠게 것입니다. 남의 얘기를 하고 살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휩쓸려서 그만 남의 얘기를 튀기면서 신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평불만 안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불평이 나오는 거예요. 더럽고 상스러운 말을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만 상대가 나를 받게 만들어서 나도 모르게 거예요. 고치려고 했는데 아직도 고쳐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누가 의도적으로 상스러운 말이나 부정적인 말을 골라서 쓰나요? 그런 것이 아니지요. 고치려고 했고 좋은 언어 습관을 가지려고 했는데 그만 버릇이 나온 이예요. 그렇습니다. 혀의 통제는 우리가 성령에 의해 지배 되는 만큼 통제되는 것입니다. 인격에 성령의 지배가 이루어지면 언어의 통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좋은 언어 습관을 갖고 싶으십니까? 기도하시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이전에 혀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성품과 인격을 성령의 지배 가운데 의탁하십시오. 고상한 인격에서 고상한 언어가 나오고 거룩한 성품 가운데 거룩한 언어가 나옵니다. 사랑의 성품에서 사랑의 언어가 나옵니다. 믿음과 긍정의 성품에서 믿음과 긍정의 언어가 나옵니다. 성령에 의해 길들여진 인격에서 성령의 언어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사람이 혀는 내가 통제 있는 좋은 축복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혀의 이중성과 모순을 이해하라.

 

                번째는 혀의 이중성과 모순을 이해하라고 말합니다. 본문 9절에서 12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아버지를 찬송하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구멍으로 어찌 물과 물을 내겠느뇨.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물이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3:9-12)

 

                야고보 사도는 마지막으로 혀의 이중성과 모순성을 클라이맥스로 하일 라이트 시키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일관성이 없고 상반된 우리의 모습을 이미 야고보서 1:6-8 지적한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1:6-8)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응답받고 얻게 것을 믿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의심하는 것은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정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믿는 것도 아니요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네처럼 이쪽저쪽으로 흔들거리는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혀의 사용도 마찬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입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하고 영적인 모습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입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형제자매를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구로 다른 편으로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편으로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이중성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샘에서 물과 물이 나오는 것처럼 있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포도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고 감람나무가 포도 열매를 맺는 같이 있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말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죄악 인간이 사용하는 혀의 용도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질을 가지고 사는 인간의 한계가 혀의 사용에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언어 자체는 중립입니다. 그러나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기능과 효과가 다릅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악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혀의 사용은 혀를 사용하는 주인의 인격이나 성품과 관계가 있습니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 달라 있습니다. 주인이 성령의 도구로 내어 줄때 혀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형제자매를 세워 줍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에 내어 줄때 언어는 더러움과 악을 담는 도구가 되고 인격을 파괴하고 상처를 주는 칼날이 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축복의 도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가지 발견하는 사실은 원래 언어는 축복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언어는 하나님의 입에서는 창조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이 보시기 좋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입으로 시인하는 고백의 언어를 통해 구원을 얻는 영적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언어의 축복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축복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 우리를 축복을 유통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로 사용하십니다.

 

                혹시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검사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때를 따라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는 바른 언어의 사용자인지 아닌지... 부정적 언어의 사람인지, 긍정의 언어 사용자인지.... 사람들은 나와 대화 나누는 것을 즐거워하는지 아니면 마지못해 이야기 하는지... 언어에는 축복의 언어가 많은가, 아니면 비판하고 정죄하는 언어가 많은가?.... 점검해 보셨습니까? 만약 점수로 따진다면 점이나 주실 있을까요?

 

                여러분, 언어는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 매체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관계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사용되는 언어와 형태에 따라 관계가 증진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언어가 회복되면 관계가 회복됩니다. 언어가 회복되면 믿음이 회복됩니다. 언어가 회복되면 축복이 회복됩니다. 저는 시간 여러분들의 언어가 긍정의 언어로 회복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언어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축복의 언어로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축복을 유통하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믿음을 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언어의 축복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되실 있는 가지 비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삶에 적용하셔서 언어로 축복을 빚어내는 아름다운 은혜의 도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마디의 긍정의 언어가 누군가의 영혼에 희망의 불씨를 당길 있습니다. 상대방의 영혼을 따뜻하게 데울 있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만들 있습니다. 부정의 언어는 사람을 죽입니다. 이상과 꿈의 날개를 꺾고 소망을 좌절시킵니다. 부정적 사람을 만들어 내고 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긍정적 언어를 사용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말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8,20) 긍정의 언어는 축복을 담는 언어입니다. 언제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언어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용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게 바로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상대를 향해 믿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람 속에 소망을 두는 행위이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 들인 아이의 불신의 언어를 고쳐 주십니다.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9:23) 믿음의 언어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축복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축복을 말로 표현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마음에만 담고 있으면 마치 부뚜막에 있는 소금과 같습니다.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축복의 언어는 질식해 죽어가는 삶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축복의 언어는 미래를 향해 용기를 주며 낮아진 자존감에 격려의 날개를 달아줍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서 마다 편지를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빕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가갈 때마다 언제나 그의 제자들에게 평강을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축복의 언어는 축복을 담습니다. 축복의 언어는 축복을 낳습니다. 축복의 언어를 사용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넷째,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언어의 예절을 지키십시오. 무례하고 부주의한 마디가 관계를 파괴하고 돌이킬 없는 후회의 열매를 오랜 세월 먹게 합니다. 예절은 결국 사람 자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절을 지킨 언어의 축복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람은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15:23)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15:1)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사이라도 예절이 지켜진 언어가 사용될 관계는 지속되고 더욱 아름답고 견고하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절이 지켜진 언어는 축복의 끈입니다. 관계를 증진시키고 서로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진정한 격려와 위로의 표현입니다.

                다섯째 판단이나 정죄의 언어는 가능한 사용하지 마십시오. 판단과 정죄의 언어 저변에는 교만과 자기의 의가 자리 잡고 있게 마련입니다.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은연중의 자기표현일수가 있습니다. 가르치고자 하는 선생의 욕구가 숨겨져 있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비판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것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7:1-3)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격려와 사랑, 용서와 섬김의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도 그러해야 합니다.

 

                여섯째 뒷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두가 즐기는 것이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옳지 않은 언어 습관입니다. 관계와 행복을 파괴하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 뒤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 앞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바로 당신의 이야기를 동일하게 속삭이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디모데 전서 3 11절을 보면 감독과 집사의 자격으로 참소치 아니하는 자를 꼽습니다. 참소하는 말은 악하게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지 마십시오.

 

                마지막 일곱째, 말하기보다 들어주십시오. 최고의 화술은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냥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공감적 경청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들어 주는 것입니다. 들어 준다는 것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마음을 열고 진심을 표현하게 됩니다. 듣는다는 것은 관계를 형통하게 하는 의사소통의 영역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 말하는 것이라면 듣는 것은 관계를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19) 들어 줌으로 상대를 축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하나님은 행복을 전하는 아름다운 언어 습관을 축복하십니다.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언어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좋은 언어 습관은 비용이 가장 적게 들지만 가장 효과 있게 행복을 전할 있는 최고의 영적 영역입니다. 행복을 전하는 언어 습관을 훈련하고 습관화 하십시오. 언어로 빚어내는 축복, 가장 쉬운 듯하지만 가장 어려운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입술의 열매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혀를 사용하기 전에 마음을 바르게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언어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언어를 잘만 사용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마음은 견고하게 연결될 것입니다. 말은 마음을 열게도 하고 닫게도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인 언어를 사용해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행복을 증폭시키십시다. 언어의 축복을 사용해서 우리 모두의 가정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꿉시다. 축복의 언어를 사용해서 우리 교회 공동체를 즐겁고 사랑이 넘치는 행복의 동산으로 가꿉시다. 하나님이 주신 언어의 축복을 영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사용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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