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

(마태복음 3:13-17)

(2016 110일 주일 설교)

들어가는 말

 

마태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활동에 대해 기술하는 그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에 사시던 예수님이 요한이 사역하고 있는 요단강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매우 큰일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매우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펴 본대로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스스로 유대인임을 부정하는 것이요, 축복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종교 의식적으로 정결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요한의 설교 속에 드러나는 세례에 대한 그의 해석을 보면 세례는 회개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죄인이 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보통 일은 분명 아닙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 따르면 이 세례는 다가오는 메시아의 나라인 천국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이 메시아의 나라와 그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가오는 메시아의 왕국의 왕이요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그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친히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와 목적과 의미가 짐작이 가십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단어가 바로 헬라어 ‘τοτε’라고 하는 부사입니다. 이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then'이라는 ‘때’를 나타내는 부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하나님의 때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나오신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이 출발되는 하나님의 때를 말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서 요단강에 세례를 받으러 나아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때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계획을 가지고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때를 잘 이해하면 신앙과 인생은 성공합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는 것도 영성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린 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안 하시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일상에 충실하시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일상에 충실하다가 하나님께 불림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모세가 그렇습니다. 양을 치다가 부름 받았습니다. 다윗도 자기의 양 무리를 돌보다가 불림 받았습니다. 기드온도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떨다가 부름 받았습니다. 많은 선지자과 주의 종들이 그렇습니다.

 

현실에 충실하면서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침묵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그 자체가 사역의 준비인 것입니다. 하지만 침묵하며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기다릴 때와 행동할 때를 구분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우리 주님은30년을 잠잠히 기다렸습니다. 침묵 훈련을 하시고 기다림의 훈련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때가 아니면 행동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 복음 2 4절에 보면 주님은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때를 믿고 확신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삶의 자세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때를 아는 사람은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게으른 것이 아니고 무관심한 것도 아닙니다.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고 스스로 날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그에게 기다림의 훈련을 철저하게 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때는 긴 기다림과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인 25년 만에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모세를 들어 쓰시기를 원했던 하나님은 40년을 광야 훈련 속에 침묵을 공부하고 기다림을 배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를 불꽃 가운데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농익은 사역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기다림의 영성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때를 분별하고 주님의 때에 헌신하는 영적 성숙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요단강에 출현한 세례자 요한과 오랜 침묵을 깨고 그 장소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고 계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요한의 입장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본문 바로 전에 보면 세례 요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신 보다 능력이 많으셔서 그 분의 신을 드는 것조차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3:11) 그런데 그 능력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세례를 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요한이 어떻게 느꼈을까요? 자신이 자격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오히려 제게 세를 주셔야 할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제게 세례를 받으시겠다니 말도 안됩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입니까? 그는 예수님께 세례 주기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신령한 사역자 세례 요한의 겸손한 거절입니다.

 

여러분!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어디까지 겸손해야 할까요? 주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디까지 거절해야 하는 것일까요? 내 사역의 영역을 어디까지로 정하는 것이 적당할까요? 사실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때에 우리가 그 분을 위해 무슨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 도단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위해 죄인인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데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으십니다. 맡겨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사역이 과분하게 여겨질 때도 있고, 능력 밖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저와 여러분들이 어디까지 겸손해야 하는 지를 오늘 본문은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요한 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단강에 들어서자 세례자 요한은 간곡한 말로 사양합니다. 14절입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말렸습니다. tried to prevent Him; tried to deter Him. 자기는 그 사역에 합당한 인물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께 간곡히 말렸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자신 없습니다. 저는 적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인물이 못됩니다. 자신을 잘 아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잘 아는 세례 요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입니다. Let it be so now, it is proper for us to do thi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이 일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지금은 예수님의 말을 따라 순종할 때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요한에게 있어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황송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제가 생각할 때는 요한에게 있어서는 가장 강력한 위로요 힘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시겠다는 것은 주님께서 직접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세례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가대장님이 성가대에 앉아서 열심히 참여해 주시고 연습하는 데 옆에 앉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대원들과 지휘자가 얼마나 힘이 나고 격려가 되겠습니까? 담임 목사가 청년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말단 사원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사장이 인정하며 회사의 정책으로 반영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이 되고 신이 나겠습니까?

 

저는 저희 교회가 그런 교회인 것을 믿습니다. 연세 드신 성도들이 대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이 어린 사람들의 사역을 겸손하게 돕고 참여해주는 것입니다. 음악적 성향이 조금 다르더라도 청년 예배에서 열심히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손뼉도 치며 함께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교회의 행사마다 먼저 참여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역이 막 살아납니다. 교회가 화목해지고 온 교우들이 힘을 얻습니다. 저는 우리 안디옥이 바로 그런 교회임을 믿습니다. 오늘 주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을 비판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라는 듯이 예수님께서 친히 그 세례 예식에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격려요 위로입니다. 사역에 대한 인정이요 보증입니다. 세례 요한은 정말 힘이 났을 것입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고독하게 사역을 이끌던 요한에게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용기가 생겼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영성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고 격려를 주는 힘의 원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예수님의 요구가 자신에게는 과분하고 무리인 것을 요한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합니다. 세례 베풀기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옳으면 결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틀려도 양보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옳은 데 왜 양보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논리로 보면 세례 요한이 옳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인물이 못됩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자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자격은 없습니다. 요한의 거부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일을 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게 옳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여기까지 겸손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순종하며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겸손입니다. 설사 논리적으로 내가 틀리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옳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면 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결국 그런 순종을 통해 결국은 하나님이 옳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옳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라 하시면 무조건 순종할 때 주의 의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구 앞에 개인의 욕심과 고집을 꺾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지나친 겸손으로 주님의 일을 사양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에서 그 일을 감당할까 말까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장에서는 그게 바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로 우리의 타이밍을 주장합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는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안됩니다. 믿은 지가 얼마 안됩니다. 어떤 때는 방법이 나와 맞지 않아서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바로 그 부르심의 때가 지나면 우리는 참으로 귀중한 사역의 기회를 놓칠 경우가 있습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쓰시고자 하실 때 쓰시고자 하시는 모양대로 헌신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르시면 순종하시는 게 믿음입니다. 그게 참된 겸손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일들은 이루어지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조금도 불의가 없으시고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성품은 죄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반듯이 심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집니다. 그 의를 이루기 위한 첫 번째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로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때 죄인들을 의인으로 바꾸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세례를 받으시므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죄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주님의 구속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사역을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53:3,12)라고 예언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역이 완성된 사실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고후 5:21)라고 증거 합니다.

 

낮아지신 그리스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한없이 낮아지시는 전능자의 자기 비하를 봅니다. 그분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말구유로 자신을 급강하시키셨습니다. 영원한 저주와 사망의 권세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줄에 나와 함께 서신 것입니다. 나처럼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의 사건을 화육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탄절을 통해 기념합니다. 그러나 화육도 낮아진 것이지만 화육의 삶은 더욱 낮아지는 것입니다. 화육은 있는 데 화육의 삶이 없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화육의 삶으로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섬김과 자기 버림의 또 다른 출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이웃을 섬길 때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반듯이 뒤따라야 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 선교사님들의 삶을 살펴 본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한국과 한국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참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화육에는 성공했는데 화육하는 삶에는 실패한 경우를 더러 목격했습니다. 선교지인 한국에 와서 자기 고향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렵던 시절에 기름 보일러를 쓰고 겨울에도 온갖 여름 과일을 먹고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철에 수확했다가 냉동 보관 후 겨울에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몰랐습니다. 미국인은 모두 잘 산다니까 그렇게 사는 것인가 보다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 나서 뒤돌아보니 그들의 삶에 대해 많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들 중 많은 분들이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아주 소수는 화육은 했으나 화육의 삶은 없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제 삶을 뒤돌아봅니다. 목사는 되었는데 목사의 삶은 없는 것이 아닐까? 장로님은 되었는데 장로님의 삶은 없는 것이 아닐까? 직분은 맡았는데 직분자의 삶은 없는 것은 아닐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리스도인의 삶도 있으십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온 그 변화가 삶으로 뒷받침되느냐는 것입니다.


목회를 감당하면서 제게는 마음에 의혹을 주는 두 가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 믿고 변화 받은 사람들의 아름답고 신비한 삶의 모습입니다.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내용이 달라진 그들을 보면 너무너무 신비합니다. 정말 멋집니다. 또 다른 하나의 신비는 예수를 믿기는 오래 믿었는데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입니다. 의혹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실 그리스도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일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도 빠지지 않고 설교도 열심히 듣습니다. 봉사도 하긴 하는 데 자기가 설정해 놓은 만큼은 합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 진정한 화육의 사건이 아직 그들 속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화육하는 중생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삶으로의 화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 모두를 축복합니다.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삶까지도 온전히 변화를 나타내는 진정한 화육의 사건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말구유에 오실 뿐 아니라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시키시는 예수님의 진정한 겸손과 삶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께서 드디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다른 사람이 받는 세례와는 그 의미가 100%다른 것입니다. 죄인이라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죄의식이 발동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생겨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다만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겸손하심으로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 시켜 주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그 분이 죄인들을 대표해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순종함으로 벅차고 감격스러운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바로 물에서 올라오십니다. 그 때 놀라운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기이한 기적적 현상이 많은 사람들이 목도하는 가운데 벌어진 것입니다.

 

첫째로는 하늘이 열립니다. 하늘이 열리는 사건은 여러 성경 인물들이 체험했었습니다. 여러분 야곱을 잘 아시지요? 그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하란으로 가다가 루스라는 광야에서 밤을 지내게 됩니다. 돌을 하나 취해 베게를 하고 고된 몸을 눕히고 잠이 들 때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그는 하늘 문이 열리는 체험을 합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 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고”(28:12) 이 하늘 문이 열리는 꿈은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었습니다. 획기적인 영적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향해 다가오시고 앞으로 펼쳐질 모든 미래를 그분께서 책임지시고 보호하신다는 하나님의 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에스겔서 1;1을 보면 에스겔이 동일한 경험을 합니다. “제 삼십 년 사월 오 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1:1) 이 사건을 통해 에스겔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확증 받는 것입니다. 사역으로 소명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기원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속하신 분인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입합니다. 성령님이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임하십니다. 성령은 보통 내적인 방식으로 일하시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출발점에서는 현상적으로 일하십니다. 앞으로 동행하실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임하심이 비둘기로 나타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무엇보다도 비둘기는 희생 제물을 위한 새입니다.(15:9; 1:15-17; 5:7; 14:21-22) 앞으로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으실 예수님의 사역을 암시해 줍니다. 두 번째로는 비둘기는 평화와 화평의 상징입니다. 죄로 인해 불화되었고 끊어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의 다리를 놓기 위해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입니다. 세 번째 비둘기는 좋은 소식의 메신저이듯이 예수님은 구원의 소식을 죄인들에게 전하실 것입니다. 홍수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던 노아에게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을 때 은혜의 시대가 새롭게 시작됨을 알려 왔듯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이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던 저와 여러분들에게 용서와 죄 사함의 은총이 선포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비둘기처럼 순결하신 주님이( 10:16) 비둘기처럼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인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결코 끄지 않으실 것입니다. 병든 자를 일으키시며 소경이 보게 하시며 저는 자를 뛰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손으로 낙담한 인생을 일으키시고 실패한 인생을 소생시키실 것입니다. 상한 영혼을 치유하시며 아픈 마음을 만져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 놀라운 사역들이 시작됨을 비둘기처럼 임하신 성령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이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가장 분명하게 들어 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는 예수님ㄲ[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심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속을 감당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 분께서 오신 곳으로부터 보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은 죄인과 동일시하시며 화육의 삶으로 출발하시는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는 지를 증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의 사역의 출발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을 확인 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앞으로 이 삼위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이 될 것을 보여 주는 신령한 장면입니다.


여러분, 성도로서 우리의 만족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정이 나를 만족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힘을 가지고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하게 합니다. 내가 낮아지고 겸손의 무릎을 꿇게 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영적 전진을 다짐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은 주님께서 그런 인정을 받고 계신 것을 기록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17절입니다. 여러분, 주의 일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성령의 위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는 확신이 여러분들의 가슴을 가득 채우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성령이 들려주시는 “너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사랑의 선포가 여러분들의 영혼에 울려 퍼지기를 간구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뻐하시는 자녀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십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딸들입니다. 이런 확신이 사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순종하시고 요한처럼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과 은혜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자세를 가다듬을 때가 되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에 합당한 삶을 위하여 우리 모두 깊이 묵상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의 변화된 삶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낮아짐과 순종을 통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하나님의 인정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내 생각과 논리를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면서 세례자 요한처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향해 헌신하고 매진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놀라운 축복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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