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다니엘 3:1-30)

2012 4 22(주일 설교)

들어가는 말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던 바울 사도가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깨닫습니다. 나의 어떤 의로운 행동이나 열심으로도 하나님 앞에 나 스스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는 존재구나!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의를 힘입을 때 내가 의롭게 될 수 있구나! !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복음이구나! 참 진리에 대한 영적 대발견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수치스럽고 초라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전 생애를 바쳐 자랑하고 전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십자가에 숨겨져 있는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 복음의 비밀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6-17; ref. 4:11)

이 믿음으로 인해 바울 사도는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는 이 믿음의 여정에서 만난 고난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바울 사도는 믿음의 사람이요 게다가 사도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고난과 환란을 당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우리로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 왜냐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품었던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는 고난과 위기를 모르는 체 하실 뿐 아니라 응답도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악한 자가 득세하는 것을 모르는 체 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고 심지어는 그 악한 자들을 사용하셔서 믿는 자들을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사실 그렇게 선한 사람도 아니고 착하게 살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믿음대로 산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불신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교회도 안 다니는 불신자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인 믿는 나를 벌을 주시면 여러분 그걸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의 종 선지자 하박국에게 주신 응답입니다.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이 이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통과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고난과 환란이 주는 영적 유익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적용하고 그대로 살았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다 마쳐가는 그가 선언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오늘 본문에도 이런 믿음의 승리자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입니다. 이들의 믿음의 모습을 살펴 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새롭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생명이 살아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본문을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서 묵상하겠습니다.

첫째 단락은 금 신상 건립과 그에게 절하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나옵니다.(1-7) 1절부터 7절입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나셀이 금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크기가 굉장합니다. 오늘 날 도량형으로 말하면 높이가 27m고 넓이가 2.7m입니다. 그런데 그게 순금입니다. 어마어마한 비용과 정성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 금 신상을 바벨론의 두라(Dura) 라는 평지에 세웁니다. 그리고 국가의 모든 고위 관료와 귀인들을 다 모으고 낙성식을 (the dedication of the image)합니다. 얼마나 그럴 듯 하고 위세가 당당했겠습니까? 느브갓나셀 왕의 위엄을 선포하고 감히 넘보는 자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왕의 조서가 선포됩니다. 음악소리가 들리면 바벨론의 모든 백성은 느브갓나셀이 세운 금 신상을 향해 절을 하고 경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그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어 화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풀무불은 “a blazing furnace, 삼킬 듯이 불길이 타오르는 용광로를 말합니다.

이 명령이 떨어진 후 악기 소리를 신호로 해서 출신과 언어가 무엇이 되었든지 모든 백성들이 느브갓나셀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을 합니다. 아마 전국 각처에서 두라 평지를 향해 엉덩이를 들고 모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무슬림들이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엉덩이를 들고 절을 하고 알라를 경배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누구 명령이라고 거절하겠습니까? 예외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왕명대로 했고 모두가 금 신상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일 때문에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전 국가의 모든 백성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살아계신 창조주 야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단락입니다. 고소당하는 믿음의 사람들과 분노하는 느브갓나셀 왕에 대한 기록입니다. 8절에서 15절입니다. 8절을 보면 갈대아 사람들, 즉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고소합니다. 금신상을 향해 절을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바벨론 사람들은 영어성경에 보면 점성가들입니다(astrologers). 그들이 음악 신호가 울려도 금 신상을 향해 절도 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세 명의 유대인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를 고소합니다. 12절입니다. 그 동안 세상 말로 참 잘 나가던 사람들인 데 그만 믿음 때문에 고소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는 자가 바른 믿음 때문에 고발당하는 이런 경우는 참으로 멋지고 거룩한 믿음의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바르게 믿음을 지키는 것 때문에 누구에게 고발 당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혹시 믿음이 너무 좋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정말 멋진 일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여러분을 진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모습입니다. 아니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못하고 부드럽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만약 그러시다면 여러분의 신앙을 세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타협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적당히 섞여서 세상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믿음 때문에 세상이 고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차지도 덮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의 너무 좋은 믿음 때문에 고발하고 핍박하면 영광으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믿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면 영적 승리를 거두고 있는 중인 것을 아시고 용기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고소를 들은 느브갓나셀 왕이 크게 화를 냅니다. 분노를 하면서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도록 명령합니다. 그리고는 직접 문초를 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게 사실이냐?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고 절을 하면 살려 주마! 만약 절하지 아니하면 맹렬이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텐데 누가 능히 내 손에 건져 내겠느냐?” 14절과15절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휴! 끌려 올 때는 곧 바로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직 살길이 있네!”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얼른 절을 하겠다고 왕에게 약속을 하시겠습니까? 때때로 목사들이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설교하는 내용이 자기의 영성인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그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솔직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풀무불은 바로 용광로의 불을 말하는 데 기록에 보니까 그 온도는 보통 1,600도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찜질방에서 70도만 넘어도 들어가기 싫어할 정도로 뜨거운 것을 질색합니다. 그런데 1,600도라니 말이 됩니까? 본문의 상황은 당장 왕의 마음에 맞는 대답을 하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 뜨겁고 맹렬한 불 속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목사인데 뭔가 달라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조금 비겁한 것 같지만 그때 당해 봐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하실 말도 입에 주시고 그 상황 가운데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도 주실 것을 믿습니다.’였습니다. 좀 웃기는 것 같지요? 하지만 큰 소리쳤던 베드로 형님을 생각해 보아도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실 것 같습니까? 목사님이 저 정도시니까 나는 그 보다 못해도 되겠다 위안도 되고 안심도 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통해 배우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되도록 적용하고 힘을 내도록 하십시다.

셋째 단락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가는 세 사람의 멋진 모습입니다. 16절에서 21절입니다. 왕이 불같이 화를 내다가 약간 누그러뜨려서 회유를 합니다. 지금이라도 금 신상에 절을 하면 봐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세 사람의 반응이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비굴하게 떨면서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고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16절을 보면 너무 놀랍습니다. 느브갓나셀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너무 당돌하고 기가 막힌 대답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대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 명확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길게 설명하거나 일부러 대답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 드라마 중에 <파리의 연인>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때 김정은이라는 탤런트하고 박신양이라는 배우가 주인공이었습니다. 둘이 여행을 갔는데 여자 주인공이 멋있는 호수를 바라보면서 묻습니다. “기주씨는 인생에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요?” “, 태영이 너를 만난 그 순간부터 …” 이 연속극의 장면을 보고 있던 아내가 남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 “, 당신을 만나기 전 까지…” 너무 당연한 것을 물으면 이렇게 밖에 대답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을 하면 어떤 경우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 명의 믿음의 사람이 말합니다. 느브갓나셀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도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6-18) 찬양곡 가사가 있지요. 본문을 읽다가 감동해서 지은 고백이지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 주님 뜻을 믿기 때문이죠.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사랑해요.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주셔서 믿는 게 아닙니다. 병을 고쳐 주셔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게 해 주셔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를 들어 주셔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은 가장 초보적인 믿음입니다. 그 차원을 넘어서는 게 장성한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리 금을 수천 톤을 드려 만들어 놓았어도 우상이기 때문에 절하고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순종은 곧 죽음인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이게 바로 오직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모습입니다. 참된 믿음의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명예의 전당, The hall of fame>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바로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세계 최고의 명예의 전당>입니다. 이 세 사람의 믿음의 모습을 히브리서 11 34절에서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한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11:34) 기록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들입니다. 구약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3:17-19) 서론에서 소개해 드린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신앙입니다. 바울 사도의 표현을 빌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문에 나타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단단하게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설사 기도가 금방 응답이 안 되어도, 믿음 때문에 고난과 핍박이 와도, 신앙 때문에 손해를 봐도 오직 믿음으로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이렇게 나오자 느브갓나셀이 분노로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 됩니다. 여기에서 넷째 단락이 시작됩니다.

넷째 단락은 불에 던져지는 세 사람과 구원을 경험하는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22절에서 27절입니다. 느브갓나셀이 분노로 얼굴빛이 변해서 명령합니다. 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를 뜨겁게 해라. 그리고 저 놈들을 단단히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어라.” 명령이 즉시 시행됩니다. 그런데 불길이 얼마나 강했던지 세 사람을 묶어 불에 집어 넣던 병사들 세 명이 불에 타서 먼저 죽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가 불 가마 가운데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극적 상황이 연출됩니다. 풀무불 속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느브갓나셀왕입니다. 불가마 속의 사람들이 죽지 않고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게다가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 말입니다. 그것도 상하지도 않은 채로 멀쩡히 걸어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느브갓나셀이 풀무불 아귀 가까이에 가서 소리칩니다. 지극히 높으신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세 사람이 불 가운데에서 정말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의 입이 벌어집니다. 불에 상한 흔적도 없고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겉옷 하나 타지 않은 것입니다. 불 속에서 금방 나왔는데도 불탄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완벽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벽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43:1-3)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 용사가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여러분을 하나님의 품에 던져 넣으십시오. 그 분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그 분께서 보호하시고 그 분께서 구원하십니다. 풀무불가운데서 건져내는 것은 느브갓나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대단한 힘을 가진 것 같은 세상 권력이 나를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세상 재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금 신상같이 그럴듯한 우상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홀로 하십니다. 그 분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도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만이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고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분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마지막 다섯째 단락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영광을 거두시는 하나님과 더 큰 복을 누리는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기록합니다. 28절에서 30절입니다. 왕의 분노는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하게 드러나자 끝이 납니다. 느브갓나셀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것을 인식하고 인정합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자기가 엄청난 재산을 들여 만든 금 신상이 있고 그것을 경배하며 모든 사람들을 그 신앙에 동참하도록 강요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신앙간증을 하듯 그 하나님의 역사하신 것을 인정하고 직접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입술을 통하여 찬양과 영광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풀무속은 인간의 소망이 끝난 곳입니다. 그러나 타협할 수 없는 믿음의 절개 때문에 자신을 포기할 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며 하나님의 팔에 안으시고 보호하시며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이 영광을 거두십니다. 세 사람이 그들의 믿음의 본질을 위협하는 왕의 절대 요구에도 불구하고 초연하게 죽음을 각오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들은 세상이 감당 못 할 믿음의 용사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그 분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이 그것을 기록합니다. 바벨론의 모든 백성과 각종 언어를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고 그 분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을 향한 심판이 선포됩니다. 이게 바로 이방 왕의 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통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찬송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30절을 보면 왕이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를 승진시키고 명예롭게 하는 것을 기록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을 드리고 하나님을 기대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높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던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시험대에 오르고 세상이 세상처럼 살라고 강요해 올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가는 말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9994 20, 미국Colorado Denver의 한 고등학교에서 두 남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건을 저지른 학생들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이하여 이런 광기 어린 학살을 감행한 것입니다. 해리스와 클리볼드라는 이 두 학생은 학생들을 캠퍼스 한 군데에 모아 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 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음흉한 미소를 띠우면서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몽 같은 공포 분위기 가운데에서도 확실한 신앙의 결단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케이시 버넬이었습니다. 그녀는 죽음의 총구 앞에서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그리고 너희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

          이 말을 들은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네가 믿는 하나님 곁으로 가라1”하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케이시 버넬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일어난 후 어떤 일이 일어난 지 아십니까? 미국 십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케이시 버넬의 순교 앞에 자기들의 비겁함을 한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얼마 후,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케이시 버넬처럼 담대하게 증인으로 서야 하겠다는 신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미국 전역의 각 학교에서는 우리도 케이시 버넬의 길을 따르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케이시 버넬의 순교적 결단을 기념하는 국기 게양대 앞에서 열린 기도회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과 저의 믿음이 시험대위에 오를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때로는 물질로 시험해 옵니다. 때로는 믿음의 근본을 흔드는 의심으로 다가옵니다. 직장에서 타협하라고 유혹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적당히 살라고 속삭입니다. 자녀가 우상이 되고 돈이 우상이 됩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방법대로 믿고 자기가 선을 그은 만큼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자기가 허용하는 한도가 넘으면 광신이고 자기 방법이 아니면 비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같으나 마지막에는 불순종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믿고 살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인본주의적 신앙을 내세웁니다.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믿음을 다잡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진리를 내 신앙의 깃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니까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예수 믿고 세상 복이 즉시 주어지지 않아도 믿고, 기도 응답이 금방 주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믿는 것 그게 진짜 믿음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그 분께서 친히 나를 높이 들어 쓰시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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