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재발견

말씀의 재발견

(열왕기하 22:8-13)

2015년 7월 26일(주일)

들어가는 말

오늘의 서양사회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한 가지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종교 개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종교 개혁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말씀의 재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기치 중 하나가 바로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그리고 "오직 은혜로만"과 "오직 믿음으로" 결국 말씀에서 재발견 된 진리들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이런 말씀의 재발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함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여러분 각자도 성령님이 친히 들려주시는 말씀의 재발견이 있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히스기야를 닮은 요시야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시야는 왕이 된지 2년 만에 자기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유다 아몬왕의 아들입니다. 아몬은 자기 아버지 므낫세처럼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경배했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런 아몬을 살해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의 아들인 요시야를 왕으로 옹립합니다. 그때 요시야왕의 나이가 겨우 여덟 살입니다. 그러나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아버지 아몬이나 할아버지 므낫세와는 너무나 다른 위대한 종교개혁가요 탁월한 믿음의 거장 히스기야왕입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이 어린 요시야왕이 자기 아버지 아몬이나 할아버지 므낫세를 닮은 것이 아니라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요시야왕의 행적을 기록한 또 다른 성경인 역대하 34장 3절을 보면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아직 어린 나이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찾았다고 기록합니다.(대하 34:2) 그의 나이 16세 때입니다. 16세에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로 영적으로 바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20세 되던 해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종교적으로 정결하게 하고 아세라 목상을 비롯한 우상들과 산당들을 제하여 버립니다. 심지어는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우상에게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립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하던 자들의 뼈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온 나라를 영적으로 정결하게 합니다.(대하 34:1-7) 대단히 혁신적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아주 철저하고 엄청난 종교개혁입니다.

하드웨어 수리하기

이런 요시야왕의 모습을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인 열왕기 하 22장 2절에서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고 묘사합니다.(왕하 22:2) 이 멋진 요시야왕이 한 걸음 더 깊숙한 종교적 개혁을 단행합니다. 우상을 다 제거하고 산당을 파괴한 후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는 것입니다. 깨버려야 하는 것을 깨 버리고 반드시 세워야 하는 것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무너진 성전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왕이 된지 18년째 되는 26세 때의 일입니다.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그 동안 성전에 바쳐진 헌금 전체를 성전을 수리하는 데 사용하도록 지시를 합니다. 모든 것을 바쳐 낡고 부서진 하나님의 전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돈을 전부 성전 맡은 감독자들에게 넘겨주는데 그 돈을 회계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항상 진실하게 행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맡은 자들이 평소에 왕이 믿도록 행동했고 왕은 그런 그들을 온전히 신뢰한 것입니다.(왕하 22:7) 가장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신뢰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전수리가 시작됩니다. 소위 가장 필요한 하드웨어가 개혁되고 수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당수리 및 개축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참 귀한 일 아닙니까? 게다가 요시야왕의 할아버지 므낫세는 하나님의 성전에다 아세라 목상을 세웠고 아버지 아몬은 그 우상을 섬기고 경배했는데 그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기록을 쉽게 읽어 내려가서 그렇지 이런 요시야의 이런 행동은 대단한 혁신이고 급진적 변화입니다. 우상에 젖어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옛 신하들이 생각할 때는 젊은 왕이 뭘 몰라서 행하는 철없는 행동으로 받아 들여 질수도 있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대한 혁신이고 전통에 대한 역주행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각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성전수리작업을 시행합니다. 거룩한 도전이고 담대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프트웨어

바로 이때 하나님은 이런 외형적 변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정한 개혁의 계기를 마련해 주십니다. 저희가 오늘 읽은 본문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율법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율법책이 발견된 곳이 어딜까요? 마땅히 말씀을 보관하는 특별한 곳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역대하 34장 14절의 기록을 보면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헌금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했다."고 기록합니다. 헌금함 헌금 속에 율법책이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소중해서 그곳에 보관 했을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그런 의도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율법책은 성전에 지정된 곳에 보관하는 게 당연한 것을 생각해 보면 말씀이 없어도 아무도 찾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곳에 묻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우상숭배와 이방종교에 빠져 여호와 하나님을 잊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주일이 되어도 자기 성경책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는 오늘날 이름뿐인 성도들의 안타까운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이 율법책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잘 제본된 성경책이 아닙니다. 양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 율법책을 말합니다. 율법책을 발견한 대제사장 힐기야가 왕의 비서실장격인 사반에게 이 소식을 전하면서 그 율법책을 그에게 전해 줍니다. 힐기야가 이 율법을 읽습니다. 읽어보니까 이건 대단한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만 알고 있어서 될 사건이 아님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서기관 사반이 즉시 왕에게 보고하러 들어갑니다. 먼저 왕의 명령대로 그대로 준행한 내용을 보고합니다. 성전수리비를 감독자에게 맡긴 것까지 보고한 사반이 왕에게 율법책이 발견된 사실을 보고합니다. "제사장 힐기야가 이 책을 제게 주었습니다."(대하 34:18; 왕하 22:10)

그리고 왕 앞에서 그 율법책을 읽습니다. 10절입니다. 왕이 서기관 사반이 읽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때 요시야왕의 영혼가운데 거룩한 말씀의 Touch가 일어납니다. 그의 영혼이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요시야의 심령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롬 10:17) 영적자각은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영혼에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요시아가 왕의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즉시 옷을 찢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말씀이 그 영혼에 파고 든 것입니다. 이때 그 심령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불태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종교개혁자는 그 개혁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그 영혼에 충돌할 때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가슴을 치는 사람이 가장 진지하고 위대한 개혁가입니다. 바로 요시아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책을 발견한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혼이 그 율법에 기록된 말씀을 재발견하게 될 때 그 영혼은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문자적인 로고스의 말씀이 바로 나를 향한 살아 역사하는 레마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희미했던 영적시야가 분명해집니다. 불확실하던 믿음이 확실해집니다.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던 사람이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심판 앞에 서 있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죄를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사반이 읽은 부분은 불순종에 대한 심판적 경계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었던 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시야왕은 말씀의 내용에 충격을 받아 자신의 옷을 찢으며 통회를 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우상숭배를 하고 불순종한 죄가 하나님의 크신 진노의 요건이 된다는 사실이 요시야를 두렵고 떨리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다의 왕으로서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시야의 태도는 자기에게 들려진 율법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율법의 권위에 대한 진지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권위를 인정할 때 그 말씀 앞에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두려움이 옷을 찢고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받으십니까? 말씀을 들으실 때 어떤 태도로 임하십니까? 말씀이 선포되는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시며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마틴 루터가 말씀을 재발견하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기 전에 그는 말씀 가운데 인간의 불의에 대해 언제나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에 시달리는 그로서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인식가운데 구원을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유혹을 이기기 위해 금욕을 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교회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태도도 말씀의 권위에 대한 일종의 온전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16세기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아무 조건 없이 죄인을 받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이 순수한 은혜와 자비를 통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되는 구원교리를 재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마틴 루터는 복음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도 성경의 권위를 진지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의 교리도 그 교리를 기록해 놓은 말씀의 권위에 대한 온전한 인정이 있을 때 감격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씀의 참된 재발견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른 것을 한 가지 진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는 요시야의 태도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기 전의 루터의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저는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의 단비에 너무 흠뻑 젖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 아닐까요? 너무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고 달래 주다보니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은 잊고 방종하게 행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말씀에 대한 이해의 균형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기록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듯 우리는 너무 값싼 은혜에 젖어 있는 것 아닐까요? 종교개혁이전에 마틴 루터가 경험했던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너무 잊고 사는 게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요시야의 두려움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너무 값싼 은혜에 중독되어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은혜가 쓸모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이 있기에 은혜는 값진 것입니다. 징계가 있기에 용서가 귀하고 영원한 형벌이 있기에 영생이 중요한 것입니다.

1945년 38세의 나이에 독일군 SS에 의해 교수형을 당한 루터교 목사이면 반나치주의 운동가였던 디트리히 본회퍼(1906. 2. 4-1945.4.9)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상품 같은 은혜이며, 싸구려 죄의 용서, 싸구려 위로, 싸구려 성만찬입니다. 교회의 무진장한 창고에서 생각도 없이, 끝도 없이 경박한 손으로 털어내는 은혜입니다. 가격도, 경비도 없는 은혜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설교요, 공동체 훈련도 없이 베푸는 세례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만찬이요,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 이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끊임없이 찾아야 할 복음이며, 기도해야 할 은사이며, 두드려야 할 문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은혜가 우리를 제자의 길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죄를 저주하기 때문이요,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값비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책『나를 따르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자유는 싸구려 은혜가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의 질서를 추종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싸구려 상품으로 전락시키거나, 성도가 은혜를 경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값싼 상품으로 퇴락시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은혜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그 은혜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그토록 철저하고 지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여 그 죄에서 구원하신 우리의 삶인데 어찌 우리가 함부로 그 은혜를 내던질 수 있겠습니까! 참회와 고백, 결단과 참여 없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야말로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헐값으로 바겐세일하거나 끼워 파는 잡화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속적인 집단으로 평가받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교회가 참으로 값비싼 은혜를 선포할 때, 교회 자체도 값비싼 보화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올 때 경고의 음성을 값지게 듣고 요시야처럼 회개할 때 그 말씀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값진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한없이 감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요시야를 보십시오. 사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올 때 옷을 찢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제사장 힐기야를 비롯한 측근들을 불러 명령합니다. 13절입니다.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위대한 말씀의 위대한 재발견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동시에 심판과 공의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 즉시 진정한 통회와 뉘우침을 실천하는 왕의 겸손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제까지 요시야가 주도했던 것은 외형적인 개혁이요 스스로 종교적 자각에서 비롯된 어찌 보면 본질을 비껴가는 형식과 하드웨어의 개혁운동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도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외형적인 것을 바르게 하는 것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열심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재발견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그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채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만날 때 사건이 일어납니다. 깨끗해진 형식 속에 최고의 내용이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것을 기록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 요시야의 거룩함을 향한 변화욕구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그 말씀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형식도 아름답게 내용도 바른 것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형식을 무시하기보다는 그 형식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새로워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은연중에 내 삶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우상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옛 선배들이 늘 해왔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형식은 종교적인데 산당에서 예배하고 이름은 종교인데 아세라와 바알을 내 삶의 한 가운데 모시고 살수가 있습니다. 현대 교회를 휩쓸고 있는 물신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복주의적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비성경적 번영신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사람하고 하나도 차별이 없이 별 수단을 다 써서 돈만 벌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갖다 붙이면 기독교의 거룩함을 옷 입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무것에나 예수 이름을 갖다 붙이면 신앙적인 줄로 착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런 저런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룩한 명칭만 붙이면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을 명확히 보고 요시야처럼 까부수고 제거하며 말씀을 들을 때 거룩한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느혜미야서를 보면 52일이라는 기적적인 짧은 기간에 훼파된 성벽을 재건하는 사건이 기록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던 예루살렘 성벽이라는 하드웨어가 느헤미야의 지도와 믿음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 된 후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온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를 초청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낭독하는 것이었습니다.(느 8:1)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은 다 그곳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영적소프트웨어를 채우는 것입니다. 외적혁명을 일으킨 그들이 내적 개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백성들이 말씀을 깨닫고 울기 시작합니다. 말씀 앞에 마음들이 깨어진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구원의 값진 은혜를 깨닫고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지내며 노예의 삶에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들으며 성회를 열고 신령한 구원의 기쁨을 누립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성벽을 중건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을 재발견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시야의 모든 노력과 열심위에 말씀이 재발견될 때 진정한 개혁의 열매는 맺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의 재발견을 시점으로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께 묻는 기도의 사람들이 됩니다. 훌다라는 여선지자를 통해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언약을 갱신합니다. 말씀의 사람들, 언약의 백성들이 됩니다. 우상이 제거되고 북 이스라엘까지 개혁의 영향력이 확장됩니다. 거룩한 변혁자들이 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당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이방인들의 삶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을 재발견하면서 회개를 통해 진정한 내적개혁을 해나갔습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때 우리는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나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지 못하게 됩니다.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도 죄인을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알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매일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늘 붙잡고 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은혜의 손으로 붙잡고 계신 것을 매 순간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사시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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