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자의 복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 복음 5:7)

2016년 11월 20일(주일 낮 예배)

들어가는 말


우리는 필요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필요한 것들로 언제나 결핍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런 필요 가운데에는 육체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는 건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병원과 약국이 있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합니다. 물질적 필요도 있습니다. 옷도 입어야 하고 음식도 먹어야 합니다. 잠자고 쉴 공간도 필요합니다. 이런 필요를 만족시키려면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또 감정적 필요도 있습니다. 외로우니까 사랑의 필요를 느낍니다. 위로도 필요하고 격려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친구가 있어야 하고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영적 결핍은 더 심각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지 못하면 그 인생은 공허합니다. 왜 오늘 내가 여기에 존재해야 하는 지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하면 허무 속에 허우적대다가 소망 없이 죽어가게 됩니다. 이런 필요로 인해 종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필요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렇게 온갖 필요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필요를 더욱 가중시키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여러분들과 제 속에 있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줍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합니다. 서로 싸우고 속입니다. 서로 자기 주장을 앞세우며 자기가 좋은 대로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죄와 죄악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은 필요를 만들어 냅니다. 법을 필요로 하고 경찰과 강제적 제재를 필요로 합니다. 법정과 형무소를 필요로 합니다. 안전 보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더 필요한 것은 이렇게 죄악이 관영하고 인간의 사회가 악해 질수록 더 큰 치유와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큰사랑이 필요하고 더 깊고 폭 넓은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필요에 대한 처방전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통해 이 필요와 결핍 때문에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세상 속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그 치료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애통하는 자가 되면 세상은 치료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온유한 자가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면 세상은 회복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처방을 주시는 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궁극적 치유자가 되시는 예수님만이 하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몫만큼 우리를 태워 어두움을 밝힐 수가 있고 우리의 몫만큼 나를 녹여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 세상에는 전쟁이 있을 것이고, 인간 학대가 있을 것입니다. 압제가 있을 것이고 불의가 있을 것입니다. 남용이 있을 것이고 착취와 사기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고통 당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압제 당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병든 자가 있을 것이고 죄 짖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내 놓은 하나님의 처방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인 팔복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새로운 처방은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온갖 필요와 결핍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강력한 치료제는 긍휼입니다. 죄인을 향한 긍휼이 죄인을 치유합니다. 정죄와 심판이 아닙니다. 법과 제도가 아닙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자를 향한 긍휼이 외로움을 치료합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긍휼입니다. 상처 입은 영혼을 위한 치료제도 긍휼입니다. 긍휼은 필요와 결핍 속에 소리치는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처방입니다. 


긍휼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긍휼의 한 측면은 참는 것입니다. Webster 사전에는 “긍휼이란 자기가 입은 상처를 넘어서는 인자하고 온화하며 부드러운 마음, 또는 범법자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대해 주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상당히 법적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나 갚아야 하는 빛 등을 감해 주거나 취소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법정에 선 변호사가 형이 확정되기 직전의 자기가 변호한 피고를 위해 판사의 선처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선처가 바로 긍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정의를 요구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죄 값을 치르도록 요구합니다. 그 때 그 죄 값의 너그러운 적용을 말하는 게 세상적 긍휼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정의는 이런 차원을 넘어서는 훨씬 깊고 넓은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동정을 동반하는 하나님 나라의 용어입니다. 율법적인 용어가 아니라 십자가의 언어입니다. 즉 약한 자, 병든 자, 가난 한 자, 핍박당하는 자를 조건 없이 품고 안아주는 자비를 말합니다. 단순한 감정의 물결이 아니라 변화된 성품에서 나오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 표현입니다. 즉 긍휼이란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과 친절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긍휼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인내하고 오래 참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필요에 처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상대방의 인생에 최고의 것이 주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긍휼한 사람은 필요에 처한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고 섬깁니다. 긍휼은 사랑하는 척하지 않고 친절한 척, 돌보는 척하지 않습니다. 긍휼한 사람은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긍휼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상처 준 사람을 참아 주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긍휼은 상대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상대의 감정으로 사물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픔을 같이 느끼고 슬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치유와 회복을 위해 촉매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은 모든 행동을 아무런 기준도 없이 받아주고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짓밟힐 때 그것을 모른 척 하는 것은 거짓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이 가려질 때 그것을 긍휼이라는 이름으로 모른 체 하는 것도 거짓 긍휼입니다. 긍휼은 사람과 그 속에 있는 죄를 구별하는 영적 능력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지만 그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치유와 회복을 주는 영적 권세입니다. 팔복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긍휼은 저와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긍휼을 가진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 사랑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인격, 성령의 감동이 그 삶 속에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을 향해 한없는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는 것을 말합니다. 


긍휼; 하나님의 성품


그러므로 진정한 긍휼은 우리 속에서 출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품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거합니다. 출애굽기 34:6을 보면 십계명을 주시는 여호와가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선포하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여기에서 자비는 긍휼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렘 3:12) 바울 사도도 고백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엡 2:3-4) 긍휼은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긍휼을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삶의 곤고에 긍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적으로 인간에게 공의를 실시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십니다. 이 공의는 긍휼과 자비가 동반된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은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함께 조화를 이룹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이런 사실은 드러납니다. 이런 하나님의 공의를 동반한 긍휼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곳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긍휼이 얼마나 크신지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고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나타내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 때문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의 죄는 사해지고 우리는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즉 긍휼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의 긍휼도 예수님의 희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이 먼저 긍휼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한 긍휼을 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 안에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깊은 의미가 가슴에 새겨질 때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이 영적 파산자임을 절감하면서 스스로 얼마나 죄인인가에 대해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릴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긍휼한 사람이 되는 길은 십자가 밑에서 영적으로 깨어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긍휼의 사람이 되는 열쇠는 나의 존재 자체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긍휼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는 영적 이해가 있을 때에 우리 속에서 그 출발이 시작됩니다. 아무것도 긍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나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할 때 진정한 긍휼은 싹이 틉니다. 그러므로 조건 없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만날 때 가능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우리는 긍휼히 여겨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긍휼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The Chronicle>이라는 신문에 한 흑인 여자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Constance Mitchell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한 백인 난동자에 의해 다른 다섯 명과 함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백인에게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 그 여인은 이 사람을 생명을 위해 구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기자들이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대답합니다. “저는 이 일을 나 자신을 위해 합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치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그저 낚시바늘에서 해방시켜 주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에 당신이 주었던 상처 때문에 지금 당신을 정죄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내 속에서 나를 위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 신문은 그녀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긍휼의 은사를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 긍휼이 그 상처와 증오 투성이 뿐이었던 백인 살인자의 마음을 치유했습니다. 백인과 흑인 사이에 갈라져 있던 깊은 골을 메웠습니다. 긍휼로 인해 사랑의 다리가 놓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긍휼을 베푼 그 여인은 자신 속에 일어난 치유와 회복을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던 아들을 잃고 극심한 고통가운데 몸부림치던 한 어머니의 심령이 긍휼을 실천함으로 치료되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독일의 잔혹한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유태인 예이엘 디무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61년에 나치 히틀러 잔당들을 재판하는 전범 재판이 열렸을 때 유명한 아이히만이라는 참모를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증인으로 나온 예이엘 디무르에게 재판관이 물었습니다. "저 사람을 똑바로 보십시오. 저 사람이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쳐다보십시오.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디무르는 그만 기절했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나자 재판관이 물었습니다. "왜 졸도를 하셨습니까? 과거의 악몽 같은 장면이 살아나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셨습니까?" 그러자 그는 충격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저 사람을 쳐다보니 저 사람이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수많은 우리 동료들을 가스실로 들어가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 앞에 충격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내 자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놀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나도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광기가 있고 미움이 있고 죄가 있고 절망이 있고 불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새로워질 수 없는 인생이며, 주님의 자비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없는 어둠 속의 인생입니다. 나의 죄와 내 속에 있는 어둠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존재임을 인식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깊이 인식할 때 나는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도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나는 내 이웃을 향해 긍휼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긍휼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긍휼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긍휼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해야 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해야 합니다. 수없이 많은 것들이 필요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감각해지고 냉담해지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의 필요나 결핍을 인식하기보다는 우리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묻는 주님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이게 주님의 시각입니다. 


이렇게 긍휼의 눈은 표면보다 깊이 봅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긍휼한 사람은 상대 속에 있는 거부와 외로움과 실망을 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절망과 자기 혐오와 두려움, 도덕적 실패와 죄에 대한 번민을 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재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에게 공격적인 사람들은 그 영혼 속에 상처가 많습니다. 열등 의식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험담하고 깎아 내립니다. 어려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작은 힘만 주어지면 그게 무슨 대단한 권세인 줄 알고 섬기기보다는 힘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영적으로 깊이가 없는 사람일수록 처세나 대화가 형식적이고 율법적입니다. 영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비 본질에 더 신경을 씁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무엇인가 실수하고 있으면 눈길을 돌리거나 그 자리를 피합니다.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나 자신의 모습이고 우리 이웃의 모습입니다. 이들 속에서 무엇을 듣고 무엇을 봅니까? 우리는 이들 속에서 간절한 외침을 듣게 됩니다. 나를 구해 달라는 긍휼을 호소하는 눈빛을 봅니다. 그들의 결핍과 필요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게 바로 표면을 넘어서서 상대를 보는 긍휼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50장을 보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야곱이 죽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보호막이던 야곱이 죽자 혹시 있을지 모를 요셉의 복수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요셉에게 이같이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데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 50:16-17) 이 말을 전해들은 요셉은 진한 동정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 속에서 긍휼을 필요로 하는 간절한 호소를 들은 것입니다. 형들의 마음을 읽은 것입니다.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리어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창 50:18) 무슨 말입니까? ‘처분대로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당신 손에 있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 때 요셉은 말합니다. “두려원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 간곡한 말로 그들을 위로했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합니다. 요셉의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형들 속에 흐르는 두려움과 공포를 본 것입니다. 그들 속에 흐르는 간절한 긍휼에 대한 필요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배반하지 않고 실천 한 것입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중년 부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자녀를 다 짝지어 출가시키고 분가시킨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던 건강이 근래에 갑자기 쇠해졌습니다. 까닭은 무슨 일로 맡아들 하고 다툰 뒤로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서 신경성 질환으로 건강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 부인은 아들이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내리사랑이니까 엄마가 아들을 먼저 용서하고 말을 건네라"고 아무리 권면해도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괘씸한 녀석,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 . ." 하면서 아들에 대한 섭섭함과 배반감을 풀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고집을 피웠습니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그 병이 더 깊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목사님의 충언을 듣고 아들이 얼마나 괴로워 할까하는 시각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속이 상해 할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솟았습니다. 용기가 없고 자존심 때문에 전화도 못할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 속에서 긍휼이 생겼습니다. 사건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병석에서 어머니가 먼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한 사람은 어머니인데 전화를 받은 아들이 먼저 잘못했다고, 어머니께서 먼저 전화를 할 줄을 몰랐는데 죽을죄를 지었다고 통곡하면서 전화기를 붙잡고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그 밤에 어머니께로 달려와 병 문안을 드렸고 아들의 방문을 받은 뒤 어머니의 병세는 점차 호전되어갔습니다. 여러분, 긍휼한 사람이 되는 법은 시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 속에 있는 필요와 결핍을 읽는 것입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연민을 가지고 긍휼을 베풀면 되는데 그러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작은 문제만 있으면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이 문제시하고 사건화 시키기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것입니다. 행복을 파괴하고 안정과 평안을 깨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도 용서하지 않는데서 거창한 일로 커져가고 그 일로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킬 때입니다. 긍휼의 시각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그 때 우리는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그렇다면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성경의 원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7-8에 말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긍휼을 심으면 긍휼을 추수합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가 그 삶의 나무에 주렁주렁 달리게 됩니다. 웃음을 심으면 웃음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용서를 심는 자에게는 용서가 주어집니다. 긍휼과 용서는 언제고 손 붙잡고 함께 다닙니다. 긍휼한 사람은 용서를 합니다. 용서를 하는 사람은 긍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은 세상적 보상으로 반듯이 돌아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가장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고 긍휼의 극치를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피를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 침을 뱉었고 저주를 했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주님은 마태복음 6:14-15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저와 여러분들의 보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큰 긍휼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용서의 은총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심판의 날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긍휼의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축복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긍휼을 실천하고 용서를 실천하는 치료제가 되어 세상을 더 맑게 할 수가 있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전하고 격려와 위로를 나누어주는 사랑의 전령이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이방인들이 구하는 그 모든 것이 더하게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나가는 말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긍휼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시험하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입니다. 우리가 만약 긍휼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오직 한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고 여전히 예수밖에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아직 죄 가운데 있고 아직도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구원의 체험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아직도 긍휼의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되지 못한 다면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인이거나 거짓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일 것일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긍휼한 사람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긍휼은 나를 긍휼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긍휼을 입은 증거요 내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느 날 한 병사의 어머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나아와서 자기 아들을 용서해 줄 것을 간곡히 탄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병사가 이미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두 번이나 지었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저는 공의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긍휼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대의 아들은 긍휼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니라.” 그 여인은 황제를 행해 소리칩니다. “황제여, 만약 제 아들이 긍휼을 입을 만한 자라면 긍휼을 간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긍휼을 얻을 수 없는 아이이기에 황제의 긍휼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대의 아들에게 긍휼을 베풀겠노라.” 그리고는 그 여인의 아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것입니다. 바로 이게 긍휼의 본질입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실천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필요에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긍휼은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 없는 상대를 행해 다가가서 그 사람의 절대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긍휼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바로 옆에 사람을 보고 말하십시다. “조건 없이 당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긍휼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긍휼의 사람이 되어서 긍휼히 여김을 받으시는 축복을 매일 매일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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