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피하는 인생

여호와께 피하는 인생

(시편 11:1-7)

2016 11 13 (주일설교)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당황스러울 때가 언제일까요? 자기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 줄 것 같았던 사람이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기본에서 벗어난 이상한 제안을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함정일 때 황당함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그런 제안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근본을 흔드는 것이라면 더욱 그럴것입니다. 우리의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본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향한 믿음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가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 믿음을 흔들며 다가오는 유혹이라면 정말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세상은 조롱하듯 믿음의 핵심을 우습게 말을 합니다. 게다가 나를 가장 잘 알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것도 내가 평안할 때가 아니라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렇게 속삭입니다. 나는 기도하며 하나님의 품을 피난처로 삼고 있는데 쓸데 없는 짓 그만하라고 말합니다. 예배만 드리면 다 해결되느냐고 조롱합니다. 기도만 하면 다 되느냐고 비난합니다. 그때 우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제안을 받는 시인의 모습에서 시작됩니다.

네 산으로 도망하라.

본문의 저자는 표제가 보여 주듯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언제고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고 그분의 품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가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짓는 그 참담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인식하며 그분 앞에 큰 두려움을 갖았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며 그분의 품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위요 산성이며 안식처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쫓기고 압살롬에게 추격을 받으면서도 결코 인간의 방법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다윗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을 보호하고 지켜주는데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적인 방법을 쓰라고 권하는 악한 자들의 속삭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쓰는 순간에도 여전히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듯이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가 1절입니다.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현재 다윗이 의지하고 믿고 있는 여호와의 품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기 위하여 온전하게 자신을 헌신하고 있던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기득권과 안전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불타버리고 무너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건축을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그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붙잡고 기도하면서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그때 산발랏과 도미야 그리고 게셈이 여러가지 음모와 술수를 써서 느혜미야를 살해함으로 성벽 재건 공사를 중지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느혜미야는 오직 기도와 성실로 일을 진척시켜 나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벽공사가 잘 진척되어 성벽 문짝만 달면 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급해진 산발랏돠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사자를 보내어 느헤미야를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속에 예루살렘 성안에 머물고 있는 느헤미야에게 그곳을 떠나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안전한 곳에서 만나 평화협정을 맺자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입니다. 느헤미야가 속지 않자 다섯 번을 반복해서 위협도 하고 그럴듯한 말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피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품을 피난처로 삼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낼 때 세상은 그 품을 떠나라고 유혹합니다. (6:1-9) 하다하다 안되자 느헤미야의 측근인 스마야를 뇌물로 매수한 후 느헤미야를 유혹하게 합니다.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안에 머물고 그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10:10) 느헤미야는 레위인도 제사장도 아닙니다. 그런 그를 제사장들만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성전에 들어가 피신하게 함으로 죄를 범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 방법을 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깨달은 바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나를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더라 ( 10:12-13)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함정을 파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쓰고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품을 벗어나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오믈 본문 2절을 보십시오. 그렇게 말한 악인이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이지요?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악인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11:2) 스마야가 느헤미야에게 쓰는 방법과 다윗의 원수가 다윗에게 쓰는 방법이 똑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목적도 똑같습니다.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어 멸망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활로 쏘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악한 의도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과 역경, 위기와 위험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이 직면하게 되는 궁극의 문제는 바로 이런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냐 아니면 나 자신의 방법이나 세상이 제시하는 방법을 쓸 것이냐입니다. 누가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이 질문에 답을 주기 전에 먼저 다윗은 엄청나게 중요한 질문을 한 가지 합니다. 우리를 둘러치고 있는 암담한 현실의 모습 배후에 가장 중요한 배경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3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실까요?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When the foundations are being destroyed, What can the righteous do?” ( 11:3) 이 터가 무너진 상태가 바로 다윗에게 여호와의 품을 떠나 산으로 도망치라고 말하는 배경입니다. 배경에 압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과 환경에 눌리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너지는 기초를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준을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호주 국회가 동성결혼을 합법화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가장 중요한 가정의 터, 즉 결혼에 대한 성경적 기초가 무너지면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사탄이 속삭입니다. 고집부리고 잘난척 하지 말고 적당히 세상이 하는 대로 따라 살아! 자기들 좋은 대로 하라고 해! 여호와의 품을 떠나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도덕이라는 가치기준이 땅에 떨어지고 윤리라는 터가 짖밟히는 세상에서 어떻게 말씀대로 살지? 너무 힘든 것 아니야? 나도 적당히 사기치고 나도 적당히 내 이익이나 챙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산으로 도망하라는 음성입니다. 진화론으로 창조론이 공격을 받는데 그럴듯 하네. 성경 말씀이 옳은 거야? 어떻게 하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적당히 말할까? 네 산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사회정의는 사라지고 모두가 적당히 악을 행하면서 은근슬쩍 눈을 감고 살아가는 데 성도인 나는 어떻게 하지? 그때 들려오는 유혹의 음성이 바로 여호와의 품을 벗어나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관들의 터가 흔들리고 기초가 위협받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바로 적당히라는 생각 아닙니까? 어떻게 말씀대로 다하고 살아! 적당히 해! 아닙니까? 이때 어떻게 하지? 이런 질문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 성도들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과 압도해 오는 세상논리에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어찌 할바를 몰라 머뭇거릴 때가 많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붕괴되는 것을 일상의 삶가운데 목도하면서 무능력하게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사회정의가 부정되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 당황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속에 유혹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적당히 고개를 숙여. 그리고 조용히 네방으로 들어가 너나 잘 챙겨. 네 애들이나 적당히 키우고, 네 가정이나 평안하게 지켜. 이런 유혹이 내게 밀려 올 때에 정답은 무엇일까요? 다윗이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까 다윗이 이 질문에 대해 주고 있는 대답은 무엇입니까? 의인이 무엇을 할까? What can the righteous do? 여러분 정답을 알려 드릴까요? 계속해서 의로운 존제로 사는 것입니다. They can go on being righteous. 그리고 사회의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And they can stand against the evil of their society … 그리고 한 가지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품을 떠나 자기의 산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One thing they must not do is, flee to the mountains.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 하는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의인이 무엇을 할까가 아닙니다. 진짜 바른 질문은 의인은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입니다. To whom shall the righteous look?” 터가 무너지면 의인은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 입니다. 스스로를 바라보고 주변을 둘러보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바라보면 할 수 있는 것이 엄청납니다. 삶의 기초가 흔들릴 때 정말 믿는 의인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기본이 와해될 때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게 믿는 자가 하는 일입니다. 그게 믿는 자가 승리하는 길입니다.

도망가지 않으시는 하나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혹시 사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자기가 의지하는 산으로 도망을 갈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피해 달아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윗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도망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다윗이 피난처로 삼은 하나님은 환경을 피해 달아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자기의 성전에 계신 분이십니다. 자기의 하늘 보좌에 좌정하시고 인생을 관찰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11:4) 인간세상에 도덕과 윤리가 무너져도 하나님은 그들을 통치하십니다. 정의가 부정되고 공의가 굽어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견고하게 붙잡고 계십니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잃어서 도저히 안된다 하는 상황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안 믿어 주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분석하고 오류를 찾아내려고 하고 흠을 잡아도 성경은 여전히 진리이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불신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존재를 부정해도 그 말씀은 바로 그들을 심판하는 절대기준이고 그 성경의 하나님은 바로 심판주가 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정하고 그분의 왕되심을 배척해도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넘어 부활하셨고 그분의 때에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 모두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라고 질문하는 게 아닙니다. 터가 무너지면 누구를 보아야 할까?”바로 성전에 계신 여호와, 하늘 보좌에 좌정하시고 인생을 살피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정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의 품을 떠나 새같이 산으로 도망하라는 거짓과 유혹에 속지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급한데도 여호와는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시험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대해 5절이 답을 줍니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시험하시는 하나님. Test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천히 움직이시는 것처럼 느껴질때 없으신가요? 하나님께서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때 없으신가요? 그런때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아닙니다. 무관심한게 아닙니다. 그분의 잠잠하심은 활동의 정지가 아닙니다. 집중하시는 것입니다. His stillness is not inertia, but concentration. 의인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기대하시고 악인 돌아 오시기를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시험에 통과해서 성장하고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문화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때 의인들에게는 시험입니다. 하나의 test입니다. 믿음을 버릴 것이냐? 그 문화에 동화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으로 그 문화에 침투해 들어가 그리스도를 심을 것이냐? 시험입니다. 통과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의인의 믿음은 성장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증명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거두십니다. 악인들에게도 하나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의 악행이 바로 도덕과 윤리를 허무는 원인이 되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사회정의를 부정하게 하는 주체인 것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돌아오기를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세상적 방법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답인 여호와를 알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안전의 포구로 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을 피난처로 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런 소망을 갖으실까요? 스스로 장차 악인들에게 행하실 일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는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셨습니다. 아직 행동이 아닙니다.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바로 6절입니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하나님은 단지 마음으로 악한 자를 미워만 하시고 멈추시는 분이 아닙니다. 감찰하시고 시험해 보시고 마침내 심판을 준비하시고 실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마 악인들은 여호와의 품에 피한 자들을 유혹해서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하고 화살에 화살촉을 재이면서 쏠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심판을 준비하시고 행하십니다. 불과 유황으로 태우시고 악을 소멸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의인의 소망이 있습니다. 악이 심판되지 않고 정의가 세워질수 없습니다. 악인이 벌을 받지 않고 의인이 상을 받을 수 없입니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모순됩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의인

그러므로 다윗은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7절입니다.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11:7) 악인의 최후가 분명하듯이 의인의 마지막도 분명합니다. 믿는 자가 믿음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믿음에 따를 보상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터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의롭게 살려고 여호와를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여호와만이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안전과 보호의 성채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길수없는 원수와 대적들을 그분이 친히 다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넘기 힘든 상황, 극복하기 힘든 현실속에서 그분이 나를 품에 안고 함께 통과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최후의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편하게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다 용서하시고 모두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니면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요. 하지만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악한 자의 종말이 따로 있고 의인의 종말이 다릅니다. 심판이 있고 상급이 있습니다. 영원한 사망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현재의 상황에 압도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관하고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의 눈을 들고 마지막 최후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을 주목합니다. 의롭게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절대로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유혹의 속삭임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분을 기대하고 그분께 소망을 둡니다.      

여러분, 삶이 어려우십니까? 일이 꼬이고 문제가 복잡합니까? 계획한대로 되지 않고 상황은 더 악화되는 것같습니까? 주변이 조롱하며 네가 믿는 하나님은 너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말합니까? 새 같이 네 산을 도망하라고 속삭입니까? 다윗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왕이었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에 처해 고통의 몸부림을 친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가슴이 무너질 정도로 답답한 경우가 수없이 많았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싶을 위기도 많았습니다. 환경은 적대적이고 사람들은 다윗을 배반했습니다. 세상을 지탱하던 중요한 기초와 터들이 무너지는 것같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때 의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박국 선지자가 정답을 선포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 시편기자가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로다( 46:1-3) 여호와를 바라보며 그분께 피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 46:10-11) 어떤 상화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으시고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를 주목하실 때 그분이 주시는 승리와 성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때 문제들이 해결되고 새로운 축복의 문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품에 안고 보호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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