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별들처럼

빛나는 별들처럼

(Shining as Stars)

(빌립보서 2:12-18, Philippians 2:12-18)

201596(주일 예배)

들어가는 말

 

요즈음 한국 교회는 한반도의 정치와 군사 상황만큼이나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발표된 한국 갤럽의 2014년 종교 분포도에 따르면 한국의 개신교인은 종교를 믿는다고 대답한 전 국민의 50%중에 21%를 차지했습니다. 불교가 22%, 가톨릭이 7%로 집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내 개인 생활에서 중요하다고 대답한 사람은 전 국민의 52%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다가 48%였습니다. 비 종교인의 종교에 대한 호감 종교는 불교 25%, 천주교 18%, 개신교10%, 그리고 종교에 관심 없다는 48%였습니다. 한국 갤럽의 신뢰도는 95%정도이고 오차 범위는 2.5%입니다. 지난 2년 사이에도 개신교는 약간의 감소가 있었습니다. 국내 3대 종교 중 오직 개신교만 숫자의 감소세를 보인 것입니다. 신뢰도 조사에서는 개신교가 가톨릭과 불교에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 같은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교계에서는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반성하고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자고 강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정부나 사회가 교회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개신교인 숫자를 적게 발표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사회참여와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전도와 영혼 구원을 소홀히 한 결과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반면 진보-중도 진영에서는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며 세상의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전혀 상반된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속해 있는 개신교가 현재 어떤 상태라고 진단하십니까? 만약 위기라면 이런 개신교의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계십니까? 이 명제에서 여러분들과 제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개신교의 위기에 대한 해석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여러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석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물론 목사로서 저 자신의 위기에 대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열성적인 전도자들이 타 종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불구하고 왜 개신교인의 숫자는 점차 감소하는 것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외적 요인에서 보다는 내적 요인에서 그 위기의 정체를 찾아보는 게 바른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마이너스 성장에 따른 양적 감소와 사회적 영향력의 쇠퇴, 반 기독교적 분위기 확산 등은 외적 요인에서 기인했기 보다는 내적 원인에서 출발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저는 이런 현상의 주된 원인이 기독교인들의 Moral Hazard, 도덕적 해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세습 논란, 교회 재정의 사적 유용, 마치 중세 시대의 교회로 돌아가는 듯한 일부 성직자들의 타락된 모습이 성스러운 직분자로 존경해온 사회적 분위기를 급격하게 실종시키고 기독교의 위기를 초래하는 데 큰 몫을 감당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지도를 받는 평신도들은 물질축복에 치중한 기복신앙과 개인 이기주의에 빠진 편협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사회적 공감과 종교로서 거룩한 존경을 얻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반 기독교적 정서와 사회적 영향력 감퇴 현상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가르친 대로 실천하지 않고 배운 대로 살지 않은 우리 모두의 삶이 오늘의 기독교의 위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에서 그 위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빛나는 별:- 맨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

 

이런 우울한 기독교의 현실을 생각하면 끝이 없는 어두움의 터널에 서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을 하나 발견하고 다시 소망을 추스르게 됩니다. 성도로서의 옷 매무새를 다시 고쳐봅니다. 여러분, <맨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를 아십니까? 저는 이 할아버지를 <어둠 속에 빛나는 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다큐멘터리 작가인 김우현씨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15년전에 제작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40년이 넘게 맨발로 걸어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던 분이십니다.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며 광인처럼 고독하게 나라 사랑과 복음을 외쳤던 분이십니다. 가슴팍에는 종이판을 걸고 머리에 쓴 모자에는 손으로 적은 문구를 꽂은 기이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선생님은 그 웃는 얼굴, 웃는 안광, 김구 주석 꼭 닮았어, 축하합니다!” “미스 코리아 유관순! 미스터 코리아 안중근! Why two Korea?” 사람들은 한낮 우스개 소리로 여겨 무시하거나 킥킥거리며 웃었습니다. 특별히 지하철 통로를 따라 걸어 다니면서 또는 지하철을 타고 복음을 전하던 맨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아시는 분계십니까?

최춘선 할아버지는 1920년 평안북도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한 선각자였습니다. 김구 주석과 독립운동을 함께 한 애국지사였습니다. 동경대 총장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일본의 지성을 배출하고 우리나라의 김교신, 함석헌선생 등에게 영향을 끼쳤던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저항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빈민 선교의 대부라고 불리는 실천주의 목회자 가가와 도요히코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5개 국어를 구사하고, 5남매를 교육가로 키웠습니다. 엄청난 부자였지만 부자이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김포에 있는 수 만평의 땅을 월남한 이북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고 30여 년간을 나환자들을 돕는 일을 하셨고 걸인들에게 매일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분은 가르친 것을 몸소 실천했던 목사였고 배운 것을 그대로 살아냈던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예수님의 표상으로 진정한 헌신과 충성된 사명자의 삶을 살다가2001 9월 그분의 삶의 공간이었던 지하철 1호선 의자에 앉은 채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이 묻힌 애국지사묘역 906호에는 할아버지의 자녀들이 새긴 다음과 같은 묘비문이 적혀 있습니다. “일제 치하 암흑기에는 나라의 광복을 위해, 광복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과 평화를 꽃피우기 위해서 애쓰신 맨발의 전도자 아버님의 그 뜻과 믿음을 저희 자손들이 이어 받겠습니다.” 저는 <맨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를 개인적으로<어둠 속에 빛나는 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기독교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이 어두운 시대에 명멸하는 별과 같이 소망의 빛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나는 별들처럼

 

오늘 저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어두운 세대 가운데 빛나는 별들처럼 살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발견하게 되는 한 가지 지혜는 모든 것은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른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잘못 된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 바로 그것을 고치고 수정할 수 있는 가장 절호의 기회입니다. 병의 원인과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면 치료 방법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저희는 현재 기독교가 경험하는 위기의 문제점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고 그 문제의 핵심에는 도덕적 해이, 즉 성경적 가르침이 삶으로 적용되지 않는 모순이 도사리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인 한 것은 그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인 입술의 고백과 많은 차이를 나타내는 삶의 모습은 바로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들과 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 바울 사도는 빛나는 별처럼 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성도로서 빛나는 별처럼 사는 삶일까요?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들이 빛나는 별처럼 세상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참된 복종의 모습으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12) 두 번째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행함으로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14) 세 번째는 기쁨으로 헌신하므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17-18)

 

참된 복종

 

첫째로 참된 복종으로 별처럼 빛을 발하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2) 바울 사도의 서신서를 보면 흥미로운 것 중 한 가지는 언제나 복음의 실용성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언제고 교리와 그 교리에 대한 의무적 행동을 연결시켜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떤 강령을 가르칠 때는 그 강령에 맞는 성도로서의 성품을 연결시켜 가르칩니다. 믿음을 가르칠 때는 삶을 연결시킵니다. 사실 이런 두 측면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들입니다. 교리는 있고 그 교리에 맞는 의무가 이행되지 않으면 그 교리는 소용없습니다. 강령은 정하고 그 강령에 맞는 성품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거짓 강령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의 강령은 사랑의 성품과 사랑의 행동이 뒤따라야 그 강령이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다고 고백하고 믿는 대로 행하지 않으면 거짓 믿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2:7)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2 1-11절에 그리스도의 겸손한 삶을 설명해주고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본보기로 삼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라고 행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는 행위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모습이 바로 참된 복종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복종의 삶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첫째는 누가 보고 있거나 그 자리에 있으면 복종하는 것입니다. 매우 일반적인 복종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누가 보면 잘합니다. 왜냐하면 보고 있는 자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보고 있는 것이 내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일 때 그렇게 합니다. 보고 있을 때 보고 있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면 그들에게 어떤 평판을 얻을지 두렵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잘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모습을 골로새서 322절과 23절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 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3:22-23) 은밀하게 보고 계신 하나님 앞에 행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고 있을 때 잘 복종하는 것은 가장 초보적인 복종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사도가 격려하는 복종의 모습은 이런 수동적 복종에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이것이 두 번째 복종의 모습입니다. 차원이 다른 복종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한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복종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양심을 기쁘게 하는 복종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복종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복종의 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복종의 모습입니다.

 

저는 가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일하다가 그들에게 실망한 분들의 이야기들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누가 보나 안 보나 열심히 일하는 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입만 살았지 전혀 성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크게 실망하고 더 덕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가끔씩 듣게 됩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일을 시키는 감독관이 있으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면서 기가 막히게 복종하는 데 그 사람만 눈에 안 보이면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의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긍정적 빛을 발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보거나 안보거나 참된 복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누가 보면 그리스도인이요 안 보면 비 그리스도인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복종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별처럼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는 성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 순간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아가는 면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의 반사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는 행함

 

두 번째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기가 없게 행함으로 빛나는 별처럼 살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원망과 시비는 영어로 “murmuring or grumbling and disputing 또는 complaining and arguing”입니다. “중얼거리면서 뒤에서 말을 하는 것과 말다툼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평하고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의 위험성을 고린도 전서 10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민수기 21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음식에 대한 불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21:5) 그 때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어갑니다. ( 21:6)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경험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불평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조금만 헌신을 요구하면 중얼거리고 뒷말을 합니다. 무엇을 조금만 손해를 보면 투덜거리고 억지를 부립니다. 봉사하면서 불평하므로 그 공로를 다 까먹습니다. 전혀 영적이지 않은 작고 쓸데없는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므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일치와 연합을 해칩니다. 부정적인 언어, 불신의 언어로 성도들의 사기를 꺾고 목회자들의 사역의지와 헌신에 찬물을 끼얹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말씀은 권면합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기가 없이 하라.(2:14) Do everything without complaining (grumbling) and arguing. In everything you do, stay away from complaining and arguing. 모든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원망과 시비는 영적 에너지를 쓸데없는 데 허비하게 만듭니다. 어떤 것이 되었든 의논이나 협의가 아닌 논쟁과 불평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연합을 해칩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사탄이 쾌재를 부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원망과 시비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교회 공동체에서 세상으로 확대시킵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이 세대 가운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바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는 성도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15절입니다. 성도는 무슨 일이든 처리하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시비를 걸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방법으로 평안 가운데 해결하는 것입니다. 불평이 아니라 건설적인 방향제시를 하고 문제점만 지적하는 불평이 아니라 본인이 그 일을 위해 무엇을 헌신할 것인가를 제시하는 책임적 존재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3절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가운데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이라면 할 수 있는 언어를 우리가 말하고, 그분이라면 행하실 삶의 모습을 우리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삶을 살 능력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미 빌립보서 1 19절에서 이야기 한 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사역하심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순종의 분량만큼 우리 속에서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헌신하고 순종해 나갈 때 우리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는 성도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저와 여러분들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이 세대 가운데 빛나는 별처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하는 헌신

 

세 번째로는 기쁨으로 헌신함으로 빛나는 별처럼 살수가 있습니다. 16절에서 18절은 바울 사도 자신의 헌신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섬김과 헌신의 삶을 말합니다. 그 삶의 상급을 마지막 때에 반듯이 받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자기의 헌신이 결코 헛된 수고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으로부터 비롯되는 희생과 봉사 위에 자신을 마치 전제와 (drinking offering) 같이 드려도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헌신 할 때 바울처럼 기쁨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희생과 봉사가 물질일 수 있습니다. 에너지나 노력 봉사일 수가 있고 시간일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삶을 희생하며 섬겨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누군지 이십니까? 불평하며 짜증을 부리며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봉사하고 섬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주님이 물질 주시고 건강 주시고 시간 주시고 믿음 주셔서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아무것도 없어서 못 섬기는 것이 불행한 것입니다. 물질 없어서 못 섬기고, 건강 잃어서 봉사 못하면 안타까운 것입니다. 믿음 없어서 헌신 못하고 시간 없어서 섬기지 못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질로 봉사할 수 있는 것은 내게 믿음과 축복의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모습으로 교회를 돌보고 어려운 일들을 감당하는 것은 그래도 건강이 주어졌고 시간과 에너지가 있다는 축복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섬기고 봉사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수고를 수고로 여기지 않고 거룩한 특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선교가 가능하고 어떻게 진정한 헌신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런 것이 봉사와 섬김에 대한 바울의 견해입니다. 헌신과 희생에 대한 바울의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의 이런 희생을 통해 빌립보 교회가 힘을 얻고 복음 안에서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6절입니다. 그런 자신의 수고를 통해 빌립보 성도들의 성장과 그리스도안에서의 자람이 자신에게 궁극적인 상급을 가져다 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편지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여러분, 우리가 진정 주님 다시 오실 때 그분의 상 주심을 기대하는 재림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라면 우리가 복음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어떤 희생과 헌신을 하더라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도 오히려 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헌신과 섬김을 기쁨으로 실천함으로 교회와 세상 가운데에서 빛나는 별처럼 살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봉사하실 때 기쁨으로 하십시오. 무엇인가 교회와 세상에서 희생하실 때 그 자체를 특권으로 알고 기쁨으로 하십시오. 헌신하실 때 기꺼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즐겁게 하십시오. 섬기실 때 행복한 마음으로 찬송하며 하십시오. 그게 바로 빛으로 드러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 위기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합니다. 호주는 안전하다. 지금 같이 평안한 시대에 위기를 말하다니 잘못된 말이다. 오히려 위기감을 조성하는 좋지 못한 태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 경고합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 사탄은 그 틈새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경각심을 느끼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해이하게 입만 살아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축복의 자리를 점령당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바로 우리가 위기 가운데 있음을 증명해 주는 증거들입니다. 고백과 삶이 다른 이중적 신앙 구조가 바로 여러분들과 제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핵심적 원인입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오늘 본문이 보여준 교회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발하는 이 시대의 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곳곳에서 또 다른<맨발의 최춘선 할아버지>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하철이나 거리로 나가서 맨발로 다니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처럼 여러분들의 전 재산을 다 누구에겐가 나누어 주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작은 별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제 깨어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작업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입술의 고백과 삶이 너무도 다른 도덕적 해이를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안의 모습과 교회 밖의 삶이 너무도 다른 모순의 신앙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의 <맨발의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우주에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처럼 이 시대의 어두움 가운데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첫째 참된 복종의 모습으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행함으로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기쁨으로 헌신하므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 모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교회에서나 사회 어디에서든지 여러분들이 가는 곳 마다 이런 삶의 모습으로 인해 흠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시는 은총과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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