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우정

그리스도인의 우정

(Christian Friendship)

(빌립보서 2:19-30, Philippians 2:19-30)

20159 6(주일 청년 예배)

들어가는 말

 

Charles Dickens라는 영국의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가 쓴 유명한 소설 가운데<두 도시 이야기, A Tale of Two Cities>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그가 인용한 요한복음 151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13) Charles Danny Sydney Carlton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Danny는 지하 감옥에 던져져서 다음 날 아침 단두대로 (guillotine) 갈 젊은 프랑스 남자였습니다. Carlton은 영국에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 인생을 마감하려는 무익한 변호사였습니다. Carlton Danny의 구금에 대해 듣고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이 지하 감옥에 들어가 탈출한 Danny의 옷으로 바꾸어 입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Danny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날입니다. Sydney CarltonDanny를 대신해서 단두대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갑니다. 친구대신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는 것입니다. Dickens는 이 이야기를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주는 것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다.고 우정을 정의합니다. 십자가에서 죄인이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고전적인 우정의 극치를 보여 주는 예화로 오랫동안 인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우정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C.S Lewis는 그의 책 <The Four Loves, 네 가지의 사랑>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우정은 모든 사랑 중 가장 인간적이며 행복한 것이었고 인생의 면류관이요, 미덕의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와 비교를 해보면 우정은 무시되어지고 오히려 아주 보잘것없는 어떤 것으로 취급합니다. 우정이 인생이라는 향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기분 전환용이나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어떤 것으로 여깁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참된 우정을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것의 참 가치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정 없이도 살수 있고 양육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정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우정이라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불신하기 까지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도 우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그렇지만 기독교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인의 우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교회 생활의 핵심적 가치가 되어야 하고 중심이 되어야만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33:11) 모세가 하나님에게 친구와 같이 여겨진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에게 친구와 같은 대상들입니다. 창조의 질서 속에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우정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포함합니다. 결혼관계 속에서도 부부간의 친구 같은 관계와 우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 이후 이 우정의 관계에 금이 가고 손상이 생겼습니다. 마치 고슴도치와 (hedgehog or porcupine) 같이 추운 겨울에는 함께 몸을 뭉치고 살아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서로를 가시로 찌르고 공격하며 떨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런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2:14)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셨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그러므로 회복된 우정과 친구관계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과 똑같은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분도 저와 여러분처럼 친구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의 선택하신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 가운데에도 특별히 가까운 세 명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요한, 베드로가 그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결혼 그 자체보다 더 광범위하고 중요한 게 우정일 때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우정이 결혼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기도 합니다. 부부가 이성의 만남을 넘어서는 동반자적 우정의 관계를 깊이 맺고 있을 때 그 결혼은 견고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깊이 있는 우정을 나눌 친구가 있으십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은 부부간에 이런 동반자적 우정의 관계가 잘 누려지고 있습니까?

 

영적 우정

 

저희가 묵상하는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우정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사도가 경험하고 있는 두 인물과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 묶임이 있는 우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바울을 비롯한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로디도 이 세 명의 주인공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동일한 성정을 가지고 육신의 연약과 많은 단점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정의 모습은 매우 특별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따라야 할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표식 네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는 순례의 길에서 이런 우정을 베푸는 친구들이 되고 그런 우정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표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참된 사랑(Genuine Love)

 

첫 번째 참된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표식은 참된 사랑입니다. 디모데는 더베나 루스드라 출신일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유니스라고 불리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외할머니는 로이스였습니다. (딤후 1:5)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인으로 자랐고 다른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디모데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바울 사도를 통해서였고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깊이 사랑했습니다.(고전 4:17) 그리고 그들은 영적으로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됩니다. 물론 바울이 나이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우정은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처럼 묘사합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딤전 2:22) 오늘 주어진 본문22절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나이가 동년배로서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이가 더 많은 친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정은 나이를 초월합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그 중 한 예입니다.

 

디모데와 바울은 많은 일들을 함께 겪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자주 동행합니다.( 18:5; 20:4) 오늘 편지의 수신자인 빌립보에도 함께 갔습니다.( 16)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갇혔었습니다.( 1:1; 1:1) 그래서 바울 서신에 보면 편지도 디모데가 함께 쓰는 것으로 인사를 합니다.(살전,; 고후, , ) 우리가 묵상하는 빌립보서 1 1절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와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정보를 보내고 충고를 하거나 격려를 하기를 원할 때 자기를 대신해서 자주 디모데를 보냅니다.( 2:19-23; 살전 3:6; 고전 4:17; 16:10) 그때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충성을 다했고 바울은 그런 디모데를 온전히 신뢰했습니다.(고전 4:17)

 

그런 디모데를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속히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네게 없음이라. 19 20절입니다.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 바울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자기 유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목도합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21, 22절입니다. 디모데에게는 다른 사람을 향한 참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New York 전화회사에서 전화통화를 하면서 사람들이 대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무엇인가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단어일 것 같습니까? 그것은 인칭 대명사인 I, 즉 나”라는 단어였다고 합니다. 500통의 통화 내용을 조사한 결과 대화 가운데 이 I라는 단어가 사용된 횟수는 자그마치 3,990번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관심이나 사랑이 없는 자기중심적 인간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W.E. Gladstone이라는 사람은 Selfishness is the greatest curse of the human race. 이기심이 인류의 가장 큰 저주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친구로 자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두 사람 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디모데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디도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라고 칭찬합니다. 25절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바울에게 뿐 아니라 빌립보 교회 공동체에게도 충성스러운 친구였습니다. 바울을 위해서는 빌립보 교회를 대신해서 사자가 되어 헌금을 가지고 와서 바울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을 하는 도중 병을 얻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사모하고 그들이 자기로 인해 염려에 쌓인 것을 오히려 걱정했습니다. 25, 26절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개인적인 고통을 경험하게 될 때 그 일들을 통해 진정한 색깔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병이 들어 죽음의 입구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근심했습니다. 자기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할 빌립보 교회성도들을 걱정한 것입니다. 마치 가족들이 알면 걱정할까 염려되어 병을 숨기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심령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에바브라디도의 모습 가운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표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다른 사람을 향한 진정한 배려와 사랑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과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친구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한 접근이라면 진정한 친구는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정이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깊이 생각해 주고 진심 어린 관심을 가져 줄 때 자연히 생기게 됩니다. Dale Carnegie라는 사람은 그의 책 <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에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흥미를 갖도록 노력함으로 2년 동안에 얻을 수 있는 친구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흥미를 가져 줌으로 두 달 안에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익과 흥미, 그들의 고민과 아픔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 때 친구가 생깁니다. 그리고 우정이 싹이 틉니다. 그리고 친구의 굴레를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제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Non-Christian 친구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심 어린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다가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미 전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한 우정은 전도를 자연스럽게 성공적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들을 그 사랑이 살아 숨쉬는 교회 공동체 속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하게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표식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공통의 관심사(Common Interests for Jesus Christ)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진정한 표식은 공통의 관심사입니다.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바울과 에바브라디도의 아름다운 우정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유익을 위한 공통의 관심사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공통의 관심사가 아무런 관계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일반적인 우정은 어떤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를 갖은 사람들에 의해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C.S Lewis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우리는 연인을 얼굴과 얼굴을 맞댄 모습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나란히 그려야 합니다. 그들의 눈은 함께 앞을 향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친구를 원한다는 생각만 가진 사람은 친구를 결코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미노게임이나 놀이를 함께 하는 것으로는 불완전합니다.<The Four Loves, p. 79>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친구를 갖는다는 세상 친구처럼 공통된 흥미나 취미를 나누는 것을 넘어 서는 것을 말합니다. 낚시 한번 함께 가고 골프나 테니스 몇 번 함께 쳤다고 참된 우정이 나누어지는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춘 공통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신뢰와 보호, 자기 공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믿음 안에서 친구를 갖게 되면 그 사람은 이전에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던 자기 속의 아픔들을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털어 놓게 됩니다. 상대를 신뢰하게 되고 그 사람의 비밀 보장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상대를 서로 형제와 자매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25절에서 바울 사도도 에바브라디도를 향해 “나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3:2에서는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으로 받아 주셨지만 모두를 친구라고 부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몇몇 제자들만을 향하여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도 작은 그룹의 친구들이 필요하셨다면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신뢰 가운데 노출 시킬 믿음의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이해해 주고 격려해 주고 감싸줄 친구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세상에서는 맛보지 못할 엄청난 위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공통의 관심사를 맞춘 성도의 우정은 삶에 엄청난 부요를 안겨 줍니다. 상한 감정에 치유를 주고 낙심 많은 세상에서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두 번째 표식은 그리스도를 함께 바라보면서 가지고 있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는 점입니다.

 

공통의 비전(Common Vision)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강력한 표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생을 향한 공통의 비전과 목적 가운데 생성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모데는 바울 사도와 함께 사역하면서 보조역할만 감당한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디모데를 나이가 어리다고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함께 복음이라는 공통의 비전을 향해 헌신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두 친구를 복음이라는 한 비전을 위해 함께 섬기는 자로 이야기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도 “함께 군사 된 자”라고 말합니다.(25) 성도들은 복음을 위해 함께 일하면서 우정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우정과 복음사역은 함께 나란히 성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모여서 성경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QT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 홀로 그리스도인이 문제입니다. 혼자 있으면 마치 하나만 떨어져 있는 장작이나 석탄처럼 믿음이 곧 식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죽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함께 있으면 영적 시너지 효과가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함께 할 때 자라가고 꽃이 피게 됩니다. 그래서 선교를 함께 다녀오면 그 그룹은 아주 친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단기 선교팀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주 만납니다. 만나서 기도하고 선교 헌금을 하며 영적 우정을 나눕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경험 했던 제자반이나 새생명반, 일대일반들, 성경 공부반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때 함께 지냈던 멤버들과의 우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도들이 모일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0:25)라고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같은 비전을 가지고 모일 때 우정은 자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그리스도 안에서 비전과 인생의 목적이 같으면 그 삶은 알차고 매일 매일이 의미가 있습니다. 재미있고 행복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친구와 같은 동료의식이 생기고 우정이 꽃핍니다. 가정은 행복해지고 온 가족이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리더십 팀이 공통의 비전을 갖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우정으로 하나가 될 때 교회 전체는 행복해집니다. 또한 리더십과 온 공동체가 한 비전으로 뭉치고 한 목적을 향해 함께 걸어 갈 때 그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그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일들을 그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라디도 세 친구들처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은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우정의 표식은 공통의 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험과 영적 전쟁(Risks and Battles)

 

네 번째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우정의 표식은 위험을 감당하는 자기 헌신과 이를 헤쳐 나가는 영적 전쟁입니다. 바울은 본문 25절에서 에바브라디도를 “함께 군사 된 자”라고 말합니다. 군사는 싸우는 자입니다. 모든 싸움에는 위험이 뒤따릅니다. 함께 군사 된 자들을 전우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진하고 결속이 강한 우정의 모습입니다.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라디도는 영적 전우들입니다. 그들은 공통의 운명을 가지고 공통의 목표를 향하여 공통의 고난과 위험을 감수하는 한 몸과 같은 신령한 전우들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저 평탄한 형통의 길만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고통과 고난으로부터 면제된 존재도 아닙니다. 노력과 수고를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동화 같은 삶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 다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경험할 위험이 많습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위험은 본 서신서가 기록될 때처럼 감옥에 가거나 박해에 시달리는 위험은 아닙니다. 공산정권아래서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발각이 되면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그런 위험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더 무서운 영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치열한 영적 전투의 전선에 서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와 종교 다원주의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박해 이상으로 더 교묘하게 우리의 믿음에 도전해 옵니다. 하나님을 잊게 만들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꼭 예수님을 믿어야만 바르게 믿는 것이냐 라고 반문하면서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이라는 미명아래 절대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죄를 범합니다. 예수 십자가의 구속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은근히 약화시키려 듭니다. 위협적 모습으로 다가오는 박해보다 더 위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바브라디도는 바울사도를 돕기 위해 자기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도록 헌신하고 있습니다. 혹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염려할까 하여 자기의 아픈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염려합니다. 친구 바울을 위하여 위험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에바브라디도에게는 그 자체가 그가 감당해야 하는 거룩한 영적 전쟁입니다. 친구와 교회 공동체를 위해 이런 위험과 영적 전투를 자발적으로 감당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에바브라디도를 거룩한 도박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The Holy Gambler. 자신의 평안과 이익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위험 가운에 노출시키면 헌신하는 사람. 주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 그 순결성이 지켜졌고 성장해 왔습니다. 복음의 사역을 위해 위험을 스스로 끌어안고 자신을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이 빌립보서를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염려하고 빌립보 교회를 염려합니다. 에바브라디도도 죽음의 입구에서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걱정합니다. 이렇게 서로 자기에게 분정 된 위험을 끌어안고 영적 전쟁에 임할 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우정을 형성되는 것입니다. 모든 참된 우정에는 감수해야 할 위험이 반듯이 있습니다. 때로는 거절당할 위험도 있고 배반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기대가 무너질 수도 있고 끊임없이 베풀기만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과 영적 전투를 잘 감당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을 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 보십시다. 동역자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 위험을 끌어안으십니까? 진정한 우정의 형성을 위해, 그리고 성도들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십니까? 자기가 예배를 드리고 자기 자녀들이 말씀을 배울 교회당 마련을 위해 건축헌금 하자고 하면 교회를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민 온 가족 중에 자기에게 물질적 피해를 조금만 입힐 것 같으면 그 얼굴 다시는 안 본다는 교민들의 이야기를 접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이나 이웃들에게 조금만 상처를 입으면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인격이 돌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음에 놀랄 때가 더러 있습니다. 상대와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해 아무런 위험을 감당하지 않고 영적 전투에서 함께 싸우지 않으면서 할말 다하는 것은 불평주의자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우정이 생성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 속에는 우정이라는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지를 않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우정의 표식은 위험을 감수하고 영적 전투를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헌신하고 희생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섬기다가 에바브라디도처럼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바울처럼 감옥에 갈수도 있습니다. 디모데처럼 혼자서 사역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위험과 영적 전투를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감당할 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우정은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과 그 공동체가 누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우정의 진정한 표식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향한 진정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통의 영적 관심사입니다. 셋째는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추구하는 공통의 목적과 비전입니다. 마지막으로 위험과 영적 전쟁을 끌어안는 희생과 섬김입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만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스스로를 녹이고 스스로를 태우는 소금과 빛의 삶은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화인 맞은 천국의 백성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기를 소망하는 이 탐욕과 무정의 세대 가운데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즉 그리스도인들을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오늘도 파송하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우정을 실천할 화해와 사랑의 전달자로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라고 명하십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우리가 속해 있는 직장과 사업장에서, 학교와 배움터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우정을 실천하는 또 다른 바울과 디모데, 에바브라디도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가지고 승리하시는 축복의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 김혜현2015.09.0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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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 너무 은혜로웠습니다.
    좋은 설교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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