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자신감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자신감

(New Confidence in Christ)

(빌립보서 3:1-9, Philippians 3:1-9)

20159 13(주일 1, 2 부 예배)

들어가는 말

 

요즈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심리 테스트들을 행합니다. 주제와 연관된 여러 가지 항목의 질문들을 하고 피 측정자의 응답에 따라 점수를 정해 나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행복 지수를 측정합니다. 같은 방법으로 결혼 만족도를 측정하기도 하고 어떤 특정한 사람이 자기에게 배우자로 적합한지를 테스트하기도 합니다.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하기도 하고 직업 만족도를 측정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그런 것 해 보신 경험 있으십니까? 저는 며칠 전에 자신감 지수를(confidence index) 측정해 보았습니다. 절대적 기준은 아니겠지만 40문항으로 되어 있는 일종의 심리 테스트였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정직하게 각 문항에 답을 했습니다. 결과를 살펴보았더니 자신감 지수17.5가 나왔는데 해설을 읽어 보았더니 건전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평가가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의 자신감 지수는 어떨까요? 여러분들 인생을 살아가시면서 매사에 임하는 자세가 어떻습니까? 자신감에 넘칩니까? 아니면 자신감이 결여된 소극적 자세로 살아가십니까?

 

자신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때때로 자신감은 승리의 첫걸음이 됩니다. 자신감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전진 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자신감은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게 합니다. 자신감은 믿음의 시각을 줍니다. 자신감은 관용하게 하고 넉넉한 용서를 베풀게 합니다. 참된 자신감은 겸손하게 섬기고 봉사합니다. 자신감이 있으면 자신을 공개하기도 하고 정직하게 행합니다. 자신감은 장애물을 피하지 않습니다. 자신감은 마음에 고요와 평정을 줍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감의 중요성은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중요한 심리적 항목입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자신감과 교만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자칫하면 자신감이 지나쳐 교만이 됩니다. 1925년에 Nobel 문학상을 수상한 George Bernard Shaw(1856-1950,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극작가, 비평가, 소설가)“내 전공은 다른 사람이 틀렸을 때 내가 옳은 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My specialty is being right when other people are wrong.라고 말했습니다. 자신감을 넘어 교만해지는 자신의 성품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 지나친 자신감은 신성모독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13 세기에 32년간 스페인을 통치를 했던 스페인의 왕 Alfonso 10세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조 때에 내가 참여를 했다면 조금 더 나은 우주의 질서를 위해 유용한 조언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감을 넘어 어리석을 정도로 교만해서 신성모독까지 서슴지 않던 그는 자기가 모독했던 창조주의 섭리에 따라 한줌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 철학자였던 Friedrich Nietzsche(1844-1900)는 교만하게 “신은 죽었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살아계셔서 우주만물을 지탱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죽어 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한줌 흙이 되어 마지만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과도한 자신감과 신성모독에 이를 정도의 교만은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무엇이 그렇게 교만하게 만들까요? 때로는 지식과 학문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권력이나 금력이 그렇게 만듭니다. 성공이나 출세가 그렇게 만듭니다. 남보다 잘 생긴 외모나 건강이 지나친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지나친 자신감은 오히려 그 사람을 파멸로 이끌고 교만의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Over-confidence가 아니라 Under-confidence인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너무 무가치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감이 너무 결여되어 있어서 스스로는 모든 일에 불충분하거나 부적당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자기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James Dobson이 지은 <사춘기를 준비하기, Preparing for Adolescence>라는 책에 보면 80%에 달하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외모를 싫어하고 많은 경우 그런 자신감이 결여 된 부정적 이미지를 사춘기 이후에도 간직하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진짜 아름답고 멋있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여배우 Michelle Pfeiffer“나는 엉덩이가 작고 두꺼운 입술에 구부러진 코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Julia Roberts“내 입은 너무 크고 내 웃는 모습은 흉한 것 같아요. 제 몸매에 대해 제가 얼마나 과대망상증이 있는지 오직 제 옷장만 알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자신감의 결여는 비단 외모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더 깊고 은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명한 Pop-singer Madonna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언제고 제 자신이 무언가 부족하다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무대에 설 때 마다 스스로 이류이고 사람들은 내게 흥미를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런 두려움을 이기려고 끊임없이 애를 쓰지만 이 싸움은 결코 끝이 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세 사람 다 자신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감을 갖고 살아갑니까? 건강한 자신감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잘못된 거짓 자신감은 어떤 것이고 그것들의 정체는 또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거짓 자신감과 참된 자신감을 분별하는 영적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따라 성경적인 바른 자신감을 가지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축복의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1)

 

바른 자신감이란 예수 안에서 기쁨을 찾고자 할 때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먼저 그 동안 강조해 왔던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주제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빌립보서의 큰 주제 중 한 가지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상황과 환경 가운데에서라도 세상 사람이 경험 할 수 없는 심오한 즐거움과 고요한 평정을 누리며 사는 존재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아는 영적 지식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는 그 분의 능력에 의지할 때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내적 기쁨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경험이나 가지고 있는 소유적인 것에 기쁨의 궁극적 근원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외부적인 것에 소망의 근거를 둔다면 우리는 결국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잠시 기뻐하다가 결국에는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δελφοί μου, χαίρετε ν κυρίῳ.라고 말합니다.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주안에서 기뻐하십시오.ν κυρίῳ, 주 안에서” 기쁨의 뿌리가 그리스도 주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 안에 기쁨의 근원을 둡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 안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에게서 기쁨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은 골프와 낚시 같은 취미 안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성공과 성취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다양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런 것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통해 기쁨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은 오히려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축복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것은 반 기독교적이거나 성도로서 불경건한 모습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기쁨의 조건들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조절하며 통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배제시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의 근거처럼 착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태도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첫째, 생명을 주시고 그런 것을 향유할 수 있도록 건강 주시는 하나님을 배제함으로 하나님보다 그런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축복을 주신 하나님보다 축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어리석음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자칫 기쁨의 조건을 허락하신 하나님보다 그 조건들, 즉 물질이나 자녀, 성공이나 지식 등이 은근히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상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영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선물이 선물을 준 아빠나 엄마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한시적인 것을 기쁨의 근거로 삼을 때의 또 다른 문제점은 현실적으로 그런 조건들이 사라졌을 때 겪게 되는 좌절과 절망입니다. 물질을 모든 기쁨의 근거로 삼았던 사람에게 그 물질이 사라졌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재앙입니다. 물질이라는 기쁨의 근거가 사라졌음으로 그 사람의 인생은 어두움과 슬픔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즐거움의 최종적 소망을 둔 부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녀가 실패하고 잘못되어 나를 실망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그 때 그 절망과 낙망에서 무엇을 잡고 헤어 나올까요? 다른 모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뿌리는 그리스도안에 내려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구원의 주 예수 안에 뿌리가 내려져야만 합니다. 그 때 우리는 환경이나 가진 것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즐겁고 기쁜 삶을 매순간마다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의지하여 여러분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시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안에서 기쁜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개들을 삼가라.(2)

 

바울 사도는 두 번째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개들을 삼가라.고 말합니다. 2절입니다. 이 나라가 개 때문에 가끔 문제가 되지요. 거리나 공원에서 사람들을 무는 개들 때문에 소송이 걸리기도 하고 뉴스에 나오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여기서 말하는 개는 우리가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이나 여러분들의 밥상에 오르는 보신탕의 재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는 유대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방인이 개종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개라고 말하면서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영적으로 교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율법을 지키는 데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고 그 결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율법적 행위를 통해 구원에 한발자국도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8-9)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런 율법적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는 그들을 바울 사도가 “개들”이라고 혹평을 해서 부릅니다. 그들의 잘못된 자신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른 가르침은 모든 분야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선생님이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가 학생들의 생각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것은 그 사람의 영원을 결정하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단을 그토록 엄하게 다루고 단단히 경계시키는 것입니다. 이단들을 미워하거나 시기나 질투, 또는 경쟁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의 태도가 똑같습니다.

 

거짓 자신감


바울 사도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영적 거짓 자신감인가 하는 것을 설명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바울의 가르침을 명심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3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니라.(3:3) 여기서 말하는 할례당은 바울이 “개들”이라고 불렀던 유대주의자들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육신에 행한 할례를 신뢰했습니다. 여기서 “신뢰는 자신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할례 받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당연히 구원하신다는 잘못된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런 것은 거짓 자신감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자신감은 그런 육체적인 표식에서 오는 것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데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성령에 이끌린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존재로서의 삶이 바로 진정한 할례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2 28절과29절에서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말하는 “성령으로 봉사하고”에서 “봉사”“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예배하고”라고 번역하는 게 더 좋습니다. 어떤 형태로 예배하느냐 어디서 예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예배하느냐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배에 장소에 대해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3-24)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주장함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진리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더하기 할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으로는 구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할례 받은 육체에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3절은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만 자랑하라. 그게 바로 진짜 할례당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만으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고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여러분의 구원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을 두시기를 축복합니다.

 

바울 사도의 육체적 자신감


바울사도는 자기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잘못된 자신감과 바른 자신감에 대한 논리를 계속 전개합니다. 4절부터 8절입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육체나 육신의 조건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도 그런 조건은 누구 못지않게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방인으로서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태어나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즉 혈통적으로나 외형적으로 완벽한 종교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유아세례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이방인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입니다. 혈통적으로 볼 때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 사도는 민족적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절에 보십시오.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민족적 사실이 하나님 앞에 선민으로서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생각을 은연 중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으로 잘못된 자신감입니다. 예를 들어 서구 부자나라인 미국인이나 호주인이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사람과 하나님 앞에 다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백인이 영적으로 우월하고 황인종은 중간이고 흑인은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영주권자와 비영주권자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육제를 신뢰하는 할례당일 것입니다.

 

세 번째 바울의 육신의 자신감은 그의 가족 혈통입니다. 베냐민 지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일대왕인 사울을 배출한 가문입니다. 왕족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지파만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아마 자기의 조상 사울왕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 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그런 것에 자신감을 두는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자기 조상의 업적을 마치 오늘 자기의 업적처럼 생각하고 그것에 자신감을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이면 자기는 영적으로 우월한 줄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런 것 중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설 때 더 큰 자신감을 주는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 사도의 또 다른 육신적 자신감은 혈통의 순수성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입니다. 이 말은 그냥 히브리 혈통만 이어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언어를 쓰고 히브리 문화를 지키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히브리인들과는 달리 히브리말을 잘했습니다. 그가 인용했던 히브리 성경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육신적인 것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주인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 자기는 다른 피가 석이지 않은 순수 “Anglo-Saxon”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순수 Scottish인 것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순수 Wales 혈통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쓰는 언어가 영국식 발음이라고 또는 Scottish식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Reader's Digest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Never make fun of people who speak broken English. It means they know another language. 서투른 영어를 쓰는 사람을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영어에 서툴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언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고 히브리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자신감을 더 갖도록 하는 조건이 못 되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개인적 성취로부터 오는 자신감

 

이렇게 자신의 출생으로부터 육신적 자신감의 조건들을 나열한 바울 사도는 다시 자기의 많은 성취도 자신의 육신적으로는 자랑거리가 되고 자신감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는 그의 종교적 열심입니다. 6절입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바울은 율법에 충실한 바리새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그 율법대로 사는 삶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젊음과 정열을 다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잘못된 종교적 열심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고 기도를 했던 사람이고 물질과 시간을 바친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십계명을 지키며 삽니다.” “저는 법대로 삽니다.” “언제나 종교적인 요구사항들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는 자신감의 근거가 될 수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실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실하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악을 행하거나 죄를 짓는 일에도 성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잔해하고 박해하는 데 참으로 성실했고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또 다른 육신적 자신감은 그의 의로운 삶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사실 이런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관용하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품어주지를 못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의 잣대로 사람들을 가두고 매질을 하기 쉽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의에 흠이 없는 삶도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한 자신감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7절과 8절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자신의 육체적 출생부터 갖고 있던 모든 자랑거리들, 성취했던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자신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는 자신감은 어떤 것일까요?

 

참되고 새로운 자신감

 

바울 사도가 이어서 말합니다. 새롭고 참된 자신감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입니다. 8절입니다. 9절에서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께로서 난 의”에 참된 자신감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 지식,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 두 가지가 바울 사도의 진정한 자신감의 근거인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어느 날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생동감 있는 관계가 계속되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한번 밖에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과의 그의 관계는 평생을 지속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분과함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임재 앞에 들어갈 수 있고 그 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이 유명인의 이름을 대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부자도 있고 학자도 있고 권력자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알고 지내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사람에 대한 그들의 자신감을 더해 줍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력자를 알고 믿는 것이 혹시 사람 앞에 설 때 자신감을 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 있는 존재로 세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그 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당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자신감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출생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성취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외적 조건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를 아는 지식과 그를 믿는 믿음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22절의 선포입니다.

 

믿음은 선물을 얻어 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가 선물을 받는 통로인 것입니다. (Faith is not a way of earning the gift; rather it is the way in which we receive the gift.) 누군가 우리에게 선물을 줄 때 우리는 그 선물을 내가 획득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그것을 받아서 포장을 뜯고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 아무것도 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 그것을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자신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더욱 깊이 교제를 가지면 가질 수록 이 자신감은 더 커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때 믿음이 자랍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믿음은 우리에게 바르고 건강한 자신감을 형성해 줍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건강하고 바른 자신감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래서 사람들 앞에 진실하고 겸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해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세상적 기준이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형성된 잘못된 자신감을 가지고 잘못 된 태도를 가지고 살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세상은 자신감을 갖게 하는 방법들에 대해 다양한 것들을 제시합니다. 마음속에 자신이 성공하는 모습을 그려보아라. 적극적인 생각을 소리 내어 외쳐 보아라. 나에게 훌륭한 인생을 일구어 나갈 잠재적 능력이 있음을 믿어라. 건강을 믿고 학식을 믿어라. 돈이 힘이고 권력이 자신감이다. 때때로 하나님 앞에도 마찬가지 실수를 범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나를 사랑해 주실 것이다. 내가 이런 존재니까 하나님은 나를 인정해 주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신학을 공부했다. 우리 가정은 3대째 믿음의 가정이고 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이다.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들을 경계합니다. 그런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고 건강한 자신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자신감은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고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께로서 난 의에 자신감을 두는 것입니다. 그 때 저와 여러분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진정한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는 겸손하지만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건강하고 바른 자신감을 가지고 기쁨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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