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Repent and live!)

(에스겔 18:21-32)

11, 10, 2015 (주일 1, 2 예배)

들어가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내용과 목적과 이유가 무엇일까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Repent and live!” “회개하고 살라!”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의 결론인32절에 기록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살아나라!” 것이 바로 선지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시간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으시면서 혹시 내가 영적으로 회개할 것이 없는지를 살피시고 회개를 통해 스스로를 돌이키심으로 생명이 회복되고 살아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이스라엘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에스겔18 1절에서 20절을 보면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불평합니다. 이런 불평에 대해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이 공정하고 공평하심을 조목 조목 지적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5절에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 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 지어다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 18:25) 29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바빌론 포로라는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심판을 받고 징계를 당하는 것이 자기들의 죄가 아니라 조상의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를 합니다. 속담까지 만들어서 하나님을 조롱하듯이 말하고 살았습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 속담입니다. 에스겔 18 2 말씀입니다. 포도는 아버지가 먹었는데 포도를 입에 대보지도 못한 없는 아들의 이가 시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잘못된 판단 가운데 자기들을 고난에 빠뜨려서 골탕을 먹이는 불공평하고 고약한 하나님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심판과 징계를 받을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시대는 책임을 회피하는 시대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가는 많은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지키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법을 만들지만 결과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본보기로 정치가들은 동성애법을 만들어 동성애를 합법화시킵니다. 그리고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사회적이라며 법을 어긴 것으로 여겨 정죄하며 엄청난 죄인을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법으로 인해 발생하는 심각한 결과인 가정의 파괴와 결혼의 신성성의 훼손에 대해 조금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남자 사이에서 자란 여자 아이의 진정한 모성애 결핍과 여자 사이에서 자란 남자 아이의 남성성과 부성애 결핍에 대해 눈곱만큼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동성애로 인해 생긴 인류에 대한 심판 하나인 AIDS, 후천선 면역 결핍증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면 사회에 책임을 전가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언제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도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자기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뿐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 공이요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많은 사람이 자기가 죄를 짓게 것이 불우한 환경과 가난 때문이라고 책임을 다른 것에 전가합니다. If you fail something, you blame your ancestor. Or A ba dworkman always blames tools.  공부를 못하는 자녀들은 가난한 부모를 탓하고 어리석은 부모는 자기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녀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 탓이요!”라고 외치는 책임 있는 목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은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이런 것은 비단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 근본의 문제요 본성의 문제입니다. 창세기 3 12절과 13절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금지된 실과를 먹고 불순종의 죄를 지은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리고 아담은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심지어는 자기의 외로움에 대한 은혜와 사랑의 처방으로 아름다운 배필을 만들어 하나님이 커다란 실수하신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3:12) 하나님께서 여자를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을 아니라 결코 해서는 안될 실수를 하신 하나님으로 몰아 부칩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아담을 당장 죽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시면서 부끄러움을 가려 주시고 생명을 보존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동일한 처방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본문의 번째 절인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 18:21) 언약의 말씀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며 영적으로 음란하게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 다시 언약관계로 돌아와서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지 않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확증으로 살리고 죽이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범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의 말씀으로 확증하십니다. 22절입니다.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죄는 기억하지 않으시고 잘한 것만 보고 살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성품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소망의 빛이 있는 것입니다. 죄는 기억하지 않으시고 아무리 작아도 잘한 일만 가지고 나를 살려 주시는 하나님. 그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어떻게든지 복을 주실 구실을 찾고 긍휼 베푸실 실마리를 찾아 우리를 감싸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십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31:34) 동이 서에서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옮기셨으며 ( 103 12) 나는 나를 위하여 허물을 도말 하는 자니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43:2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도 잊으시는 것이 있으실까요?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신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도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다시는 우리가 지은 과거의 죄를 끄집어 내서 우리를 정죄하는 사용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봅시다. 어렸을 학교에서 애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왕따를 경험한 사람이 어른이 되었다고 사실을 잊을 있겠습니까? 아마 결코 잊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잊지 못할 좋지 않은 과거의 사건이나 좋지 않은 기억 속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들을 용서할 있습니다. 잊혀지지는 않지만 이상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이상 상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유로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에게 그것을 다시 들추어 복수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게 바로 기억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우리의 과거의 죄악이 어떤 것이든지 돌아서 회개하기만 하면 그것을 다시 들추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위해 예수님께서 보혈의 공로로 이루신 용서를 이루신 은혜의 사건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조건 없이 엄청난 은혜를 베푸실까요? 그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복의 대상으로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은 인간 모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자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의 값으로 사신 여러분 사람 사람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사랑의 외침소리입니다. 본문 23절에 아버지의 사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 하겠느냐 ( 18:23) 바울 사도는 디모데 목사님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합니다.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다는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8-9) 오늘 본문 32절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 18:32) 그러므로 사람들이 징계와 심판을 받고 심지어는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는 자신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그가 범한 허물과 지은 죄로 죽으리라 본문 24절입니다. 만일 의인이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6절입니다.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받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죄와 악행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회개하면 반대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만일 악인이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27절과 28절입니다. 스스로의 행위로 죽음에 이르는 징계의 매를 부르기도 하고 생명의 은혜 속으로 들어 오는 축복을 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0절의 말씀대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시는 떠나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음란하게 행했던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이 없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보면 하나님보다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바로 그것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우상처럼 나를 사로잡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많은 사람에게 물질이 우상입니다. 자녀가 삶에 우상으로 군림하기도 합니다. 취미나 오락이 나와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현대의 우상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런 우상의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물질이 있던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자녀와 가족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예수님이 모셔져야 합니다. 건강과 취미 생활이 사로잡고 있던 마음이 다시 성령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돌이켜 자리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 나의 능력이나 행위나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긍휼과 사랑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이 보고 인정할 있는 정직하고 올곧은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삶이 말씀의 지배와 통치를 받도록 매일 묵상하고 암송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스스로 심판과 정죄의 길에서 돌이켜 삶의 자리에서 인생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헛된 우상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탈되었던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돌아 오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참된 예배자로 회복을 말합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영에 이끌리던 삶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논리와 철학에 휩쓸려 살아가던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말합니다. 세상과 손잡고 살아가던 인생이 하나님의 손을 잡고 은혜와 평강 가운데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혹시 마음 속에 스스로 돌이켜 회개해야 하는 일들이 생각나는 있습니까? 바로 시간이 기회입니다. 스스로 돌이킵시다. 그리고 심판과 고난이 아닌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삶을 회복합시다.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겸손의 무릎을 꿇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책임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말합시다. 그리고 거저 주시는 십자가의 용서의 체험하며 마음에 평강과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만복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받고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회복합시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하시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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