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The Mercy of God is an Ocean Divine)

(누가복음 5:1-11; Luke 5:1-11)

2015 1018(주일 낮 예배)

호숫가의 예수님

                         

태양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떠올라 아침을 연지 이미 한참이 지났습니다. 갈릴리 바다라고도 불리는 게네사렛 호숫가 어느 어촌에 오전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사이에 사람들은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그 무리의 중앙에는 당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던 한 순회 설교자가 모여든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사역의 중심지는 회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순회 설교자는 듣는 자가 있으면 어디에서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회당이 되었고 그가 서는 곳 마다 강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말씀에는 아무도 함부로 범접 못할 압도적인 권위와 권세가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명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마들이 물러갔습니다.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은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며 새롭게 소망의 빛을 찾곤 했습니다. 그는 바로 목수였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순종

 

그분이 오늘은 아침 일찍 갈릴리의 호숫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서로 밀치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 물결이 찰싹거리는 호숫가에 두 척의 배가 쓸쓸하게 묶여 있습니다. 밤을 새워 고기잡이를 한 후 포구에 들어 온 것입니다. 어부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그물을 내려 다음 출어를 위해 손질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배를 보십니다. 그리고는 무리를 가로질러 그 두 배 중 한 척에 오르십니다. 그 배는 시몬이라는 사람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구를 손질하고 있는 그 어부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 배를 육지에서 조금만 떨어지게 해 주시겠소?

 

본문에는 단순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제가 만약 시몬 베드로였다면 아마 마음속에서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밤새워 고기를 잡느라고 피곤하지요. 게다가 5절을 근거로 상황을 고려해 보면 물고기는 한 마리도 못 잡고 공친 날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남의 배에 허락도 없이 올라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엄청 열 받았을 것입니다. 녹초가 되어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 주시오.하고 요청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격이 불 같은 배의 주인 시몬 베드로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합니다. 아마 거부 못 할 위엄과 권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게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첫 번째 순종입니다. 작은 순종이지만 베드로가 걸어야 할 순종의 일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 놓습니다. 이 순종을 통해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은혜의 바다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구원의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작은 순종을 통해 베드로의 삶 가운데로 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에 개인적 관심을 갖고 구체적으로 간섭하시는 접촉점으로 삼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이 시간 여러분 모두에게 꼭 부탁하고 싶습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순종을 훈련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도 헌신도 훈련입니다. 작은 순종에 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큰 순종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작은 것에 조건 없이 헌신하는 것이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 큰 것에 헌신한다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작은 순종과 작은 헌신이 요구될 때 그것을 불순종하면서 큰 것에 순종하고 큰일에 헌신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작은 순종과 작은 헌신마저 거부하기 위한 변명일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순종함으로 큰 순종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작은 요구들을 통해 여러분들을 축복과 은혜의 바다로 이끌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순종과 헌신의 요구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개인의 삶 가운데 임하시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배위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서 있는 무리를 향해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초라한 어부의 작은 배가 거룩한 천국의 진리를 선포하는 강단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다 보면 그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들을 아주 소중하게 사용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말구유를 우주의 왕이신 아기 예수가 눕는 보좌로 사용하십니다. 돌 항아리에 물을 담아 포도주를 만들어 주심으로 곤경에 처한 잔칫집에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어린 아이의 떡 두 개와 작은 물고기 다섯 마리를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보잘것없는 작은 나귀새끼를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왕의 준마로 사용하십니다. 한 부자의 무덤을 메시아가 사망권세를 깨치고 승리하는 부활의 전당으로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작은 어선을 말씀을 가르치시는 거룩한 강단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신 주님이 시몬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단순합니다. 명료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쉽고 간결합니다. 그러나 순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단순성과 명료성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과 제 속에는 전능자의 말씀도 우리의 이성과 사고가 논리적으로 설득될 때 수긍하고 순종하려는 뿌리 깊은 죄의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나 이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빛이 있으라.말씀하시면 빛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 1: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찌어다.( 5:34) 말씀하시면 혈루증의 근원은 마르는 것입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5:41) 명하시면 죽음의 권세가 제압당하고 생명의 돌아와 살아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이 말씀을 논리와 경험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 순종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놀라운 순종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5절입니다. 자기의 경험과 생각을 주님의 말씀 앞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것은 몰라도 갈릴리 호수의 물때에 대해서는 적어도 전문가였습니다. 그 호수에서 고기 잡는 것으로 잔뼈가 굵으면서 평생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향해 젊은 목수 출신 순회 설교자가 아는 체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것입니다. He is trying to teach a fish how to swim. 베드로의 반응을 조금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그런 부정적인 분위기를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조금 더 각색해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선생님, 지금 번데기 앞에 주름 잡으십니까? 이 바닥에서는 그래도 정평이 나 있는 접니다. 그런 우리가 밤새워 수고했지만 입질도 못 받았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상당히 비합리적입니다. 그렇지만 정 그렇게 원하신다면 말씀대로 하기는 해보지요.

 

베드로에게는 첫 번째 말씀과는 비교도 안 되게 순종하기 어려운 그런 요구였을 것입니다. 밤을 새운 헛수고로 피로와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는 베드로에게는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다 씻어서 정리한 어구와 그물을 별로 확률도 없는 일에 다시 사용하는 것은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전문가적 입장에서 순종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납득이 안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이 베드로로 하여금 일생 경험해 보지 못한 기적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 순종이 은혜의 바다를 경험하게 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한국 교회사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에 반대를 하다가 순교하신 침례교의 전치규 목사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1879-1944, 동아 기독교회 목사) 경북 울진에서 출생하신 목사님이신데 형인 전치헌씨의 소개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목사가 되신 분입니다. 해방 한 해를 앞두고 1944년 순교하셨습니다. 1910년 한일 합방 소식을 듣고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평소에 알고 있던 M. C. Fenwick선교사를 찾아 원산으로 갑니다. (1863-1935, 독립 선교사, 동아 기독교회 창설자) Fenwick선교사님은 그에게 새로운 학문과 성경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전치규는 고지식하고 스승의 말이라면 그대로 절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Fenwick선교사님은 어느 날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런 시험을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무를 한 개씩 가지고 나가 밭에다 거꾸로 심고 오시오. Fenwick선교사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은 무를 거꾸로 심지 않고 바르게 심어 놓고 왔습니다. 그러나 전치규만은 선교사님의 말에 순종하여 거꾸로 무를 심어 놓고 왔습니다. Fenwick선교사는 전치규의 순종에 탄복하여 일생 동안 동역자로 함께 일했습니다. 그리고 속칭 <원산번역>이라고 불리는 신약성서도 같이 번역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일을 이룹니다. 불합리한 선교사의 말에 순종함으로 전치규목사님은 거룩한 주의 일을 이루고 마침내 순교의 영광까지 맛보는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합리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성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 분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신뢰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그 분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분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분께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한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풍요의 비밀

 

여기에 풍요를 누리는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상식과 이성을 뛰어 넘는 순종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넓고 큰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는 운하의 입구와 같습니다. 여러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첫 번째 의미는 믿음의 모험을 말합니다.우리 중 많은 사람이 믿음의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사람이 인생의 얕은 물가에서 쉽고 편안하게만 살려고 합니다. 순종도 얕게 합니다. 순종이 깊지를 못합니다. 헌신도 얕게 합니다. 깊지를 못합니다. 기도도 얕게 합니다. 깊은 기도의 경지에 들어가려 하지를 않습니다. 봉사도 얄팍하고 얕게 합니다. 말씀도 얕게 묵상합니다. 말씀의 깊은 진리와 적용을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은혜의 대양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은혜 언저리에서 맴도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큰 고기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크고 좋은 고기, 비싼 고기는 원양어선이 잡아가지고 옵니다. 많이 잡아가지고 와서 비싸게 팝니다. 큰 이익을 담는 커다란 기업이 됩니다. 그러나 인근 연해에서 고기를 잡으면 그것은 영세 어업입니다. 잘 잡히지도 않습니다. 연명하는 수준이 되기 쉽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믿음의 모험가를 찾으십니다.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리는 순종의 사람을 주님께서는 찾고 계십니다. 왜요? 그 깊은 곳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그 깊은 은혜의 바다에서 더 큰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라는 말씀의 의미는 다시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네가 인간적 방법을 가지고 수고하고 애를 써도 실패한 것, 예수님의 방법으로 다시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실패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 다시 도전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인생의 바다에서 수고하고 애를 씁니다. 때론 베드로처럼 밤을 새워 수고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아침을 맞이하며 경험하게 되는 것은 쓰디 쓴 인생의 빈 배일 때가 많습니다. 수고와 애씀이 아무런 풍요를 주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의 삶은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간섭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삶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빈 배를 만선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할 때 주어집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법대로 할 때 주어집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실패로 인해 지쳤을 것입니다. 고된 삶의 무게 때문에 포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Try Again!” 다시 시도하라. 그것도 깊은 곳으로 가서 다시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더 풍요롭게 만들고 인류의 공영에 크게 이바지했던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은 믿음의 모험과 포기하지 않는 도전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조건 없는 순종을 드리며 한 번 더 해보고 더 깊은 곳으로 인생의 배를 저어갔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가운데 풍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인생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의 배를 깊은 데로 저어 나가 그곳에서 그물을 내리시는 순종과 믿음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은혜의 바다로 마음껏 저어 가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와 풍요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순종이라는 모험의 결과

 

오늘 본문을 보면 순종이라는 믿음의 행동이 가져온 축복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6절과 7절입니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5:6-7) 아멘! 이런 풍성과 충만의 축복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의 직장과 사업에 이런 차고 넘치는 풍요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순종하는 자가 체험합니다. 믿음의 모험은 언제고 주님께서 그 결론을 책임지십니다. 많은 고기로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분량은 순종하는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복을 주시되 흔들어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의 넉넉함과 여러분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 본문은 넘치는 축복을 동료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불러 함께 축복을 누립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축복의 유통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축복을 나누어 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삶

 

깊은 은혜를 체험하면 사람이 변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과 주님이 없이 사는 삶의 차이를 깊이 인식합니다. 자신이 혼자 애쓰는 삶의 헛수고를 알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의 풍요를 압니다. 그 때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집니다. 오늘 주님을 부르는 베드로의 호칭 속에 그것이 나타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처음 베드로가 사용한 주님의 호칭은 έπιστατα라는 호격을 사용합니다. “선생이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것도 불만스러운 듯이 부른 명칭입니다. 마지못해 순종하며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종에 대한 결과로서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바꾸어 부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έξελθε άπ έμον, ότι άνηρ άμαρτωλοs έιμι, κυριε. 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κυριε”라고 호칭을 바꾸어 부릅니다. 영어로는 Lord입니다. “주”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전능자의 임재를 느끼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속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자신의 부족을 깊이 절감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권위 있는 가르침을 베푸는 선생 정도로 생각을 하고 그저 웬만한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는데 새로운 예수님을 인식한 것입니다. 참 예수와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아들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바로 έξελθε άπ έμον, ότι άνηρ άμαρτωλοsέιμι, κυριε. 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며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John Calvin의 말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알게 되며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만난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의 실체를 알게 되자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혜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체험합니다. 자신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의 주님을 인정합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살았던 죄악 된 자신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자신이 작은 존재인 것을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본문10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를 남겨 두고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 죄를 고백하며 부족함을 시인하는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은혜를 베푸시면서 오히려 그 은혜를 통해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운명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사람을 낚는 하나님의 비전에 참여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더 큰 비전으로 그 영혼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될 것을 보여 주십니다. 자신을 위하여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인간의 영혼을 낚는 자로 변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순종은 거룩한 일군을 만듭니다. 그리고 순종을 통한 축복은 거룩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은혜 받은 자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간직한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에 걸맞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헛되이 산 사람의 예로는 아마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비천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시기하다가 네 부자가 함께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마 삼손도 그런 사람 중 한 예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부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났고 사사로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은혜를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는 데 사용하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온갖 치욕을 당하고 두 눈을 잃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빼앗깁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불림 받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지만 현실적 이익과 세상의 재물에 눈이 멀어 자기의 주 예수를 파는 엄청난 죄를 짓고 창자가 터져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 은혜 때문에 소명을 따라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아마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모두가 나일 강에 던져져 죽음을 당해야 했던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살인자의 도피 생활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소명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그는 그 은혜를 간직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위대한 소명의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다윗 또한 그런 사람입니다. 양치는 자리에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가면 통일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을 주시고 고비마다 구원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고 마침내 자기 민족의 구원자가 됩니다. 이와 같이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더 높고 큰 이상을 향해 헌신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은혜에 걸 맞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세 번째 순종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세 번째 순종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잡힌 물고기를 인하여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10절입니다. 기적의 은혜를 체험한 베드로를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베드로를 보여 줍니다. 베드로의 세 번의 순종입니다. 11절에 보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라고 기록합니다. 보통 사람은 감히 할 수 없는 포기와 순종을 보여줍니다. 작은 것에 순종해야 큰 것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부터 순종했던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이 포기와 순종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베드로는 정말 보아야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라고 불러야만 하는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큰 포기와 큰 순종을 감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진짜를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끓는 주전자 뚜껑이 소리 내며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James Watt만이 그 끓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증기기관차를 보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Isaac Newton만이 그 떨어지는 사과 속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히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본 사람은 베드로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베드로만이 “선생”으로 불렀던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볼 줄 아는 이런 신령한 눈이 필요합니다. 영적 눈이 열려야 합니다. 참 예수님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이신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물고기를 잡던 세속의 어부가 천국의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해 돈을 벌던 세속 사업가가 천국의 사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낚시꾼이 되어 제자로서의 사람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순종이 기적을 낳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산산이 부서진 희망과 일그러진 계획과 망가진 삶의 결과 때문에 절망 가운데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을 향해 다가가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일상 속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맞아드리십시오. 그리고 작은 것부터 그분의 지시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 보십시오. 그 분께서 부서진 희망의 조각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혼돈과 좌절의 늪에서 허덕이는 인생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주시고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 때 그 분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하십시오. 우리의 경험이나 이성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삶을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가 함께 하는 삶은 은혜의 바다를 항해하는 인생입니다. 담대히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십시오.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십시오. 은혜의 바다를 향해 믿음의 돛을 높이 올리시고 깊은 곳에 순종의 그물을 내리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가 함께 하는 삶은 불경기, 호경기가 없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안 하시느냐 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단순하고 담대하게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 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찰싹거리는 얕은 물가에서 맘이 졸여서 은혜의 바다로 담대히 나가지 못하는 여러분을 격려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은혜의 바다로 초청하십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시는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시고 주님의 축복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높은 차원의 비전과 이상을 향해 헌신하십시오. 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영혼의 어부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현실의 그물은 주님이 찢어지도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스스로 애를 쓰면 빈 배의 인생이지만 주님께서 도우시면 만선의 축복입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채워주시는 주님의 모습은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미래를 책임지실 주님의 약속입니다. 삶을 걱정하지 마시고 주님을 따르는 새로운 비전의 삶을 사십시오. 복음의 그물을 던져 새 생명을 낚는 어부가 되십시오.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계신 삶의 현장을 영혼의 구조선으로 삼으십시오. 난파당한 인생을 구하는 생명선의 역할을 감당하십시오. 그래서 모세처럼, 다윗처럼, 그리고 베드로처럼 은혜에 합당한 가치 있고 목적이 분명한 하나님 나라의 큰 일군들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14 Cormiston Ave, Concord NSW 2137 | Sydney | Australia TEL : 02 9743-1444
Copyright ⓒ 시드니안디옥장로교회 All rights reseved. Provided By 교회사랑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