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 직면하기 (Facing Failure)


실패에 직면하기(Facing Failure)

(요한복음 21:1-19, John 21:1-19)

2015 10 18(청년부 설교)

들어가는 말                    

 

젊었을 때 제게는 몇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조종사가 되어서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가보고 제복을 입고 멋지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공군사관학교나 항공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외국에서 경비행기 면허를 취득해서 simulation 교육을 통해 기종 전환을 하고 민항에서 근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실천에 옮겼습니다. 당시 비행기마다 탑승하고 있던 보안 승무원에 지원한 것입니다. 보안 승무원이 되면 미국에 비행을 나갈 때 마다Denver에 있는 비행학교에 가서 비행술을 배울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비행시간이 차면 기종 전환 시험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기 좋게 낙방을 한 것입니다. 실패였습니다.

 

당시 직장을 지원하면 보통 서류전형과 1차 필기시험을 치른 후 2차로 면접을 하는 게 통례였습니다. 가까스로 면접까지 간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면접에서 늘 실패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저를 면접에 이를 때까지 통과시킨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들의 호기심이었습니다. 신학을 한 사람이 왜 무술 유단자들이 하는 보안승무원을 하려고 하는가? 당시 일반적으로 신학을 한 사람은 거의 곁눈질 하지 않고 바로 전도사를 거쳐 강도사가 되고 목사나 선교사, 신학교 교수 등이 되는 게 정상적인 수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바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와 일반인들의 인식이었습니다.

 

기대에 차서 면접장에 나타나면 면접관들은 물었습니다. “저 궁금해서 그러는 데 신학을 한 사람이 왜 이 회사에서 일을 하시려고 하지요? 실례지만 왜 목사님이 안 되시고 보안승무원이 되려고 하시지요?”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좌절감과 실패감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별로 소명도 확실하지 않은데 괜히 예수님 따른다고 나섰다가 인생 망치게 된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었습니다. 신학교 지원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저의 어머니께서 목사님과 의논하신 후 제 시험 점수 가지고 제가 군대에 있는 동안 지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신학을 공부한 것을 숨기고 싶을 때도 있었고 전공을 바꾸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모든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문교부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편입학 금지법을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실로 인해 저는 더 깊은 실패감과 좌절감에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을 떠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믿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것은 안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작은 사업도 해보고 보잘것없지만 이런 저런 일들에 손을 대보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제 인생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밤을 새워 수고한 베드로처럼 최선을 다했지만 인생의 배는 늘 채워지지 않은 채로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열심을 내다보면 간혹 무엇인가가 얻어지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아무것도 없는 빈 배 인생, 그게 바로 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

 

여러분, 그런 경험 없으세요? 어느 순간 인생의 배를 바라보니 아무것도 없는 빈 배 인생. 만족이 없는 피곤한 인생. 소득 없이 맥 빠진 모습으로 배를 저어 해변으로 나오는 베드로의 지친 모습. 그 모습 속에 혹시 여러분들의 모습이 투영되지는 않으십니까? 사실 그런 때는 하나님마저도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은 것은 틀림없이 믿지만 그 분은 나에 대해 포기하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 지치신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여러 번 주님의 기대를 채워드리지 못하고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기 때문에 이제는 나 같은 것에게는 관심조차도 없으실 것처럼 생각된 적 없으십니까? 나에게는 더 이상 기대도 안 하실 것 같고 아무 일도 안 맡기실 것처럼 처참한 심정이 들 때 없으셨습니까? 저는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마 본문의 베드로가 그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조금이나마 그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베드로처럼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실패한 제자들이 모여 빈 배를 바라보면서 망연자실 힘을 잃고 있는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상상도 못할 일 아닙니까? 3년 동안 함께 먹고 마시며 동고동락하며 제자 훈련을 시켰는데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났습니다. 그토록 다부지게 맹세하고 주님과 함께 죽는 자리까지 가겠다고 큰 소리쳤던 그들이 모두 실패한 것입니다. 모두 옛 삶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민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면 별의별 배반의 소리가 다 들립니다. 다양한 적반하장의 일을 다 겪습니다. 물에서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고 기껏 살게 해 주었는데 오히려 없는 말을 만들고 욕을 하고 떠나는 경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상식도 이성도 통하지 않는 무 대포의 사람도 만나고 믿음도 신앙고백도 휴지처럼 버리는 사람도 자주 만납니다. 물론 절대다수는 결코 이런 부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확률의 부정적인 경우가 바로 여러분들과 저의 삶의 모습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어떻습니까? 쉽게 그들이 용서가 되고 쉽게 손이 내밀어지던가요? 그 실패한 인생을 깊이 이해하고 다가가서 품어줄 수 있던가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런 죄인입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인간 속에는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재확인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저나 여러분 같은 사람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그 실패한 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삶의 현장에 오셔서 동참하시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러실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본문 4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계셨지만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한지라.라고 기록합니다.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있습니다. 실패한 우리의 삶 가운데로 부활하신 주님은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조용히 들어오셔서 동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말없이 바라보시면서 우리가 그 주님을 인식할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 예수님

 

그리고 빈 배 인생을 채우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5절과 6절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우리도 바닷가에 가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가까이 가서 통을 들여다보고 묻지요? 뭐 좀 잡으셨어요? 인간은 그것뿐입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사업 잘되세요? 직장에서 편안하시지요? 건강하시지요? 가족들 잘 계십니까? 사업이 안 되면 어쩔 건데요? 몸이 아프면 어떻게 도와 줄 건데요? 묻지만 해답은 없습니다. 해답이 없을 뿐 아니라 도와줄 의도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한계입니다. 실패한 인간을 다른 인간은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실패한 인생을 성공으로 바꿔 주십니다. 빈 배를 채워주십니다. 낙망과 좌절을 새로운 도전과 기대로 설레게 하십니다.

5절 하반절에 제자들이 해변에 서 있는 사나이에게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No간단합니다. 마치 낚시꾼에게 물었을 때와 같습니다. 이에 대해 인간은 도움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물어보는 것입니다. 못 잡았어도 잡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해답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집니다. 내내 못 잡던 고기가 오른편에 던진다고 잡힐 것으로 기대했겠습니까? 그냥 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십시오.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주님이 고기를 몰아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을 몰아서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는 이렇게 우연을 가장한 축복을 경험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이 쏟아집니다.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 것입니다. 인생에게는 오른쪽이냐 왼쪽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 가운데 계시면서 축복하시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실패한 삶의 한 가운데 계시면서 축복하시기를 좋아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느냐 못 알아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자기들의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부활의 예수님을 먼저 알아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7절에서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 자신을 그렇게 익명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주님이시다.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실패의 현장에 조용히 서 계시면서 여러분들의 삶을 지도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므로 빈 배가 넘치도록 채워지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실패의 자리가 바로 성공의 자립니다.

 

중국 논어에 보면 자경실필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실패가 꼭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실패가 없으면 성공의 단맛도 없는 것입니다. 실패는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 삶에는 실패가 성공보다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실패에 바르게 직면하는 성숙한 영적 자세가 그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겁니다. 자기 방법만 고집하면 다시 실패합니다. 특별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때 그 길이 평탄해지고 형통의 길이 열립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실패로 영적 근육을 단련시키고 영적 지혜를 배우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실패나 실망 가운데 종종 예상 밖의 길이 열리는 데 그 대부분의 경우는 내 방법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방법을 따를 때입니다. 누구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문제는 그 실패가운데 어떻게 그 실패를 성공의 계단과 비결로 변화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1990년대 말 미국 제약 회사 화이자의 연구원들이 새로운 심장약을 임상실험을 했는데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 약이 심장에 대한 효과보다 비뇨기과적 효능이 탁월함을 발견합니다. 그 때 이 보고를 받은 회사는 이 약의 용도를 바꿔 시판에 들어갔습니다. 그게 바로 비아그라입니다. 실패를 직면하면서 오히려 성공의 기회를 포착한 것입니다. 그러나1973년 미국의 제록스사의 팔로알토 연구소에서는 화이자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연구소는 세계 최초로 그래픽 방식 PC를 개발했습니다. 바로 마우스를 움직여 컴퓨터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거의 상상조차 못한 혁신적인 제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제록스 본사는 이 제품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실패로 생각했고 이 모델은 방치된 채 시간이 지났습니다. 1980년 이 연구소에 애플의 창업자 스티븐 잡스가 방문했다가 이 제품을 보고 그 가치를 알아챕니다. 잡스는 여기에 착안해서 몇 년 뒤 맥켄토시라는 혁명적인 PC를 개발하고 전 세계에 컴퓨터 붐을 일으킵니다. 이 기술은 다시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에 의해 윈도우라는 컴퓨터 운영체제로 재 탄생되어 오늘날의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 실패가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게 실패입니다. 그 실패가 누구의 손에 잡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은 모두 실패합니다. 실패하지 않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사람은 실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제는 실수에 대한 자세입니다. 실패에 대해 정죄하는 자세가 문제입니다. 실패에 대해 감추고 변명하는 게 문제입니다. 실패를 예전처럼 내 방법으로 다루는 게 문제입니다. 실패에 대해 정직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인정하며 예수님께 맡기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구의 손에 실패한 인생이 다루어지느냐에 따라 그 인생은180도 달라집니다. 3M 사에서 시제품으로 만든 접착제가 있었습니다. 불량품으로 판정되고 사업 계획은 실패작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직원이 그 불량 접착제를 사용할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지구 인구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포스트-it의 탄생입니다.

 

해변의 아침 식사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 자신을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실패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회복시키고 축복하십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고 확신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시키십니다. 인간적인 실패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실패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실패를 통해 부활의 주님을 더욱 깊이 체험합니다. 예전에 그물이 찢어지도록 기적을 베푸셨던 그 주님이 다시 그 실패자들 속에 들어오신 것을 그들이 깨닫는 순간 그들의 영혼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영적 지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주님을 이전보다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후회하고 뉘우치며 마음속으로 다시는 배반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후로 그 제자들 중 어떤 사람도 다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하다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해변의 식사.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영영 모른 체 하실 줄 알았는데. 다시는 자기들을 찾지도 만나 주지도 않으실 줄 알았는데. 그들 모두가 모른다고 부인했고 비겁하게 그 자리를 떠나왔는데. 그런데 그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실패 속으로 들어오시고 그 실패를 직면하도록 격려하신 것입니다. 책망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회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으셨던 것처럼 빵을 굽고 생선을 구어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빈 배 인생을 채우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절망을 소망으로 채우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무의미하게 여겨지던 남은 인생을 목적과 사명으로 채우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 없는 인생은 빈 배 인생인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기가 막힌 해변의 아침 식사자리에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아무도 당신은 누구십니까?” 묻지 않고 말없이 음식만 먹습니다. 그들은 그 분이 누구신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12절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지금 부활하신 주님과 그들의 실패를 동시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은 가끔 예수님을 믿다가 그 분이 자기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 같으며 세상을 향해 제 자리로 돌아갑니다. 각자가 두고 떠나왔던 세상의 갈릴리 바닷가로 돌아가 그 세상바다에 기대의 그물을 던집니다.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의 모습이고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그 인생에도 예수님이 없으면 빈 배 인생일 뿐입니다. 내가 수고한다고 내 욕망과 기대의 그물이 채워지던가요? 내가 밤을 새워 노력한다고 잡고 싶은 꿈들이 이루어지고 인생이 보람으로 가득 채워지던가요? 아닙니다. 인생은 그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공허한 빈 배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한 가능성의 세계는 대부분이 환상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능력을 너무 신뢰하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절망과 실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런 세상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가능성이 많은 것처럼 보여도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너무 자주 어떻게 살고 싶은 지와 실제로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착각합니다. 한계를 모르고 자기가 인생의 왕이 되어 스스로를 의존하는 실수를 범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조찬 자리는 이 사실을 깨닫는 기가 막힌 영적 교훈장입니다. 이후로 제자들은 그 삶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합니다. 그 분의 말씀대로 살고 그 분만을 의탁하고 그 분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살다가 순교의 축복을 경험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침햇살이 모닥불의 밝기를 삼키고 제자들의 구리 빛 얼굴에 반사됩니다. 얼굴 윤곽들이 온전히 보이고 어쩔 줄 몰라 주저하는 표정까지도 드러납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주님이 조용히 시몬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아마 이런 경우 보통 사람 같았으면 반드시 한마디 했을 것입니다. ! 시몬, 너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 죽은 데까지 따라 온다고! 말이나 안 하면. 에라! 이 비겁한 인간아!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십니다. 실패한 베드로.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얼굴을 못 드는 베드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겉옷을 두른 채 바다에 뛰어 들어 누구보다 먼저 주님께 오기는 왔지만 마음이 너무 착잡하고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베드로. 그를 향해 예수님께서 실패의 핵심에 직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실패의 핵심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있었던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21:7) 스스로를 칭했던 요한 사도는 후에 기록하기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요일 4:18)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용감해집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직면하게 합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거짓말 하지 말아라. 하지 않으십니다. 맹세 할 수 있어하고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영 버릴 줄 알았는데 주님께서는 여전히 실패한 베드로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사명을 다시 위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면 구원한 주의 양들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16절입니다. 너는 여전히 내 수제자라는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너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너는 실패를 넘어설 수 있다는 신뢰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 번째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람이 이렇게 같은 질문을 세 번씩 하면 이상하게 생각이 되지요? 왜 그러는 거야? 내 말을 못 믿는다는 건가?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주님의 깊은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정직한 고백이 있습니다.

 

많이 들으셨겠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계속 신적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 이상 스스로를 과장하지 않습니다. 죽는 자리까지 함께 하겠다던 만용의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감히 말하지 않습니다. 휠레오의 인간적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엄청난 자기 직면입니다. 우리가 왜 실패합니까? 스스로를 과신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가페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대단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과거가 그랬습니다. 목숨 걸고 충성하고 따르겠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걸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실패를 직면하게 하고 정직과 겸손의 능력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순교로 영광 돌리 베드로

 

베드로가 주님께 휠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해도 주님은 만족하십니다. 오히려 더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베드로가 다만 인간인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휠레오의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겸손하게 예수님과 그 양들을 섬길 그를 아가페 사랑의 능력으로 순교의 자리까지 이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8절과 19절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18-19) 이후로 베드로는 다시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그 백성들을 위해 살다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위대한 삶을 살다가 주님의 나라에 입성합니다.

 

나가는 말

 

실패의 핵심에 직면할 때 그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한 사람의 삶이 위대하다는 것은 매번 승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비마다 어려움과 좌절이 있지만 그 실패와 실수가운데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 분의 영과 말씀에 사로잡혀 살 때 그 실패들에 직면하면서 믿음으로 전진할 때 새로운 승리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채근담이라는 중국 고전에 보면 그릇이 작은 사람일수록 성공하면 제 자랑으로 삼고 실패하면 남의 탓으로 돌린다고 했습니다. 실패는 가르침을 줍니다. 영적 교훈을 줍니다. 실패 가운데 다가오시는 부활 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승리가 보장됩니다.

 

인생은 실패가 있게 마련입니다.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실상 도전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실패 속에 담겨 있는 승리와 성공을 보는 지혜의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영적 교훈과 배움이 있는 실패가 교만과 불신만 키워주는 저속한 성공보다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인생의 실패가 있으십니까? 직면하십시오.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인간적으로 직면하지 마시고 주님과 함께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직면하십시오. 길이 열립니다. 인생의 빈 배가 채워집니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회복됩니다. 목숨을 바쳐 살아야 할 사명을 되찾게 됩니다. 가치 있는 일에는 반드시 실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실패의 위험을 즐거이 감수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실패를 주님과 함께 경영하셔서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축복으로 가득 찬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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