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깨끗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깨끗하기를 원하노라.

(에스겔24:1-14)

2015 1024(주일 낮 예배)

들어가는 말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간의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실제적으로 느껴지고 마음에 와 닿는 주제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신앙의 형식적 내용 중 하나입니까? 인류 역사에 있어서 말세와 심판에 대한 논란이나 주장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인간의 심리 속에 불안을 심어 놓아 자기들의 종교를 믿게 하기 위해 심판과 종말을 주장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회학자들을 포함해 종교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자들은 종교를 심지어 마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각 나라마다 있는 모든 토속 종교와 미신들 조차도 종말론적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권선징악의 행위적 심판을 말합니다. 악은 결국 심판을 받고 선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슬렘들도 최후의 심판을 믿습니다. 그들도 현재의 삶은 영원한 삶을 위한 하나의 시험 기간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알라라고 불리는 오직 한 분이고 모하메드가 하나님의 최후의 선지자인 것을 믿으면 낙원에 간다고 믿습니다. 이슬람을 제외한 다른 종교를 믿으면 영원한 지옥 불에 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날이 오면 온 우주는 파괴되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생이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이 날이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Quran 2:82) 한 가지만 참고로 말씀 드리면 이슬람은 구약과 신약 성경을 변조해서 만든 것이 Quran이고 교리도 성경의 내용을 비슷하게 따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혼합적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알라라는 말을 사용하고 예수님을 구원자가 아닌 선지자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도는 믿음과 행위 두 가지를 다 주장합니다. 저희가 믿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명백히 말씀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심판과 종말을 말합니다. 기독교나 이슬람처럼 죄를 심판하는 무서운 형벌식의 종말론은 없지만 새로운 세상의 도래, 즉 극락의 세상을 말하는 미륵불 시대의 꿈과 희망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믿는 종교가 어떤 것이 되었든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판이라든지 종말이라는 주제가 상식적 사고에서 생각할 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비현실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기대하는 심판 받는 모습을 목격하고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종말과 심판이 있다는 것이 죄악 된 인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종말과 심판이 있다니 그 사실을 받아 들이는 게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 횡행하는 악을 진멸하고 선이 승리한다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죽음 뒤의 사후의 세계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한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미래에 펼쳐질 이상향에 대해 소망을 준다는 측면에서 종말이나 영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반론적 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분들 중에서 어떤 입장입니까?

종말과 심판은 현실이다.

제가 먼저 이 질문에 대한 결론적 답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지금까지의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나도 그런데 하는 생각을 하시고 계시다면 종말과 심판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 믿고 있다거나 신앙 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성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해 위에 견고한 신앙의 집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이런 종말과 심판을 내 사건으로 느끼면서 받아 들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적용하자는 것입니다. 이론이나 막연한 종교적 교리로 종말과 심판을 머리 속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멀지 않아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경험할 실제 사건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어지는 메시지는 바로 역사 속에 나타나는 현실적 종말론과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언된 내용들이 이스라엘 속에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살아 있는 경험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구체적 날짜가 1절과 2절에 이렇게 기록됩니다.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의 이름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 예루살렘 가까이 왔느니라 ( 24:1-2)

본 내용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기록한 에스겔은 약 25세가 되었을 무렵인 ( 1:1-2) BC 597년에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때 여호야긴왕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잡혀 끌려갑니다. 유명한 다니엘과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다니엘 보다 약간 나이가 많았습니다. 다니엘은 에스겔이 끌려가기 8년 전인 BC 605년에 잡혀갑니다. 바벨론의 떠오르는 장군이었던 느브갓나셀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물리친 직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때 약 10.000여명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가고 8년 뒤에 에스겔이 잡혀 간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렇게 바벨론에 도착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하나님의 이상이 임하고 소명자로 불림을 받습니다. 에스겔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포로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 즉 하나님의 공동체를 영적으로 깨우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이스라엘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이 여전히 유효하며 여전히 축복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보는 하나님은 영광과 광휘에 휩싸인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스겔이 하는 일은 그분께서 당신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심판을 행하실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실행장이 바로 당신께서 임재하시며 예배를 받으시던 사랑하는 도시 예루살렘이요 그곳에 세워진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 심판이 곧 시작될 증거로 에스겔의 아내가 죽습니다. 예표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에스겔 24 18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예언의 말씀은 구체적인 심판으로 역사 속에 실현됩니다. 서기 전 5861 15일에 느브갓나셀 2세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살해 당한 후에 남은 거민 들은 바빌론으로 노예의 신세가 되어 잡혀가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역사적인 이야기를 말씀 드리는 이유는 종말과 심판은 구체적인 현실이고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휘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성이 있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저희에게 경고하시며 영적으로 메시지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으로 실제성 있게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괜히 겁만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조장해서 믿게 하기 위한 종교적 술책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역사 속의 하나님이시고 그 역사의 주관자가 되셔서 한 사람 사람의 삶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셔서 심판을 통해 깨끗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불 위에 놓인 가마솥 같은 예루살렘

          본문 나머지 3절부터 14절은 불 위에 놓인 가마 솥의 비유를 통해 심판의 내용과 방법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마솥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곳에 담기게 되는 양 한 마리의 고기와 뼈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유다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당시 살아가던 모든 사람이 듣는 즉시 알아 차릴 수 있는 일상의 생활 용품을 비유의 도구로 삼아서 전형적인 형태로 예루살렘에 임한 심판의 예언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 가마 솥을 감싸고 활활 타오르며 물을 끓게 하고 고리와 뼈가 무르도록 삶을 맹렬한 불은 바로 바빌론을 말합니다. 그들이 양을 잡아 요리를 할 때마다 늘 하던 행동입니다. 그들은 그 가마솥의 상황과 그 안에 있는 고기와 뼈의 입장과 형편을 금방 이해 합니다. 너무 잘 압니다. 그들이 양을 잡아 가마솥에 넣고 삶는 이유는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 혀를 즐겁게 하는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자신들이 양고기와 뼈의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제비 뽑을 것도 없이 예외적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에스겔서를 묵상해 오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이유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우상 숭배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방인보다 더한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였습니다. 죄 없는 자의 피를 흘린 살인이었습니다. 자녀를 불 살라 제물로 바치는 극악한 죄였습니다. 그런 후에는 태연하게 하나님의 성소인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척 했습니다. 게다가 그런 우상적 행위를 성전에서 행하며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체 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더럽히고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 강국들을 의지하며 그들에게 소망을 두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빌론도 그런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바빌론이 바로 그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그들을 노예로 잡아 끌고 간 장본이 됩니다. 결코 의지나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오늘날 성도의 모습일 수 있다는 데 우리의 위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살다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예배들 드리는 시늉을 합니다. 세상 사람과 전혀 구별이 안 되는 삶을 살거나 심지어는 그들 보다 더 비 도덕적인 삶을 살다가 회개의 심령도 없이 하나님 앞에 너무도 당당하고 당연하게 서서 예배를 드리고 복을 달라고 조릅니다. 에스겔 당시의 예루살렘 백성의 모습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자기 편리한 대로 세상도 붙잡고 하나님도 붙잡은 혼합적 신앙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자기 능력을 더 믿고 물질의 위력을 더 신뢰합니다. 이만 하면 잘 믿어 드리는 데 하나님은 너무 요구하는 게 많다고 불평합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에스겔서의 좋은 점은 죄악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에둘러 말하지 않습니다. 죄인을 죄인이 아닌 것처럼 위로하며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술해서 고치겠다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가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소망이 있다고 말하면 모순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실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요즈음 집중적으로 기도해 주고 있는 김기남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항암이 시작되고 방사선이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주 한 주간만 방사선과 화학 치료를 하고 나면 퇴원을 해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의료진들이 한 가지 명백하게 말해 주지 않아서 환자를 더 어렵게 만든 것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배를 뚫어 영양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강조해서 말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에둘러 말함으로 환자가 배를 뚫고 영양을 공급 받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오해를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더 어렵게 코를 통해 호스를 집어 넣고 영양을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배를 뚫고 팩을 차고 치료를 받았으면 통원치료를 하며 더 건강하고 효과적으로 치료에 임할 수 있었는데 입원까지 해서 더 힘든 방법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병을 알고 어떻게 해야 치료가 빠른지를 아는 유능한 의사라면 그 순간은 듣기 힘들고 수용하기 어려워도 마땅히 해야 하는 말을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환자 속에 있는 원수와 같은 암 덩어리와 병균을 속히 제거하고 고침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애매함이 상황을 더 악화 시킨 것입니다.

본문에 보여지는 하나님은 그런 애매한 의사와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사실을 사실로 말씀하셔서 고치기를 소망하시는 단호하고 단도직입적인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맹렬한 장작 불에 태워서 가마솥을 달궈서라도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고 소멸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죄의 병균을 태워서라도 제거하시고 사망에 이르는 영적 질병인 죄에 물든 자기 백성을 새롭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를 참으로 깨끗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고 말을 해도 예루살렘의 죄악이 얼마나 깊은지 쉽게 깨끗해 지지 않는 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집요한 고착성을 지적하십니다. 12절과 13절입니다.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피곤하나 많은 녹이 그곳에서 벗겨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 하는 도다 너의 더러운 것들 중에 음란이 그 하나니라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하나 네가 깨끗하여 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깨끗하여지지 아니하리라( 24: 12-13) 이런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은 징계의 채찍을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쉽사리 죄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괜찮겠지!” 하고 이전 하던 행위를 계속합니다. “설마!” 하고 여전히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런 심판이 있을까!” 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의지가 단호하십니다. 기필코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셔서 다시 깨끗한 축복의 그릇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현장: 십자가

          여기까지만 들으면 최후의 심판과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의 소망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 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행위에 근거해 그대로 받으면 우리는 영원히 죽게 되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지옥의 형벌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멸망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의 본체이신데 어찌 자기의 자녀의 멸망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분의 의도는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 사랑 받는 복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본래 의도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는 심판 가운데 숨겨져 있습니다. 심판 속에 우리의 죄 문제에 대한 정답이 있습니다. 더 핵심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의 현장을 예루살렘과 그 주민이 아닌 십자가로 옮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들의 어깨에서 예수님께로 옮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스겔 2044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14절과는 대치되는 모순적인 말씀처럼 보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루어 질지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고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 그들이 모든 행위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14) 돌이키지 아니하십니다. 죄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했던 자들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예루살렘을 아끼지 않으시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기도 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랑하시는 독생자 아들도 아끼지 않으시고 저와 여러분을 위해 내어 주십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바울 사도는 증거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8:33-37) 십자가에 자기의 독생자를 내어 주시고 그를 대신해서 심판하심으로 우리의 행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자기의 사건으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53: 4-6)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여러분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여러분의 죄악 된 모든 행실을 씻습니다. 흰 눈보다 더 희게 양털보다 더 깨끗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증거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8)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9:14) 그렇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오직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내 나쁜 행실과 행위를 씻는 오직 한 가지 권세도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우리는 깨끗함을 받습니다. 이 은혜의 세계는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갑니다. 본문이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저희 묵상 집에 있는 묵상 에세이와 비슷한 예화로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겸손한 분들은 말합니다. “제가 사는 모습이 조금 바뀌고 나아지면 교회에 가지요. 아직은 삶의 모습이 예배를 드릴 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목욕탕은 몸이 깨끗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몸이 더럽고 때가 많은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주님 품 안이 그와 같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 앞에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누더기를 입고 몸에서 냄새가 나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죄의 누더기를 벗지 못하고 스스로의 죄의 때를 벗겨 내지 못합니다. 목욕탕에 가기 전에 때를 씻으려 애를 쓰는 어리석은 사람이 없듯이 예수님께 나오는 데 깨끗해 진 후에 나오려고 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추악한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예수님께서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주십니다. 그리고 다 씻겨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우리가 헛되고 못된 행실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는 오직 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격으로는 안됩니다. 내 능력으로 안됩니다. 돈으로도 권세로도 안됩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악한 행실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예수님의 몸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직 그 보혈의 공로로만 깨끗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속에서 구체적으로 개인화되고 실제화가 되어야 합니다. 바빌론의 포로사건과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이 역사적인 실제 사건이었듯이 예수 십자가의 사건도 역사적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여러분들과 저의 죄악은 다 사해 졌습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습니다. 말씀에 예언된 대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성경말씀에 기록된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용서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 왕의 왕으로 심판의 주님으로 오시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장난처럼 생각하고 설마 하며 진지하고 심각하게 듣지 않고 삶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심판을 받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런 영적 실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적으로 항상 깨끗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바르게 예배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깨끗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되고 참되게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경배하며 깨끗한 성도에게 주시는 깨끗한 복과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도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살아 역사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의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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