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안식이 있는 삶

평화와 안식이 있는 삶

(마태복음 11:28-30)

2015년 12월 13일(주일 낮 예배)

들어가는 말


여러분, 교민 사회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시는 것 쉽지 않지요? 피곤하고 힘들지요? 예수님은 이런 여러분들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시간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쉼이 여러분들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왜 우리는 그렇게 피곤할까요? 왜 그렇게 고단하고 평화와 안식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주로 과로 때문에 그렇습니다.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든지 아니면 진짜 욕심 때문이든지 아무튼 과로하면 평화가 깨집니다. 몸과 마음이 안식하기 어렵습니다. 과로 하고 계신지 아닌지 다음 증세들을 들어 보시고 한번 자가 진단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증세 중 두 가지 이상 여러분들에게 해당되면 여러분들은 어떤 의미에서 과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들어 보십시오. 졸음이 자주 오고 하품을 자주 한다. 별 이유 없이 근육통이 있고 몸이 결린다. 눈이 피로하고 시력이 약해진다. 집중력이 상실된다. 자주 잊어버린다. 괜히 심란한 마음이 생긴다. 이유 없이 불안과 좌절감이 든다.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연발한다. 허둥지둥 거린다. 어디든 몸을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신경이 날카로워 진다. 공연히 화를 낸다. 어떻습니까? 과로 증세가 있습니까? 이런 증세들이 많으면 평화와 안식이 있는 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삶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우리의 삶을 주님이 알고 계시며 그런 삶 가운데 평화와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저와 여러분들이 피로하고 고단한 이유는 우리가 제대로 쉬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쉴 만큼 쉬는 데 피곤합니다. 마음의 평화도 안식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는 잘못된 휴식의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의 휴가를 보내는 방법과 휴식을 취하는 방법을 점검해 보십시오.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휴식의 경우에는 평화와 안식보다는 오히려 피로와 마음속의 불안과 피로가 더 커집니다. 

 

예를 들어 휴식하면 꼭 어디를 가야한다고 생각할 때 그 떠남 자체가 짜증과 피로를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휴가는 꼭 어디를 가야만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휴가나 휴식을 노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무엇인가 놀이거리를 찾아 헤매며 보낼 때 그 휴가는 피곤합니다. 휴가는 노는 것이 아니라 안식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쉬는 것입니다. 휴가를 노는 것이라고 인식할 때 잘못된 놀이와 향락을 추구하게 되고 그 잘못된 추구가 가져다주는 공허와 갈등 때문에 오히려 마음의 평화와 안식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휴가나 휴식을 이런 저런 세상적 방법으로 스트레스와 근심을 날려 버리는 기회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약이나 술의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밀려드는 공허와 괴로움과 번민을 더 감당 못하게 만드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그러나 진짜 휴가나 휴식은 창조주의 품에서 삶의 리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리듬은 육체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즉 외적인 것이라기보다 내적인 것입니다.


잔디에 누워 하늘을 흐르는 구름을 한번 보십시오. 그 구름이 일정한 템포로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무리가 없습니다. 숲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에도 리듬이 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이나 흔들리는 나무 소리에도 리듬이 있습니다. 여러분, 삶에도 리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나치게 빨라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느려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일을 하고도 피곤에 지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많은 분량의 일을 하고도 별로 피로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력 때문이 아닙니다. 쉼의 원리 속에 리듬을 타고 흐르기 때문입니다. 참된 쉼과 안식의 원리를 적용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식과 쉼은 삶을 지속적으로 바르게 전진시키는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그런 쉼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와 안식의 여정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안식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 가운데 다섯 가지를 요점으로 정리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인생의 본질은 수고가 있고 무거운 짐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간은 원래 피곤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나 할 것도 없고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모두의 삶에는 수고가 있고 지고 가야하는 무거운 인생의 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고 묘사하십니다. 

 

희랍 신화 중에 거인 시지프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높은 산꼭대기로 거대한 돌을 계속해서 굴려 올리도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돌을 굴려 올려 산꼭대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돌이 그 산 꼭대기에서 반대편으로 다시 굴러 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지프스는 이 곤욕스럽고 열매 없는 고통스러운 형벌의 삶을 계속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는 교훈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수고와 무거운 짐을 피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인생은 이처럼 고통과 허무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전도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생각나십니까?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모든 것이 헛되다. 지혜나 지식이 많으면 자유로울 줄 알았더니 오히려 많이 알수록 번뇌가 더 많다. 즐거움도 헛되다. 찰라적이고 순간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재물도 궁극적 안식의 요람이 아니다. 지혜자나 우매자가 똑같이 헛되다. 권력자의 죽음과 거지의 죽음이 일반이다. 그러므로 인간 속에는 참된 평화도 안식도 없다. 이게 내용 아닙니까? 이런 인생에 대해 전도서를 쓴 지혜자인 솔로몬의 결론을 어떻게 내리지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 13-14) 인간은 다 수고롭고 무거운 짐 진 자와 같이 곤고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을 인간 스스로 자신 속에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전에는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로,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께 나올 때만 참된 평화와 안식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 갈 때 사람은 참된 쉼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참 평화와 쉼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평화와 안식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성경적 진리는 쉬는 것이 창조의 섭리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안식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안식을 아주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식과 쉼을 제도화하고 있을 정도로 강제로 안식을 지키도록 우리에게 쉼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치시거나 피곤하셔서 쉬기 위해 안식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들인 사람에게 쉼을 가르치고 교육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품안에서 쉼을 얻듯이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며 그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면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안식을 취하는 자기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 갈 수록 이 안식의 깊이는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는 것 같은 평화와 안식이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누렸던 축복입니다. 오직 예수께로 나아갈 때 이 평화와 안식은 가능한 것입니다.


십계명에도 제 4 계명이 안식에 관한 규정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 계명은 우리를 얽어매는 사슬이 아니라 잘 지킬 때 우리가 누리게 되는 평화와 안식의 원리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 날은 있는 사람도 쉬고, 없는 사람도 쉽니다. 주인도 쉬고 하인도 쉽니다. 가축도 쉬고 땅도 쉽니다. 온전히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성경은 7년마다 안식년 제도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종들이 있으면 6년 후 7년째는 후한 대접을 해서 놓아 주는 것입니다. 땅도 6년 썼으면 7년째는 그냥 묵혀 두는 것입니다. 또 안식년이 되면 빚진 자도 탕감해 주고 면제 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을 강제로 쉬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쉼이 없고 안식이 없으면 결국에는 망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피폐해지고, 육체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파괴되고 세상 논리에 사로잡혀 분주하고 바빠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지지만 그 삶 가운데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만 참 평화와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로, 우리의 쉼의 원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잘못된 평화와 안식 추구는 오히려 인간을 파괴합니다. 수고와 짐을 더 무겁게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여러분 우리가 지고 있는 최고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수고와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왜 불안합니까? 왜 초조합니까? 왜 마음에 평화가 사라집니까? 왜 마음에 참된 안식이 없습니까? 죄 아닙니까? 죄가 원인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죄입니다. 죄가 있으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마음에 쉼이 없습니다. 이 죄의 짐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새 사람 되기를 원하거든 구주를 영접하라. 즐거운 찬송을 하려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평안한 복지에 가려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의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맘 문 다 열어 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찬송가 538장의 찬송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나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때 우리를 짓누르던 죄의식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와 주님의 방법을 따를 때 참 평화와 안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안식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잘못된 방법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 중 한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빠지기 쉬운 평화와 안식의 추구하는 대표적으로 잘못된 삶의 유형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추구가 참된 평화와 안식을 제공할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많은 경우 돈, 그것이 여러분들의 평화와 안식을 앗아가고 피로를 일으키는 최고 원인됩니다. 부족한 사람이 풍족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풍족한 사람은 어떨까요? 역시 그 사람도 부족을 느낍니다. 만약 믿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 사람은 그 만한 물질이 있으니까 만족하겠다하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많은 경우 그 사람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부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할 것입니다. 그 물질이 참된 평화와 안식을 제공하지 못한 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돈은 참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원하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고통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면 해소 될 것 같았던 문제들은 돈이 있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 사람 곁에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이 벌어 놓은 돈 만큼 또는 수입만큼 행복한 것도 아닌데 우리 중 많은 사람은 그 돈 때문에 이미 주어진 평화와 안식조차 잃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불안하듯 부자도 고통이 있고 여전히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만족하게 사는 법을 배우시고 물질에 너무 얽매여 물질만 있으면 좀 평화가 오고 안정이 될 것이라는 거짓 기대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 모자란 듯한 여백, 그 여백이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되고 기쁨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활에 있어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경험하며 사는 길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그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러므로 우리의 물질 추구에는 반듯이 적절한 한계선이 그어져야 합니다. 그게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향한 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과 안식의 방법은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주님으로부터 배우는 게 정석입니다. 마가복음 1:21-35를 보면 예수님의 일과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과를 통해 참된 평화와 안식에 대해 배울 ㅜ수 있습니다. 오전에는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을 귀신들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오후에는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의 집에 심방을 가십니다. 거기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해가 진 후 저녁 시간에는 온 동네 사람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 문 앞에 모여듭니다. 주님은 쉴 사이도 없이 각색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들을 축사하시고 쫒아 내시며 오후를 지내십니다. 일과 사람에게 치여 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치시다 못해 탈진 하실 것 같습니다. 

 

도대체 주님은 이 많은 수고와 사역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소화 내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사역을 감당 하실 수 있는 체력을 유지 하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비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다른 방법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35절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예수님의 지친 몸과 마음, 곤한 영혼이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힘을 얻는 것입니다. 사역의 원동력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나옵니다. 그 교제 가운데 쉼을 얻고 평안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세상에서 제시하는 어떤 휴가나 놀이가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줄 것으로 착각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참 쉼과 안정감은 영적인 데서 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먼저 해결 받는 게 중요합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인간은 자유하게 되고 참 쉼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또 죽음의 문제가 해결 될 때 인간의 궁극적 불안이 사라지고 영혼에 평안이 깃듭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기까지 인간은 그 마음속에 늘 불안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고 휴식도 평화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배우는 영적 쉼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소란한 세상을 멀리하고 주님과 대화할 절대 필요가 있습니다. 바깥의 소란한 소리에 대해 문을 닫고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묵상은 최고의 휴가입니다. 나를 지으시고 내 생명을 보전해 주시는 창조주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이 최상의 안식입니다. 그 때 평화와 안식이 영혼과 마음, 그리고 육체에 임하는 것입니다. 

     

넷째, 그러므로 쉼은 내면에서 출발 될 때 진정한 휴식이 시작됩니다. 마음이 쉬어야 몸이 쉴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육체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안식과 평화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괴롭다, 수고롭다, 짐이 무겁다”는 말은 육체적인 의미를 넘어 영적이면서 심리적인 영역을 다 포함하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몸 피곤한 것은 그래도 나아요. 마음이 괴로워서 못살겠어요. 마음의 상처가 그 사람을 괴롭히고 평화와 안식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병보다는 마음과 영혼의 병이 더 위험한 것입니다. 상한 마음은 뼈를 마르게 하고 육체에 질병을 유발합니다. 의사들은 대부분의 병의 80%가 마음에 원인이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옴이니라.” (잠 4:23)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이 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우리가 주님께 나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가 회복되고 힘을 얻으리니가 아닙니다.(마 11:29) 마음입니다. 영혼입니다.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마음이 쉼을 얻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목적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제는 영적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육체에 병이 들면 의사에게 가야 합니다. 그러나 의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매우 한정적입니다. 의술로는 마음의 영역은 고칠 수 없습니다. 영의 세계는 의학이나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초의학적 영역입니다. 초과학적인 영역입니다. 인간의 무의식과 우리가 규명할 수 없는 감정의 세계는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세계는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그 미묘함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의 손길에 의탁 될 때만 진정한 처방이 나옵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죄성과 죄책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어찌 처방이 나오겠습니까? 마음의 방황과 고뇌를 인간의 능력으로 규정하고 멈추게 할 수가 없는 데 어떻게 치유의 방향을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그 마음과 영혼을 지으신 자, 그리고 오늘도 그 지으신 바를 이 순간도 운행하시고 지탱하시 분 예수님만이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즉 인간의 마음의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받아 누리지 못합니다. 명예도 돈도 해결책이 아닙니다. 아름다움도 건강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방탕과 연락은 더욱 인간을 병들게 하고 더 깊은 방황의 나락으로 침몰시킵니다. 마음을 모질게 먹어보는 인간의 단호한 결심과 손가락을 잘라보는 의지도 영혼과 마음에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감사하게도 종교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찾는 모든 자들에게 가까우십니다. 만나 주십시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분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참으로 평화를 누리고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그분 앞에 정직하게 내어 놓을 때만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하나님 되시는 예수 앞에 나올 때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우리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안식하고 쉬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볼링 좋아하시는 분 계십니까? 볼링의 기원이 기독교에서 만든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볼링 교과서를 보면 첫 페이지에 볼링의 시조가 종교 개혁가인 Martin Luther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래 볼링은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다가 잠시 쉼의 여유를 갖기 위해 공놀이를 하던 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적당한 휴식이나 놀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평화와 안식을 추구하는 것을 죄악시하지 마십시오. 마치 게으른 자의 사치처럼 비난하지 마십시오. 물론 진정한 평화와 안식은 주님께 나올 때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허락한 많은 건전한 쉼의 방법들을 잘 활용하는 법도 배우십시오. 그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열등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물론 휴가와 놀이에도 기독교인의 윤리가 있습니다. 이 윤리와 성경적 기준들이 잘 지켜질 때 우리의 마음에 평화와 안식이 주어집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영혼에 그 놀이나 휴가가 오히려 그늘을 지게 할 수가 있습니다. 평화와 안식을 뺏어가는 여우가 될 수 있습니다.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바른 기준을 가지고 쉼의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휴식과 쉼은 준비의 기간이고 재 창조의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건전해야 마음도 편하고 몸도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우리는 주님이 초대하시는 평화와 안식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우리 인생은 수고와 무거운 짐이 당연히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가 그 수고와 무거운 짐을 주님께 가지고 나오기를 기대하십니다. 주님께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예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무거운 죄의 짐과 사망의 덫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쉼의 원리를 주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 가운데 창조주와 교제 가운데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분주하고 쫓기는 삶의 현실에서 주님 앞에 고요하게 엎드려 성령의 인도하심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교제 안에서 새 힘과 재충전의 능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평화와 안식이 회복됩니다. 이 평화와 안식을 위한 여정은 내면의 출발에서 시작됩니다. 단순한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며 내면적인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과 영혼이 쉼을 얻을 때 참된 평화와 안식이 우리의 온 삶을 감싸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건전하고 건설적인 쉼과 휴가의 많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죄악시해서도 안 되고 쉼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좋은 것들을 개발해서 삶 가운데 잘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안식이 있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혼자서 외롭게 방황하고 피곤해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순간순간 나아가 평화와 안식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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