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유다입니다.

내 이름은 유다입니다.

(마태복음26:47-56)

2016 320 (주일 예배)

들어가는 말

제 이름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제 출신지가 유대 남부 지방 가룟이기 때문입니다. 가룟 출신의 유다라는 뜻입니다. 저희 부친의 이름도 가룟 시몬입니다. (10:4) 성경에는 제 이름과 같은 사람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야곱의 넷째 아들의 이름이 유다입니다. 자녀를 낳으면 부모님들은 자기의 소망이나 기도 제목을 담아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주듯이 저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평생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찬송하다라는 뜻의 유다를 제 이름으로 정해 주신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에 참석해서 찬송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경험은 거의 생각나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유대인이고 저희 민족의 전통을 따라 모든 유대인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였을때 마다 하나님을 찬송했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습관을 따라 한 것 뿐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계산에 밝고 숫자를 다루는데 유능해서 똑똑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행적이 그렇듯이 저에 대한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 한 인물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저에 대한 기록은 지구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 이름이 기억되는 것은 언제나 내가 만난 그분과 연관될 때 뿐입니다. 마치 그분없이는 내 이름은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바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예수입니다. ( 16:16) 갈릴리 지역에 살던 저는 어느날 그 지역에 혜성처럼 나타난 순회 설교자인 그분에게 제자 중 하나로 선택받게 됩니다. 그분이 부르신 사람은 전부 열두 명이었는데 그 열둘 중에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베드로와 요한, 마태와 야고보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 10:1-4; 3:13-19)


저는 그 열두 명중에서 숫자와 계산에 뛰어나서 돈궤를 맡아 회계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 12:6)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신뢰를 받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거지요. 하지만 제가 바라보는 돈에 대한 관점과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물질관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한 가지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식사를 하고 계신 예수님께 다가와서 엄청나게 비싼 향유를 통째로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저희는 속이 상해서 말했습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26:8-9) 저를 비롯해서 몇몇의 제자들이 이렇게 말을 하자 예수님은 그때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고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26: 10-12) 저뿐만 아니라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중에 아무도 이게 무슨 뜻인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의 돈에 대한 태도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분이 대단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병든자를 고치셨는데 병이란 병은 모두 다 고치셨습니다. 귀신들린자들을 고치셨는데 모든 귀신들을 다 쫒아 내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작은 떡 다섯 개로 남자 어른만5천 명을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닌 여러번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 뿐인 줄 아십니까? 바다위를 걷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내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 말은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인 원리 속에서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 댓가를 조금씩만 받는다고 해도 얼마나 큰 돈이 되겠습니까? 엄청났을 것이라는 것을 어린아이라도 금방 알겁니다.


처음에는 이분을 따라다니게 된게 정말 흥분과 기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분이 저를 제자로 불러 주신 것이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크게 한 몫 잡게 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이분을 따라다녀봤자 별로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 마음에 결심을 굳게 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아까 말씀드린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향유 사건입니다. 저는 그 순간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는 이분과 결별을 하고 내길을 가야 하겠다. 예수님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과도 정이 들어서 헤어지기는 섭섭하지만 이제는 내 살길을 찾는게 현명하겠다는 판단이 선것입니다. 그분이 제가 기대했던 강력한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닌 것을 알게 된거지요. 게다가 뒤돌아보면 율법에 금지된 세리들이나 죄인들과만 교제했지 권력자들이나 부자들과는 별로 교제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혹시나해서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따라 왔는데 예루살렘에서도 평소에 보아왔던 기적도 베풀지 않고 자기의 권능도 우리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말씀드린 대로 경제적으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이분의 성품을 잘 압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참에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그래도 제몫은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모여있는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따로 마련한 주머니가 두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돈이 될 만한 것은 예수, 바로 그분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허비한 여자를 칭찬하면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지리라하는 순간 바로 결심했습니다. ( 26:13 이 예수님을 못 잡아 안달이 난 대제사장들에게 값을 받고 팔아 넘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배반하고 그 댓가를 받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결심은 약해지기 전에 신속하게 실행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슬그머니 혼자 대제사장들을 찾아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욕심이 제 영혼에 사탄을 초청한 것이었습니다. ( 22: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13-16) 저하고 함께 3년 동안 제자 생활을 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저는 욕심때문에 사탄에게 속았던 것입니다. 그 친구는 그 영적 진리를 깨달았는데 왜 저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고보뿐이 아닙니다. 나중에 보니까 바울도 그런 진리를 잘 알고 교훈을 남겼더군요.  부하려고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9-10) 지금 이 순간은 이 말씀이 진리인 것을 가슴깊이 절감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기에 도 후회가 됩니다.


아무튼 그날 밤 그 순간 저는 사탄에게 제 영혼을 팔아넘기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저는 결심이 약해질까봐 더 빨리 대제사장들에게 달려 가서 제 속마음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정말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은 30개를 주기로 약속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되는 돈이냐구요? 말씀 드리기가 조금 쑥스럽네요. 요즈음 여러분들이 사용하시는 호주 달러로 따지자면 약4,000불 정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노예가 소나 짐승에 받혀 죽으면 주인에게 물어주는 노예 한 사람의 값에 해당합니다.  맞습니다. 절대로 큰 돈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그런 급한 상황에서는 그래도 그게 최선책이었습니다. 큰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는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요? 게다가 돈이 궁할 때 그 정도의 돈이면 나름대로 급한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습니가? 여러분들도 이 점에는 모두 동의하실 것입니다. 다 돈때문에 궁지에 몰려 보셨지 않습니까?


그래도 일단 약속을 했으니까 작전을 짜야지요? 무슨 작전이냐고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 주는 인수작전말입니다. 게다가 제 체면도 있고 하니 제가 안드러나는 방법이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먼저 제안을 했지요. 내가 입맞추는 자가 예수이니 그를 잡으라( 26:48) 우리는 만나면 늘 그렇게 인사를 했거든요. 새삼스러울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것이니까 의심받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 유대인 사회에서는 서로에게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인사법이었으니까요.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분이 계실 곳이 분명한 겟세마네 동산으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큰 무리을 인도해서 그곳으로 함께 갔습니다. 마침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과 함께 우리가 다가가고 있는 방향을 향해 오고 계셨습니다. 순간 제 마음이 멈칫했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태연히 그분에게 다가가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제가 입을 맞추면서 이렇게 최후의 인사말을 이렇게 했습니다. “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26:49) 늘 하던 인사였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 16:16) 아까 말씀 드린대로 그분이 굉장한 기적과 이사를 베푸시는 대단한 분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모든 것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이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받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모든 능력과 권세를 단 한번도 제가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으로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저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된 친구들도 모두 보잘 것없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은 돈도 모을 줄 모르는 경제적으로 거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그 많은 군중이 따라다니는 데도 그것을 조직해서 세력화할 줄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말을 하자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도 평소에 하던 대로 선생에 해당하는 칭호인 랍비라고 부르며 죽음의 입맞춤을 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입맞춤이었습니다.


그 입맞춤의 순간 예수께서 제 귀에 대고 선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행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26:50) 그 순간 가슴이 뜨끔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분은 제 속에서 흐르고 있는 모든 생각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일순간 후회가 밀려 왔습니다. 사실 이런 감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여러번 있었고 저는 그때마다 그런 연약한 감정을 억누르며 모질게 마음을 먹곤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제 심장을 도려내듯 아프게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그날 밤에 함께 식사를 하던 자리입니다. 모두 함께 식사를 하는 데 예수님이 뜬금없이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26:21) 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때 모든 제자들이 크게 염려하며 각자가 예수님께 물었지요. 주여 나는 아니지요?”( 26:22) 그때 예수님이 애매하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 그가 나를 팔리라( 26:23) 모두 한 그릇에서 빵을 가져다 먹는 데 그런 대답은 너무 애매한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분이 그 말씀을 하신 후에 덧붙여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 26:24) 너무 심각하고 지나친 말씀이잖아요. 제 생각에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 26:25)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가 말하였도다( 26:25) 제가 예수님을 팔 사람이라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듣는 사람들은 모르는 대답이었지만 그때 속으로 제 마음에는 깊은 찔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 마음을 자세히 알고 계셨고 제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마음속에 은근히 자리잡고 있던 악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정말 아까운 기회를 놓쳐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순간도 이미 제 마음의 생각을 너무도 속속들이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여 네가 무엇을 행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 26:50) 속으로는 당황스러웠지만 억지로 의연한체 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자칫하면 큰일 날뻔 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또 사고를 친 것입니다. 이 친구가 칼을 빼서 저하고 함께 간 사람 중 한 사람의 귀를 잘라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8:10) 저는 순간적으로 이러다 양편이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사태를 수습한 것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드럽지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꽃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26:52) 그리고는 떨어진 말고의 귀를 주워들고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 ( 22:51) 말씀하시며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엄위하신 권위 앞에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고의 귀를 원래대로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이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55-56) 그 순간 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지요. 이후의 사건의 경위는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십니다. 예수께서 온갖 고난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뭍히십니다. 그리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부활 40일만에 승천하셨습니다.


저는 그 동산 사건 이후 큰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양심은 번민과 후회로 가득차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죄없는 분을 불의한 자들에게 내어 준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달려갔지요. 그리고 그들에게 받은 은 30개를 돌려 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 27:4)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 27: 4) 저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인류 최악의 죄를 짓고 만 것입니다. 죄없는 그분은 이미 팔려 넘기워져 정죄를 받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후회는 너무 늦었고 기회는 다시 올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절망가운데 정신없이 성전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분이 더럽고 추악한 세상 욕심에 사로잡힌 종교인들이 장사를 하던 것을 나무라며 청결하게 하셨던 바로 그 성전이었습니다. 저는 그 성전 안에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은 30개를 던졌습니다. 혼란스럽게 귓전을 울리는 쨍그렁 소리내며 떨어지는 은전들을 뒤로하고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제 손에는 저도 무르는 사이에 밧줄이 들려 있었고 저는 그곳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 밧줄을 걸고 제 목을 그곳에 걸었습니다. 얼마간의 고통스러운 순간이 지나고 저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제가 죽은 것입니다. ( 27:5) 후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밧줄이 끊어져서 제 몸이 땅에 떨어지면서 곤두박질 치고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고 하더군요. ( 1:18) 무덤도 없고 비석도 없는 처참한 저의 최후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집니다. 게다가 저는 지금 여러분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들으니 어느 나라에서는 제 이름을 따서 유다라고 자기의 자녀를 결코 부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심지어는 개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는다더군요. 아마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제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마지막 부연으로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조금 심각한 질문입니다. 더러운 내 이름에 침을 밷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예전에 갈릴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열심히 쫒아 다니고 따라다니는 당신은 누구냐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그런 분이 없기를 바라지만 제가 여러분들 중 누군가를 향해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당신이 바로 나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당신속에 나 유다가 있다라고 말하면 내가 너무 지나친 것입니까? 목사라고 으스대는 당신이 속에는 나와 같은 유다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교회 직분자라고 말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당신 속에 나 유다가 잇다고 말하면 기분이 상하십니까? 참 이상합니다.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보는 데 당신은 내 속에서 당신을 못보신단 말입니까? , , 돈 그놈의 돈 때문에 …. 나 가룟 유다를 비웃으며 나는 너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당신이 오히려 가소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신 속에 있는 악마적 죄성과 세상적 욕심으로 뭉쳐진 본성을 보면서 그 겸손의 왕 예수님 앞에 결코 겸손하지 못한 당신속에 유다가 살고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과 나의 차이는 없는 것 아닐까요? 나만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파는 죄인이고 당신은 거룩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이제 말을 마쳐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말은 진실이 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내가 예수를 팔아 고난의 십자가에 넘겨 주었듯이 당신의 죄가 나 유다가 되어 그렇게 소리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닌 척하며 은 삼십에 예수를 그토록 자주 팔아 넘기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당당하게 활보하며 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당신, 그게 당신 안에 엄연하게 살아 있는 유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부탁드립니다. 나 유다처럼 어리석게 주어지는 회개와 돌아섬의 기회들을 놓치지 않기를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을 하지만 실상은 나 유다의 제자로 살아가는 당신, 나를 따르면 나처럼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을 따르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로 살아가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고백을 드리며 그분을 따르며 그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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