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삶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삶

(마태복음 28:1-20)

                                                                                   2016327 (주일 설교)

들어 가는 말

몇 주전에 Macquarie Mental Hospital 에서 참 독특한 분을 만났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정신병원입니다. 45세 정도 된 호주 여자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직업은 병원에서 병동을 돌며 환자들을 영적, 정신적으로 돕고 위로하는 Chaplain, , 원목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별로 독특할게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목을 합니다. 자원 봉사자로 하기도 하고 전문 직업인으로 하기도 합니다. 이분이 독특했던 것은 이 원목님이 불교신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파란 눈을 가진 금발인데 머리는 아주 짧은 빡빡머리였습니다. 스님처럼 머리를 깍고 청바지에 티셔스를 입고 다닙니다. 불교적 문화와 유교적 배경 출신인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신기하고 호기심이 가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말기환자를 만나면 어떻게 위로를 하십니까?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와 불확실한 미래때문에 염려하는 그런 환자들을 어떻게 위로해 주십니까? 그분은 아주 단순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생에는 당연히 고난과 고통이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다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 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덧붙여 말했습니다. 친절하게 그들과 함께 해주고 귀를 열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공감적 경청을 해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말기 환자들이 힘과 소망을 얻나요? 그분은 그렇다고 말하면서 함께 해주고 경청해 주는 것이 임상목회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습니다. 그거야 저도 알고 있는 기본이었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질문 겸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 뒤의 세계와 같은 인생의 궁극적 문제들에 대해  불교에서 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해서 그곳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정답을 찾고 소망 중에 살아가는데 당신은 왜 정답이 없는 그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셨습니까? 죽음의 불안과 두려움가운데 보내는 분들에게 당신의 처방이 참으로 위로와 소망을 준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분은 약간 당황해 하면서 화제를 돌려 자기도 예전에는 장로교 성도였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내심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더 이상 대화를 하다가는 그분의 입장이 너무 난처하게 될 것같아 이야기를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분이 떠난 호주 장로교 성도요 목사아닙니까? 마음속으로 열도 나고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소망?! ; 예수의 부활 소식


여러분, 우리 이 시간 각자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 봅시다. 내가 진정으로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인생을 계속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인간이 진정으로 소망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 조건은 죽음뒤의 문제에 대한 해답까지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상의 삶으로는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최후의 순간에 반드시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죽고 싶어하지 않는 그 죽음에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지상에서의 삶은 완전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함께 소망도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죽음뒤의 세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죽음 너머 저쪽에는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우리의 현재의 삶이 달라집니다. 죽음 뒤의 미래에 대해 소망을 품고 기대할 것이냐 아니면 절망 가운데 대책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냐를 결정합니다.


오늘 본문은 저희에게 정답을 시원하게 공개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죽음뒤의 세계입니다. 다시 사는 소망입니다.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하는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언젠가 나의 무덤도 빈 무덤이 된다는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인류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죄와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다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살아나셨습니다. (We live and die, but Christ died and lived.)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의 얼굴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인간을 가두는 감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앞으로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The resurrection of Jesus changes the face of death for all His people. Death is no longer a prison, but a passage into God’s presence.) 1974년에 미국의 닉슨대통령은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이며 유일하게탄핵소추를 받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때 2년 동안 있어던 사건을 Watergate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때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으로 그 사건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고 나중에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어 감옥 선교에 헌신한  특별 보좌관으로 일했던 Charles Colson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오늘 바로 이 부활절은 무덤안에 진리를 가둘 수 없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날입니다. 그 진리는 무덤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압니다. 제가 경험한 워터게이트 사건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어떻게 증명하느냐고요? 왜냐하면 열두명의 제자들이 그것을 보았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 한번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40년을 증거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매를 맞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돌에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만약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결코 그 모든 것을 견디지 않았을 것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세상에서 가장 권력있는 12명을 분열시켰습니다. 그들은 단 3 주 동안도 입을 맞추어 거짓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중 누군가가 제게 열 두 제자가 거짓을 위해 40년을 일관되게 거짓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Absolutely impossible. ‘“(Easter says you can put truth in a grave, but it won’t stay there. “I know the resurrection is a fact, and Watergate proved it to me. How? Because 12 men testified they had seen Jesus raised from the dead, then they proclaimed that truth for 40 years, never once denying it. Everyone was beaten, tortured, stoned and put in prison. They would not have endured that if it weren’t true. Watergate embroiled 12 of the most powerful men in the world-and they couldn’t keep a lie for three weeks. You’re telling me 12 apostles could keep a lie for 40 years? Absolutely impossible.”)Charles Colson

반쪽 짜리 기쁜 소식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모든 사건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2,000년전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돌아 가셨습니다.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신분이 변화된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저주의 대상에서 축복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내가 이 사실을 감정적으로 받아 들이기 힘들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와 여러분들이 창세기 1:1에서 계시록 22:21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지킨 죄가 전혀 없는 의인처럼 여겨 주십니다. 이 사실이 확증 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입니다.

십자가의 죄용서 복음만 전하면 반쪽 짜리에 불과한 불완전한 기쁨의 소식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반쪽 짜리 기쁨의 소식? 이상한 말이지요?  제가 이곳에서 신학 대학에 다닐 때 참으로 재미있는 경험을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College Mission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년에 한 번 일주일간을 지도 교수님과 학생들이 여러 팀을 이루어 New South Wales 각 곳으로 흩어져서 그 지방의 교회들과 협력하여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주일 날 설교도 담당해 주고 주일 학교도 운영해 줍니다. 성경 공부도 인도하고 노방 전도도 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불신자 전도를 위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실습과정을 통해 지역 교회를 돕고 신학 대학생들이 훈련과 경험을 통해 목사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때 제게 한 가지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이 전도 대회를 소위 Pub, 선술집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Non-Christian들이 쉽고 편안하게 와서 복음을 접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초청하는 사람들은 물론 기존의 성도들입니다. 아니면 저희의 노방 전도나 가정방문 전도를 통해 초청 잔치에 오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때 설교를 담당하게 되는 사람은 교수님들이나 학생 중에 고학년이면서도 좀 탁월하다 싶은 사람이 맡습니다. 제가 한번은 Wollongong 남쪽에 있는 Geringong이라는 곳으로 College Mission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 행사를 했습니다. 그 때 학생 중 고학년이 설교를 맡게 되었는데 정말 탁월하게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너무 감동스러웠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그 학생이 말했습니다. “이번 주일 Geringong Anglican Church로 오십시오. 더 좋은 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전한 것은 반쪽 짜리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번 주일 날 나머지 더 좋은 반쪽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루의 사역이 마쳐지고 교회에 모여 모두 Feed back을 하는 시간이 돌아 왔습니다. 그때 지도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잘 했네! 하지만 자네 말대로 오늘은 반쪽 짜리 복음을 전했네! 그 사람들이 이번 주일 날 나머지 반쪽을 들으러 얼마나 올지 모르겠네! 우리 그들이 모두 나머지 반쪽을 들으러 오도록 기도하세!”

무슨 말씀일까요? 십자가의 복음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복음이 빈 무덤의 부활 복음과 함께 할 때 완전하고 온전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아가씨의 약혼자가 전쟁에 나갔는데 그만 소식이 끊어져서 생사를 알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암울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마침내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지 못한 반쪽 짜리 소식입니다. 진짜 기쁜 소식은 그 약혼자가 조금도 몸이 상하지 않고 죽음의 전쟁터에서 살아나서 약혼녀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 질 때가 아니겠습니까?

안식 후 첫날 새벽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반쪽 짜리가 아닌 완전하고 온전한 기쁜 소식을 온 천하에 전하는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아침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동이 틀 무렵에 이틀 전에 예수님의 시체가 안치된 무덤에 여인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간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 안타까운 사랑과 슬픔가운데 무덤이라도 보고 싶어 간것입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지진과 함께 하늘로 부터 내려온 주의 천사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과 같이 희었습니다. 무덤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근하고 기분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런 초자연적인 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정말 공포스러울 것이 당연합니다. 이 사건속에 천사의 모습을 보고 가장 놀란것은 밤을 새워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사들이었습니다. 병사들이 무서워 떨면서 죽은 사람처럼 됩니다.  

          놀라자빠진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나셨고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28:5-7) 여인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았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찾고 그분의 보혈로 죄용서 받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줄 아는 영적 믿음의 눈이 뜨이는 것 또한 십자가의 예수님을 찾는 것 만큼 중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 대신 온전한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하고 완전한 복음의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놀라운 사건을 선포했습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이 말씀의 뜻은 2,000년전 일어난 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영원히 살아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부활 하셔서 현재 살아계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날 뿐 아니라 빈무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죄 용서의 은총과 은혜를 누릴 수 있고 죽음너머의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생은 고뇌의 바다 같지만 소망 중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와도 밝고 환한 찬송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부활의 권세요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축복에 감격하며 누리시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서 전하라

          이런 기쁘고 경이로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한 사람에게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바로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을 가지고 서들러서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 갑니다. 본문 8절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달려가는 것은 부활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확신하고 믿지 못하면 이렇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때 더 놀라운 축복이 그 여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부활 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무덤을 떠나 달려가는 그 여인들 앞에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만나 주십니다. 왜 만나 주실까요? 믿는 자에게 더 큰 믿음의 확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의 법칙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으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11:1) 여인들은 민무덤을 본 것이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에서 누우셨던 곳을 보고 그곳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천사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달려 간 것입니다. 보지 않은 것을 말씀으로 듣고 믿음고 달려가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 주심으로 결코 부정 할 수 없는 증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록된 말씀대로 믿고 말씀이 실현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외에 또 다른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입니다. 그들도 달려 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11절입니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자신들은 원하지는 않았고 상상도 못했겠지만 가장 확실한 예수부활의 목격자들이요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염려했던 장로들도 대제사장들도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부활의 산 증인들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긴급대책회의를 엽니다. 유다를 돈으로 매수했듯이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합니다. 13절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늘 그랬듯이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거짓 증언을 하도록 사주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써먹은 동일한 방법입니다. 사탄과 악인은 언제나 같은 수법으로 악을 행하고 진리를 은폐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결코 은폐될 수 없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뇌물을 받고 거짓 증거하라고 시킨 것 까지 다 퍼져 나갑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루살렘에 가면 승천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장소 바위 위에 작은 교회를 세우고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그 교회의 특징은 지붕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공중으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을 무슬림이 차지한 후 지붕을 만들어 천정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 첫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했던 행동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그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 것을 더욱 선명하게 증거할 뿐입니다.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그 장소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고 무슬림들이 지붕을 만들어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 한다는 사실까지 설명을 듣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일회성으로 그치는 죽거나 소멸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을 통해서 뿐아니라 심지어는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도 증거되고 전판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무덤에 머물러 감격하고 놀라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을 떠나 그 무덤이 빈무덤이 된 것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치장된 화려한 무덤을 자랑하는 무덤의 종교입니다. 그 무덤에 누가 묻혀 있나를 자랑하는 죽음의 종교입니다. 불교가 그렇고 이슬람이 그렇습니다. 유교가 그렇고 힌두교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빈무덤을 자랑합니다. 그 무덤이 빈 것을 자랑하고 그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제자 삼아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대로 갈릴리로 가셔서 함께 만나기로 말씀하신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 주십니다. 대부분이 예수님을 뵙고 경배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아마 도마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현대인 가운데에도 도마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 그들의 영적 눈이 열릴 때 도마처럼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20:28)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더 확실하게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께서 당신이 바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신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면을 생각하면 너무 큰 사명같습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살아 온 삶의 모습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모습들을 보면 말도 안되는 사명같습니다. 너무 부족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명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부활의 주님이 그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게 하신다는 말은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절대로 혼자 일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명 감당하는 데 필요한 것 다 공급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불신자 전도하는 데 망설임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맡기신 일을 행하는 데 자신을 보며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나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명을 맡기신 부활의 예수님께서 사명을 함께 감당하십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믿는 부활의 주님에 대한 신앙은 이성으로 판단하거나 과학적 공식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영적 신비에 쌓여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믿음의 눈이 열리면 그 신비가 풀리고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는 실제적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부터 성취까지 신비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역사속에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성취된 바로 우리를 향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믿는 자에게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소망과 은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신비이고 하나님이신 그분의 십자가 죽음도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무덤에 묻히시는 것도 신비이고 무덤을 깨치고 부활 하시는 것도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 너머 부활의 소망을 갖는 것도 신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짧고 보잘 것 없는 경험과 지식으로 인간의 비극은 무덤과 함께 끝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빈 무덤의 신비를 아는 우리에게는 죽음은 부활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종말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생각하며 무덤 앞에서 누가 이 돌을 굴려 줄까 질문합니다. 과연 소망은 없는가? 라는 궁극의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어찌 그 소망없는 그 사람을 향해  인생은 고해라고 단순하고 어리석게 답을 주고 그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그것을 어찌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이 거대한 죽음의 돌문을 누가 옮길 수 있습니까?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정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죽은 자와 예수를 믿는 산자들에게는 이 세상의 고난도 슬픔도 더 이상 그 자체로 끝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죽음도 그 자체로 절망이 아닙니다. 오직 다시 오실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감깐의 과정이요 통과의례일 뿐입니다. 살아서 겪는 고통은 사라지고 눈물도 환희로 바뀔 것입니다믿는 자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될 것이고 모두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고 어린 양 예수,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우리에게는 선물인 것입니다. 믿는 자는 우리를 환영해 주는 친구를 기다리듯이 기대와 소망 가운데 죽음을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소망 중에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느 철저한 무력함 속에 감추어진 은혜, 그게 바로 부활입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잘 죽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죽음너머 저쪽 부활의 세계를내것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부분을 예수님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삶과 죽음이야 말로 모두가 수수께끼처럼 여기는 나 자신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며 살 수 있게 해 주는 해답이고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내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힘들어도 살맛이 납니다. 죽고 다시 산다는 이 절대진리를 알고 그 기쁨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지 않는다면 인간은 참으로 처량하고 비극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 스톤 교외에는 골든 코넬 신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이 코넬 신학대학원은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럿셀코넬이라는 지휘관이 있었는데 전쟁에서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이 그만 자신의 지휘도를 버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수치스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코넬 대령은 링이라는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이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속에 들어가 칼을 갖고 오기는 했으나 그만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천막에 들어와서 칼을 바치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홀로 지켜보았습니다. 무신론자였고 회의주의자였던 코넬은 그 순간 시체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 주여, 이 어린소년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읍니까? 주여 이 어린소년병이 찾는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결단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중에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서 세운 것이 골든 코넬 신학대학원입니다다. 아울러 Temple University를 세워서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하게 됩니다. 링의 죽음은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코넬 대령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들을 수없이 길러내는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한국 목성연 대표인 박승호목사님이 이런 메일을 보내 왔더군요. 그것을 읽어드림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나를 위해 목숨버린 사랑에 젖어 설레이는 가슴은 골고다를 향합니다. 무너진 세상을 환희로 바꾼 피로 절여진 십자가의 상흔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오늘은 사랑할수록 깊어지는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주시고 내일은 하늘 청청한 기름부음으로 환희의 잔치를 벌리게 하소서. 죄와 사망의 권세가 이젠 사라지고 빛의 나라 자유의 세계를 살고 싶습니다. 부활이여 오소서. 생명이여 사랑이여 자유여 곷 피우소서. 주님의 부활, 나의 부활, 너으 부활을 기다리며… “ 부활의 소망 가운데 힘차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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