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시는 예배

(에스겔43:13-27)

2016 424(주일 1, 2부예배)

들어가는

주일 아침 김집사님댁에서 김집사님과 High School 다니는 아들 사이에 교회에 가는 것을 놓고 실강이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빠, 그냥 교회에 가기 싫다니까요? 재미없어요. 지루하단 말이예요!” 사춘기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글쎄요. 그냥 흥미를 잃었어요. 별로 얻는 없는 같아요. 예배를 드려도 별로 마음에 닿지 않아요.” “지루하고 실제 생활에 별로 적용이 안되는 같아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나 아니면 교회 다니기를 중단한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말을 하는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심지어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십니까? 여러분은 이런 생각해 보신 없으십니까? 예배를 드리긴 드리는 뭔가 공허하고 허기지고 채워지지 않는 그런 영적 공허감을 느껴보신 없나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가지 빠진 같은 느낌, 없으십니까? 교회에 오고 예배에 참석하긴 하지만 그냥 형식적으로 순서를 따라 진행되는 대로 따라하다가 아무런 감동도 채워짐도 없이 예배의 자리를 떠나는 같은 경험을 보신 적은 없나요? 제가 말씀드린 이런 경우 어느 가지가 여러분이 느꼈던 감정이라면 시간 저는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감정이나 느낌은 여러분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많은 사람이 한번쯤은, 또는 때때로 경험하는 영적 상태입니다. They are experienced by most, if not all of us, from time to time. 어떤 분은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예배를 드리나? 염려되지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길르앗의 유향처럼 좋은 치유약이 있습니다. “Balm of Gilead” (Jer 8:22)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대로 예배를 드리면 그런 영적공허감들이 은혜와 감격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런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고 싶은 사람이 깨닫고 이해해야하는 영원한 진리를 계시해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4:23-24)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의 예배하는 가운데 그토록 자주 경험하는 영적 공허함은 사라지게 됩니다. 예배를 시시하게 만드는 사탄의 연막술을 제거할 영적 해독제를 찾게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영적 해독제를 찾아가기 전에 우리는 가지 질문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예배란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한번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의를 이해하면 신비한 영적비밀에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예배란 마치 상대의 발과 외투자락에 입맞춤을 하듯 스스로를 가장 낮은 자세로 낮추고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의 언어인 헬라어의 의미는 존경과 경의를 표현하기 위해 꿇어 엎드리는 굴복과 복종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상대를 향한 경의와 존경, 순종과 항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정의 가운데에서 강조점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Do you see the emphasis in all those definitions?)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도 바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강조의 대상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를 받는으시는 분입니다. (It is not on the worshipper but the One who is worshipped.)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보다도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 영혼의 고유하고 신령한 행위인 것입니다. 예배란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채우거나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란 우리의 음악적 또는 예술적 감각과 기호를 충족시키거나 사회적 복지와 현실적 필요를 공급받는 세속적 사건이 아닙니다. 예배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분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올려드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그런 방법으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고유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예배는 우리가 아닌 그분에게 초점이 맞추어질 시작됩니다. 나는 사라지고 조건없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의 제단앞에 올려질 진정한 예배가 출발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의 강조점은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The emphasis in the true worship is on giving, not receiving.) 찬양이 은혜롭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 또는 설교가 지루하고 딱딱하다고 말하는 사람, 예배가 감동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등등이런 사람들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의 가장 기본이 되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편의주의와 소비주의 문화가 예배속에도 깊숙히 침투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채우는 시간을 예배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영감없는 찬양이나 은혜없는 설교를 변명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예배에 임하면서 하나님 그분보다  자신 또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마치 마차를 앞세우고 말을 뒤에 두고 마차를 끌게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초점이 하나님에게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때 예배를 즐겁게 받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우리의 영혼은 다시 은혜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준비되어진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는 준비되어야 합니다. 허겁지겁 드리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간이던, 건강이던, 재물이던, 재능이건 모든 것의 최고를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지 쓰고 남는 것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모든 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루는 것은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을 드릴 번제단의 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이나 예배 규칙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제단의 규모와 치수에 관해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건축물의 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첫절인 14절을 보면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시작해서 17절의 층계는 동쪽으로 향할지니라 마칩니다. 위로 갈수록 크기가 약간씩 작아지는 안정된 세단의 층으로 되어 있는 단순한 석조 구조물입니다. 약간의 특징이 있다면 세번째 층의 귀퉁이에 뿔처럼 튀어나온 돌장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첫번째 단락인 13절에서 17절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이런 것을 지시하시는 분이 바로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의 생각이나 아니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출발이 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법만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대로 준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까짓 돌하나가 무엇이 중요하냐고 말할 있습니다. 조금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떠냐고 말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보다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인본적인 예배가 되게 하는 함정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경배를 받듯이 멋지고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장식한 제단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우상들의 제단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장식이 화려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단순합니다. 그래서 순종하기가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단순하게 순종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예배는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십니다.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충만감은 예배자의 영혼을 감동과 감격으로 흘러 넘치게 합니다. 영적으로 새로움과 재충전을 경험하게 합니다. 세상을 이길 넉넉한 용기와 힘을 얻게 합니다. 여러분 모두 바르게 준비된 예배를 드리시는 신령한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결하고 거룩한 예배를 즐겁게 받으십니다.

                본문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두번째 단락인18절에서 27절은 제단을 위해 행할 규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단을 만드는 날에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 43:18) 제사장들이 어린 수송아지와 숫염소를 잡아 피를 발라 제단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결하고 거룩한 예배를 하나님은 즐겁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제단에 번제로 드릴 희생 제물을 올려드리기 전에 흠없는 제물을 잡아 피로 제단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속죄 제사의 규례입니다.  레위기 16 18절과 19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론은) 여호와 제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손가락으로 피를 위에 일곱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하게 것이요 ( 16:18-19)  정결의식을 그렇게 칠일동안을 합니다. 성경에서 칠은 완전수입니다이렇게 완전하게 정결하고 성결하게 후에 하나님께 온전한 희생제물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일을 아론의 휴예인 사독의 자손중 제사장이 합니다. 이들은 바로 영적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자신들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이런 피를 통한 정결행위는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율법을 저버린 대가로 심판 중에 있는 이런 유다에 대한 회복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제단의 회복은 유다백성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언약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고 용서를 의미합니다. 축복의 회복을 의미하고 미래의 보장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저와 여러분들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실 성결하고 거룩하게 준비하기를 원하십니다. 결코 화려하지 않고 비록 단순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는 나만의 영적 제단을 건축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형식만 갖춘 건축물이 아닌 흠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하고 성결하게 내면의 제단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즐겁게 받으십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흠없는 동물의 피가 무엇이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희생으로 말미암아 뿌려진 피를 보고 저주가운데 초라하게 죽을 밖에 없는 바람앞에 촛불같은 가련한 인간들의 생명과 삶을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요구들을 믿음으로 행하며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모든 자에게는 삶의 역전과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게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앞에 나가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길이요 휘장은 그의 육체니라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 10:19-20; 3:25-26)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가는 참된 예배는 이렇게 영혼과 마음의 정결과 성결이 선행될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때 예배를 하나님은 즐겁게 받으십니다.

                죄를 짓고 심판과 징계 가운데 있는 자에게 가장 간절하고 중요한 것은 조건없는 용서입니다. 용서의 표시가 바로 피로 정결하게 제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 감히 어찌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있겠습니까? 인간이 예배한다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고 내가 그분을 인전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용서하실 의도도 없이 희생 제사제도를 만드셨겠습니까? 용서하실 의도도 없이 제단을 쌓게 하고 동물을 잡아 피로 정결하게 하도록 요구하시겠습니까? 예배를 즐겁게 받아 주실 마음이 없이 어찌 예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용서하실 준비가 완벽하게 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시기를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단을 준비하게 하시고 피로 정결의식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게 하나님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는 일을 갈보리 십자가에서 행하셨습니다. 바로 온전하고 흠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시고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죄의 깊이와 무게를 깨달으며 상한 심령으로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의 예배를 즐겁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고 부르십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본문에서 바로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회복시켜 그것을 얻고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의 초점과 강조점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초점을 두고 예배들 드리는 예배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없는 축복과 기업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에 뿌려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9:12-15) 첫째로는 죄에서 깨끗하게 되어 용서 받았음을 알게 하도록 예배에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계속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시는 목적입니다. 세번째는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시는 목적입니다. 내세에 영생을 주시고 현재의 가운데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즐겁게 받으시는 하나님은 예배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언약가운데로 다시 부르시고 언약의 축복들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27절을 함께 보십시다. 모든 날이 팔일과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주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3:27)

여러분 받아주심의 은혜를 아십니까?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받아 드려지는 은혜를 그리워합니다.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어합니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은 아픔이고 불행입니다. 부모에게 버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마음에 상처가 좀처럼 치유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고백을 거절 당한 사람은 다른 사랑을 하기가 힘듭니다. 창세기에 기록되는 가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의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려지지 않았다고 생각이 들때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최고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된 예배를 드릴 하나님은 에배를 즐겁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결하게 구별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하나님은 기쁘게 예배를 받아 주십니다

나가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십니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하나님은 즐겁게 받으십니다. 둘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비되어서 드려져야 합니다. 단순하고 작은 일들이지만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복장, 시간, 예물, 태도, 마음 가짐등 모든 것을 준비된 상태에서 예배를 드릴 하나님은 예배를 즐겁게 받으십니다. 셋째로 예배는 거룩과 성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저와 여러분들이 있는 것은 오직 가지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소와 염소의 피로 제단을 정결하게 제물을 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통해 예배를 즐겁게 받으신 하나님은 예배자를 축복하십니다. 지난 날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언약가운데로 다시 부르십니다. 축복의 영토,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며 축복의 분량과 영역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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