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에스겔 48:30-35)

주일 오전 예배(2016 5 1)

들어가는 말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라는 (The Lord is there.)의미입니다. 바로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성경에 계시되어지는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서 엘 샤다이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여호와 샬롬은 평화의하나님입니다. 여호와 라파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로이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Jehovah is our Shepherd.)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백성 가운데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이름이 에스겔을 통해 계시된 이름입니다.

에스겔은 아론의 후손인 사독 계열의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는 서기전 587년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동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 그발 강가에 정착을 합니다. 포로로 잡혀간지 5년만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여러가지 상징과 기이한 행동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예언합니다. 마치 전위 예술가가 기이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좌편으로 390, 우편으로 40일을 누워지냅니다. ( 4:4-8) 북이스라엘과 유다가 지은 죄의 횟수를 나타낸 것입니다. 사람의 똥으로 불을 피워서 구운 부정한 떡을 먹기도 합니다. (4:9-17) 예루살렘이 포위 되어 있을 동안 당할 고통을 나타냅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지만 슬픔과 애도를 금지당합니다. (24:15-24) 예루살렘의 파멸로 인한 울 수 조차 없는 극심한 슬픔과 비탄에 잠기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행하며 아파하는 에스겔의 심정은 바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하나나님의 아픈 심정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에스겔은 역사의 가장 비극적 전환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가 예언 했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심판입니다. 1장에서 32장까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의 역사를 주관자하시고 심판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은 하나님 백성의 죄악의 결과였습니다. 이런 심판의 모습을 바라보며 백성들이 생각하고 느꼈던 것은 어땠을까요? 여호와은 그곳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계시지도 않고 자기들 중에도 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된 백성인데 이렇게 처참하게 당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다면 절대 이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안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에는 숨겨진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데 바로 회초리 속에 담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두번째 예언의 내용입니다. 33장에서 48장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은 구원 계획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실 뿐 아니라 구원자이십니다. 그 심판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삼마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심판 하시는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회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백성 중에 함께 하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구원과 회복의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이런 사랑을 어머니를 통해 체험했습니다. 두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님은 우리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참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린 저는 그런 그분의 깊고 한많은 삶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국민학교 4학년때 어머니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딱지도 사고 군것질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스스로 집에를 못들어가고 공사장에 숨어있다가 방범대원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제 도둑질은 들통이 났고 어머니는 저를 나무 빚자루로 심하게 매질하셨습니다. 그때 매가 제 종아리에 와 닿는 순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용서 받았구나! 이제는 다시 시작할 수 있구나! 얼마를 그렇게 때리시던 어머니가 빗자루를 던지고 저를 부둥켜 안고 한없이 우셨습니다. 그때 저는 깊이 느꼈습니다. , 어머니가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시는구나! 어머니의 매는 나를 향한 사랑이었구나! 그 후로 어머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 나름 애를 쓰는 살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자기의 백성에게 심판의 회초리를 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때때로 우리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마치 숨어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전혀 돌보지 않으시는 나를 모른채 하시는 분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의 모습은 내 기대와는 너무도 다르게 전개되고 생각지도 않은 불행이 나를 엄습할 때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런 순간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목사님께서 17913 2일 오전 10시경 88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임종 10일 전이었습니다. 피로하고 지친 몸을 힘겹게 움직여 무엇인가를 쓰려고 펜을 잡으려고 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비서 릿치양이 무엇을 쓰시려고 그러세요, 목사님! 제가 써드릴께요.” 하고 말했습니다. “별로 쓸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아 함께 하신다는 것 밖에는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기도와 찬송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기도가 마치고 나면 그 때마다 큰 소리로 아멘!”을 했습니다. 임종이 가까와지자 성도들이 웨슬리 목사님의 방으로 모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을 향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거야!” 맞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있을 지 모르지만 그분은 우리를 한 순간도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어도 아버지는 한 순간도 그 아들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을 뿌리치고 냉정하게 돌아섰을지 모르지만 그분은 우리의 손을 한번도 놓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여러분, 이런 고백을 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믿음과 고백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

첫째는 여호와 삼마로 함께 계시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한 순간도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와 혼합 종교를 통해 수도 없이 떠났다. 가슴이 아프기로 말하면 떠난 사람보다 남아있는 사람이 가슴이 더 아픈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속상한 울부짖음을 발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회초리질하면서 사랑을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십니다.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는 많은 종족의 인디언이 있습니다. 그중 한 종족의 인디언 남자의 성인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13살이 되기 전에 아들에게 사냥법, 물고기를 잡는 법, 창 던지는 법, 말타는 법, 텐트를 치는 법, 모든 것을 다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13세에 다다르면 성인식을 합니다. 달도 빛을 잃은 그믐날 깜깜한 야밤중에 아버지는 아들의 눈을 가린 채로 깊은 숲속으로 데리고 갑니다. 숲이 너무 깊기에 별빛도 볼 수 없는 먼곳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리고는 그곳에 놓아 두고 눈을 풀게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혼자 두고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차갑고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드립니다. 적막을 가르고 들려오는 짐승소리에 아들은 기겁을 합니다. 공포와 두려움의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나와서 자기를 해칠것만 같습니다. 도망 갈 길도 없고 벗어날 길도 없습니다. 자기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잠을 자기는 커녕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 철저한 외로움과 추위를 이기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긴장의 시간이 천금같이 천천히 지나고 나면 어두움이 서서히 걷히면서 여명이 밝아 옵니다. 어렴풋이 주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들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 봅니다. 그때 한 쪽 바위 곁에 버티고 서 있는 건장한 사나이, 바로 아버지! 어깨에 활을 메고 손에는 창을 든 늠름한 전사! 바로 그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그 온 밤을 그곳에서 묵묵히 아들을 지켜보며 잘 견디기를 소망한 사람! 아들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보며 그를 보호해 준 바로 아버지라는 존재! 한 순간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 그곳에 있었던 아버지! 그때 아들이 느끼는 그 전률적인 사랑! 아버지의 사랑! 여러분, 느껴지십니까?

바로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 언제나 백성의 고난과 시험 중에 거기 계신 하나님! 한번도 그들을 혼자 두지 않고 함께 하신 하나님! 이게 바로 여호와 삼마가 주는 소망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예수님 대신 오신 성령님! 조건 없이 곁에 머물러 주는 친구, 사랑입니다. 병에 걸려 그 곁에서 눈물 흘리는 엄마들의 고백을 아십니까? ‘목사님, 함께 해주는 것 밖에 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요.’ 함께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죄인의 상태속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게 하시는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사랑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모든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인 심판에서 건져 주십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는 존재인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건져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나니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8-19)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28:20)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은 바로 당신과 함께 하심으로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을 깊이 숨쉬고 경험하시는 은혜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너를 지키고 보호한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지켜주심을 말합니다. 형 에서에게 죄를 지은 야곱의 줄행랑을 기억하십니까?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여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빼앗습니다. 어머니와 의논 끝에 자기를 죽이려는 형 에서의 칼날을 피해 하란으로 정처없이 부모오 고향을 등지게 됩니다. 뜨겁고 메마른 광야의 여정 가운데 밤을 맞이합니다. 루스라는 광야입니다. 루스는 광야라는 뜻입니다. 마치 야곱의 인생 같고 지금의 야곱의 심정같습니다. 이런 광야에서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루스에서 만나는 하나님! 광야 인생길에서 만나는 하나님! 인생의 가장 절박한 위기에서 이슬을 맞으며 추위속에 잠이 든 야곱에게 꿈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 창세기 2813-22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야곱의 도피길에 함게 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삼마로 그와 함께 광양에 거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야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는 여호와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너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28: 13-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과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이에 대한 야곱의 고백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28:16-17) 바로 여기 계신 하나님! 내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마침내 축복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야곱이 만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다윗도 경험합니다. 다윗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죽음 같은 골짜기를 다녀야 하는 인생의 절박함 가운데에서도 지키시고 보호하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바로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여호수아도 만났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인도하고 보호해 주던 모세가 죽었습니다. 200만명의 백성을 앞에 놓고 가나안 정복이라는 엄청난 사명만 남겨 둔재 하나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이 축복의 땅 가나안을 앞에 두고 요단 강 너머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는 하나님! 강하고 담대하라 누려워 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 1:9)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네가 가는 곳에 여호와가 계신다.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한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와 격려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삶에 어려움이 닥치고 위기에 처한 것 같습니까? 염려 하지 마십시오. 여호와가 여러분 중에 계십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기대하며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미래를 책임지겠다.

세번째로 여호와 삼마의 의미는 장래 다가 올 미래를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새로운 성읍에 거하시겠다는 것은 미래를 보장하신다는 말입니다. 소망이 끊어진 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미래의 소망과 비전이 아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루실 미래의 축복이 아닙니까? 포로로 잡혀가서 고난과 비애 가운데 삶을 살가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소망은 바로 여호와 삼마가 되어 주셔서 미래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물론 에스겔서에 나타나는 회복된 기업과 성전, 그리고 성소는 바로 장차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실 새하늘과 새땅이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천상적 축복의 그림자입니다. 지상의 축복너머 영원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계시록 21장과 22장의 비전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비전입니다. 요한 사도가 하늘에서 늘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은 다 지나갔음이러라(21: 3-4) 하나님의 장막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친히 자기의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백성 가운데 거하시면서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도록 해 주시는 삼마의 하나님!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런 삼마의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신령한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눈물을 닦아 주는 인생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의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것이 지나가고 새것을 누리는 미래가 주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런 삶을 받아 누릴 수 있을까요? 계시록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리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취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 22: 4-5) 어린 예수님의 이름이 그 이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매래속으로 함께 걸어가시는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가는 말

현재 이 예언을 말하는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어떤지 아십니까? 시편에 잘 기록되고 있습니다.우리가 바빌론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이르기를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 지로다 ( 137:1-5) 이게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현실입니다. 이제 이런 현실이 바뀌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가증스러운 악행으로 말미암아 떠난 것 같았던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여호와 삼마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진짜 교회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그럴 듯하게 갖추어져 있어도 여호와의 임재가 떠난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여호와 삼마의 교회인줄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여호와 삼마의 가정입니다. 여러분의 직장도 여호와 삼마의 직장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체도 여호와 삼마의 사업장입니다. 여러분의 학교도 여호와 삼마의 학교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여호와 삼마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Jesus is our Jehovah Shammah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3:5) 우리 가운데 성령님으로 함게 하시는 하나님.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느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이렇게 삶의 모든 순간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전히 소망합니다. 여호와 삼마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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