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의 위안
모자람의 위안

어느 장례식에서 남편을 추모하며 아내가 했던 추도사가 생각이 납니다.
그분의 추도사는 슬프고 애통으로 가득 찬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의 장례 예배를 더 아름답고 뜻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분은 말했습니다. "우선 침대에서 있었던 제 남편과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합니다.

장례식에서 부부의 침대의 이야기를 하는 게 무엇인가 엇박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제 남편은 자면서 코를 통해 바람으로 엄청난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는 그 소리에 스스로 놀라서 벌떡 일어나 잠결에 '무슨 일이야?' 합니다. 그러면 저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옆집 개가 짖는 소리에요' 하면 제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이 작은 불완전함 (Little imperfection)은 제 남편과 제 사이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이 작은 불완전함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제 사랑하는 자녀들도 언젠가 이런 작은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는 그 누군가를 만나 저처럼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귀중한 삶의 혜안이 담겨 있는 추도사였던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모자람의 위안을 깊이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에는 진짜 <모자람의 위안, The consolations of imperfection>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미국 목사님이 쓴 책인데 삶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혐오하거나 아예 부정하기는 쉽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한계에 마주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모자람의 한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와 새로운 성장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삶의 불가피한 한계 속에 숨겨져 있는 보화를 찾아 누리는 기지와 지혜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때로는 놓는 연습, 적절한 한계점에서 포기하는 슬기, 부족과 한계를 인정하는 용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늘 그저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하는 과거 지향적이며 부정적인 놓친 완전함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아픔이나 상실, 또는 모자람이나 불완전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복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확신이 흔들이고 자기의 실수가 명확해질수록 더 고집스럽게 우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의가 커질수록 더 확신 있는 것처럼 말하고 통제불능의 상황이 될수록 더 상황의 진실을 인정하고 직면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선입견이나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사물을 가두고 선택적 사고를 통해 얻은 결론을 고수하는 거입니다.

자기의 완강한 소신과 상반되는 진실과 증거를 애써 외면하며 뻔히 질 것이 확실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해도 상황이 진행되면서 모든 것이 자명해지면 거짓과 잘못된 안전 추구는 힘을 잃게 됩니다. 거짓과 비진리는 잠시는 통할 지 모르지만 그런 인생은 표류하게 마련이고 이를 계속해서 무시하면 삶의 여정만 더 위험해집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모자람과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한계와 모자람을 존중하며 그 모자람과 한계가 내 삶에 기여하는 몫을 발견하고 인정하며 그 속에 감추어진 보화를 찾아 누립니다.

한계나 모자람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닐지라도 나를 다음 단계로 인도하는 좋은 화살표가 되는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2)

정기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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