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용서합니다.
<이제는 용서합시다.>
(사무엘하 14:12-24)

드고아의 여인은 두 아들 이야기를 꾸며 전해주므로 다윗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우회적으로 다윗이 압살롬을 데려오지 않는 것이 이와 비슷한 처사임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압살롬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유독 다윗만 이를 모르는 체  하므로 부지중에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의 명예와 권위를 흔들지 않고 존중하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의도를 눈치챕니다.

다윗은 이런 것이 한 여인의 의중에서 꾸며질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고 "이 모든 일에 요압이 함께 했느냐"고 묻습니다. (19) 이에 여인은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변하여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20) 다윗은 자기 부하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한 여인의 충고나 배후의 인물 요압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잘 아는 그들에게 마음을 숨기지도 않고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입니다.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소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요압이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받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가로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21-24)

겉으로는 모든 게 해결된 것 같으나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는 해결되지 않은 채입니다. 같은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오히려 서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서먹하고 이상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기왕에 불러왔으면 앞에 무릎을 꿇리고 호통을 치던지 모든 것을 용서하니 바르게 살라고 말을 하던지 해야 했습니다. 이런 애매한 모습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후에 반역을 하게 하는 불씨가 됩니다.

김혜영이 지은 <숨지 마, 네 인생이잖아> 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게 해를 끼친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풍성해서 나를 살리고 타인을 살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잘못을 기억하는 동안은 그 잘못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의 태도가 그와 같았습니다. 우리들의 태도를 되돌아봅니다. 용서를 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마음에서 용서하지 않는 경우는 없을까요? 당신은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행복한 복음의 사람입니다. 정기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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